장성 황룡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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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황룡 전적
Hwangnyong Battlefield, Jangseong
장성 황룡 전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장성 황룡 전적
영문명칭 Hwangnyong Battlefield, Jangseong
한자 長城 黃龍 戰蹟
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356-2
지정번호 사적 제406호
지정일 1998년 6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전적지/동학전적지
수량/면적 20,851㎡
웹사이트 장성 황룡 전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곳 장성 황룡 전적은 잘못된 정치와 행정을 일삼던 벼슬아치를 나무라며 시작한 동학농민운동 투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계기가 된 황룡전투1)의 전적지(戰跡地)이다.

동학농민혁명은(1894) 동학사상으로 의식화되고 조직화 된 농민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궐기하여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구국운동이다. 이때 장성 황룡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대포와 양총2)으로 무장한 관군(官軍)과 싸워서 대포 2문과 양총 100여 정을 빼앗고 선본장 이학승3)과 다수의 관군을 살해했다. 동학농민군이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장태’라는 신 무기가 위력을 떨쳤기 때문인데 ‘장태’는 장성 접주4) 이춘영의 지도 아래 대밭에서 대나무를 쪼개어 원통형의 닭집을 만들어 그 안에 볏짚을 넣어 굴리면서 방패로 사용하며 적진으로 돌진한 것이다.

이곳 황룡에서 최대의 승전을 이룩한 동학농민군은 곧바로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을 도모하자, 전라 감사는 전봉준과 회담하여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5)를 설치해 농민통치를 실시했다. 비록 일본군의 침략으로 좌절되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사의 서막이요 민주운동과 민족운동의 원동력으로 역사발전을 주도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에는 명예회복운동을 전개해 2004년에 회복하였고 1997년에 장성군은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 등을 건립하였으며 1998년 6월 10일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매년 5월 27일에는 승전 기념식 행사가 진행된다.


  1. 황룡전투 :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
  2. 양총(洋銃) : 서양식의 총
  3. 이학승(李學承) : 동학농민혁명 당시 황룡전투에서 동학군과 싸우다 죽은 관군의 총지휘관으로 이학승 순의비가 공원 좌측에 위치해 있다.
  4. 접주(接主) : 동학(東學)에서 교구 또는 포교소(布敎所)의 책임자
  5. 집강소(執綱所) :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설치하였던 농민 자치기구

영문

Hwangnyong Battlefield, Jangseong

This is the site of the Battle of Hwangnyong, which took place between a local peasant army and government troops during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of 1894.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a democratization movement sparked by the excessive exploitation of peasants by local officials under an antiquated caste system. It emerged out of Donghak (“Eastern Learning”), an indigenous religious movement established in 1860 in opposition to the growing presence of Western powers and Christianity. Its goals were to defend the country and bring peace to the common people.

In Hwangnyong, the peasant army successfully defeated the government troops by taking away their cannons and Western-style guns and by employing a new defensive device invented by a local peasant army leader. Known as a “coop” (jangtae) because its design was based on a cylindrical bamboo chicken coop, the device measured 6 m in length and about 2 m in height. Filled densely with thatch, it could block enemy fire, while also remaining mobile as it could be rolled around.

After their success in Hwangnyong, the peasant army advanced north and took Jinjuseong Fortress, where the provincial office was located. There, they installed the headquarters for the peasant army’s network of autonomous directorates.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ontinued for about a year, growing into a large-scale nationwide resistance movement. Although the majority of the Donghak leadership were arrested and the peasant revolution ultimately failed, the basic philosophy of the revolution greatly influenced the subsequent anti-Japanese movement at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and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Beginning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1994, a campaign to restore the honor of the participant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initiated, culminating in the enactment of the “Special Act on the Restoration of Honor for Participants in the Donghak Peasants Revolution” in 2004. In 1997, Jangseong established a park and built a monument to commemorate Hwangnyong Battlefield, which was designated as a Historic Site the following year. An event to commemorate the successful battle is held each year on May 27.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관군 사이의 황룡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낡은 신분제 아래 지방 관리의 과도한 농민 수탈로 인해 촉발된 민중화 운동이었다. 1860년 서구 세력과 개신교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창시된 민족 종교인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황룡에서는 농민군이 관군의 대포와 양총을 빼앗고 농민군의 우두머리가 고안한 새로운 방어 무기를 이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장태라고 알려진 이 무기는 원래 대나무로 만든 원통형 닭집이고, 길이는 약 6m, 높이는 약 2m에 달한다. 장태 안쪽에 볏짚을 채워 굴리면서 적군의 포화를 막아내는 방패로 사용하였다.

황룡에서 대승을 거둔 농민군은 북진하여 감영이 있던 전주성을 점령하였고, 감영에 농민군 자치 기구인 집강소 총본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후 1년 여간 계속된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혁명의 기본 정신은 이후의 항일 의병 운동과 1919년 3·1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운동을 전개해 2004년 이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997년 장성군은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 등을 건립하였으며, 황룡 전적은 이듬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매년 5월 27일에는 승전 기념식 행사가 진행된다.

동영상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