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명당각민대사가람수호기(김제 금산사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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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명당 각민대사 가람 수호기
Great Master Gakmin, Who Protected the Temple
대표명칭 용명당 각민대사 가람 수호기
영문명칭 Great Master Gakmin, Who Protected the Temple
한자 龍溟堂 覺敏大師 伽藍守護記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해설문

국문

용명당 각민대사(1846~1902)는 19세기 후반 금산사와 호남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고승이다. 전주 출신으로 1865년 20세에 강릉 정토사에서 출가하였다. 1879년에 완허(玩虛) 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용명(龍溟)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스님은 수 십년을 금산사에 머물며 많은 불사를 진행하였다. 장육불상에 새로 금칠을 하고 전각과 탑을 보수하였다. 수백 그루의 나무와 꽃을 심어 가람을 가꾸기도 하였다. 스님은 과거에 사라졌던 도승통제도를 부활하여 ‘호남도승통(湖南都僧統)’으로서 금산사는 물론 호남불교를 이끌어 갔다. 1891년 귀암사 중창을 시작으로 소심선실, 운문암, 용흥사 중창 등의 불사를 계속 하였다.

스님은 호탕한 성품을 지녔고 기질은 산하를 압도할 정도였으며 기강은 엄격하였다. 그러나 1902년 모악산 금광의 광부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모악산은 오래전부터 금이 출토되는 유명한 지역이었다. 1900년 절의 남쪽에 대규모의 금광이 개설되면서 채굴공사의 여파가 절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이에 스님은 가람의 수호에 명운을 걸고 공사를 저지하여 마침내 관아로부터 채광 금지령을 받아냈다. 그러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902년 새해 첫날 채광꾼들은 다시 금산사를 침범하였다. 스님은 미륵전 앞 잣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온몸으로 막았으나 그들이 던진 돌과 쇠망치에 끝내 입적하고 말았다. 죽음으로 가람을 지키고 불교를 수호한 위대한 순교자이다.

영문

Great Master Gakmin, Who Protected the Temple

Great Master Gakmin (1842-1902, pen name: Yongmyeongdang) was an eminent monk who oversaw a large restoration of Geumsansa Temple and significantly contributed to the spread of Buddhism in the Jeolla-do area in the late 19th century.

Born in Jeonju, Gakmin became a monk in 1865. He was the head monk of Geumsansa Temple at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During his time at the temple, he managed to complete many projects, including the renovation of several halls and stone pagodas. He was also the head of the Buddhist communities of the Doctrinal and Meditative Schools in the Jeolla-do region and thus led the promotion of Buddhism in the region.

The whole area of Moaksan Mountain, where Geumsansa Temple is located, had long been known for its gold deposits. Over the years, many people had searched for gold around this area, but at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the number of illegal prospectors dramatically increased. They often started approaching the temple and defiling the sacred place. In an attempt to save the temple, Gakmin pursued the local government office to issue an order to prohibit the mining of gold, which he received in December 1901. However, on the first day of 1902, prospectors again trespassed on the temple’s property. Gakmin sat in the lotus position under a pine tree in front of Mireukjeon Hall and tried to stop them, but was killed when the prospectors started throwing stones and hammers at him. After the master’s tragic death, the local Buddhist community courageously protested against mining and protected the temple until the prospectors left the area to never set foot here again.

영문 해설 내용

각민대사(1846~1902)는 19세기 후반 금산사와 호남 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고승이다.

각민대사는 전주 출신으로 1865년에 출가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금산사 주지로 수십년간 금산사에 머물며 전각과 탑을 보수하는 등 많은 불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호남 지역의 교종·선종을 통솔하는 최고의 승직을 맡아 금산사는 물론 호남 지역 전체의 불교 발전을 도모하였다.

당시 금산사가 위치한 모악산 일대는 오래전부터 금이 출토되는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불법으로 산을 파헤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900년에 들어서는 불법 채광꾼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채광꾼들은 금산사에까지 나타났고, 채광꾼들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스님은 가람의 수호에 명운을 걸고, 마침내 1901년 12월 관아로부터 채광 금지령을 받아냈다. 그러나 1902년 새해 첫날 채광꾼들이 다시 금산사를 침범하였고, 주지인 각민대사는 미륵전 앞 잣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온몸으로 채광꾼들을 막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던진 돌과 쇠망치에 맞아 입적하고 말았다. 각민대사의 순교 후 대중들은 결사적으로 항거하며 가람을 수호하였고, 극렬한 저항에 채광꾼들도 물러서기 시작하여 마침내 다시는 단 한 명의 채광꾼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