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규 묘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한규 묘
Tomb of Yi Han-gyu
작성자 심자, 향토문화재 제4호 이한규 묘, 심자의 톡톡, 네이버 블로그, 2021.12.24.
대표명칭 이한규 묘
영문명칭 Tomb of Yi Han-gyu
한자 李漢珪 墓
주소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 산55번지
지정번호 부천시 향토유적 제4호



해설문

국문

조선시대의 무신 이한규(李漢珪, 1650~1729)와 부인 안동권씨의 합장묘이다.

이한규는 조선 제4대 왕 세종(1418~1450 재위)의 아홉째 아들인 화의군(和義君, 1425~?)의 6세손이다. 숙종 2년(1676) 무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다. 무관임에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수가 되는 도(道)는 명을 받는 날에 그 집안을 잊어야 하고, 진영을 방비하기로 약속함에 임하여서는 그 어버이를 잊어야 하며, 북채를 두드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며 군관들을 격려하였다.

이한규의 묘는 본래 경기도 양주에 있었는데, 영조 19년(1743) 전주이씨 화의군파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봉분 아랫부분에 돌을 둘렀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돌에는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을 새겼다. 묘 앞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혼이 나와 노닌다는 혼유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을 갖추었다. 묘비의 비문은 정조 4년(1780) 증손자 이문덕(李文德)이 지었다.

영문

Tomb of Yi Han-gyu

This is the joint tomb of Yi Han-gyu (1650-1729), a military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his wife, Lady Gwon of the Andong Gwon Clan. The tomb was originally built in Yangju, Gyeonggi-do, but i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in 1743 by the descendants of the Hwauigun Branch of the Jeonju Yi Clan.

Yi Han-gyu was a sixth-generation descendant of Prince Hwauigun (1425-?), who was the ninth son of King Sejong (r. 1418-1450). Yi Han-gyu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676 and served various government posts. Although he was a military official, he was fond of literary studies. He encouraged other military officials by saying that “the way to become a leader is to forget about one’s family on the day one receives the orders; to forget about one’s parents when promising to defend the camp; and to forget about oneself when the war comes.”

The base of the burial mound is surrounded by support stones, a popular feature of tomb architecture in the early Joseon period. On the stones, there are carvings of the twelve zodiac animals. The stone sculptures in front of the mound include a tombstone, a table, a spirit seat, two pillars, a lantern, and two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was composed in 1780 by Yi Mun-deok, Yi Han-gyu’s great-grandson.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무신 이한규(1650-1729)와 부인 안동권씨의 합장묘이다. 이한규의 묘는 본래 경기도 양주에 있었는데, 1743년 전주이씨 화의군파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이한규는 조선 제4대 왕 세종(재위 1418-1450)의 아홉째 아들인 화의군(1425-?)의 6세손이다. 1676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무관임에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수가 되는 도(道)는 명을 받는 날에 그 집안을 잊어야 하고, 진영을 방비하기로 약속함에 임하여서는 그 어버이를 잊어야 하며, 전쟁에 임하여서는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며 군관들을 격려하였다.

봉분 아랫부분에 돌을 둘렀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돌에는 12간지를 나타내는 동물을 새겼다.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혼유석, 한 쌍의 망주석, 장명등, 한 쌍의 문인석이 있다. 묘비의 비문은 1780년 증손자 이문덕이 지었다.

참고자료

  • 이한규 묘, 디지털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1154
  • 입향성씨, 디지털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1408 → 전주이씨는 5개 파가 세거하고 있는데, 이옥(李沃)관련항목 보기·이성의(李成義)를 입향조로 하는 효령대군파, 이경(李經)을 입향조로 하는 임영대군파, 이양·이병덕을 입향조로 하는 밀성군파, 이한규(李漢珪)를 입향조로 하는 화의군파, 이명인·이종응(李種應)을 입향조로 하는 덕흥대원군파가 있다. 전주이씨 이외에 이시진을 입향조로 하는 여주이씨, 이형신을 입향조로 하는 덕수이씨도 있다.
  • 이한규,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c_A1662_1_0024645&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false&kristalSearchArea=P
  • 이한규, 한국문집총간 편목색인, 한국고전번역원. http://index.itkc.or.kr/item?gubun=person#/view?gubun=person&cate1=&dataId=ITKC_MC_JG0146820
  • 이한규, 디지털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bucheon.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1253
  • (부천) 형조판서 이한규(李漢珪) 묘-전주이씨-, 개미실 사랑방, 네이버 블로그,2019.01.20. https://blog.naver.com/roaltlf/221441918343 → 묘역 사진 상세.
  • 향토문화재 제4호 이한규 묘, 심자의 톡톡, 네이버 블로그, 2021.12.24. https://blog.naver.com/simjy0/222603830053
  • 화의군,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화의군 →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서장자이며,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세조)에 맞선 육종영 중 한 사람이다. 성종대에 방면되었으나 종친의 지위를 박탈당하였다가 중종대에 복권되었다. / 1425년(세종 7년) 9월 5일, 세종(世宗)과 당시 궁인이었던 강씨(姜氏, 영빈 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육신 등의 왕위 복위 거사가 일어났을 때 세조가 화의군에게 묻기를 “성삼문을 파직 처리함이 옳지 않으냐.”는 물음에 화의군은 묵묵부답함으로써 전라도 금산(錦山)에 어머니 강씨와 함께 유배되었다. /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489년(성종 20년) 화의군은 자신의 서자를 종적에 편입시켜줄 것을 호소하였다. 화의군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이 기록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적어도 1489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하였고, 제일 마지막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