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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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서원
Ogyeseowon Confucian Academy
오계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오계서원
영문명칭 Ogyeseowon Confucian Academy
한자 迃溪書院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번지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5호
지정일 2005년 1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오계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성현을 기리기 위한 제사와 학문연구, 인재를 키우기 위해 사림*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 교육 기관이다. 현대의 사립지방학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서원은 향촌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해결하는 사림의 향촌 운영 기구로서의 기능도 수행 하였다.

오계서원은 선조 3년(1570) 이덕홍(李德弘)이 학문연구와 심신수련을 위해 세운 ‘오계정사’의 후신이다. 이덕홍은 영남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이황의 제자이다. 그는 10여 세에 이황의 제자로 들어가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는 거북선을 육지에는 거북선 모양의 수레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백성을 구제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많은 책을 남겼다.

오계정사가 임진왜란으로 퇴락해지자 선조 33년(1600)에 이덕홍의 아들인 이시(李蒔)가 쌍계마을(안동시 녹전면 원천리)로 옮겨 다시 세우고 ‘오계서당’이라 하였다. 현종 6년(1665)에 서당 뒤에 도존사(道存祠)를 세우고 이덕홍의 위패*를 모셨으며, 숙종 17년(1691)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서원이 물가에 있어 수해가 잦자 현 위치로 옮겼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6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 안에는 이덕홍과 이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도존사와 강당인 명륜당, 동재인 관성재, 서재인 관서헌, 정문인 입도문이 있고, 서원 밖에는 군자정(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276호)과 관리사 등이 있다. 매년 3월과 9월의 중정*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 사림(士林) : 조선 중기에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한 양반 지배층
  • 위패 :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
  • 중정(中丁) : 두번째 정일[丁日]
  • 서원 복설 시기 확인 필요 - 1976? 1978?

영문

Ogyeseowon Confucian Academy

Confucian academies, called seowon in Korean, are private education institutions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which usually combined the functions of a Confucian shrine and a lecture hall. This Confucian academy is dedicated to the scholar Yi Deok-hong (1541-1596) and his son Yi Si (1569-1636).

Yi Deok-hong was a disciple of Yi Hwang (1501-1570), one of the most prominent Confucian scholars of the Joseon period. He himself became famous for his studies and practice of Confucianism. Upon the outbreak of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Yi escorted the then crown prince, who later became King Gwanghaegun (r. 1608-1623), to refuge. At that time, Yi sent a petition to the king in which he proposed to fight off the Japanese pirates using turtle ships at sea and wagons constructed like turtle ships on land. His son Yi Si was considered exceptionally talented since childhood. He did not serve any official posts, instead dedicating himself completely to his studies.

The history of the site upon which they stand dates to 1570, when Yi Deok-hong built a lecture hall for his studies here. After the Japanese invasions, the lecture hall fell into disrepair. In 1600, Yi Si had the lecture hall rebuilt in Andong. In 1665, a shrine was added next to the lecture hall to hold the spirit tablet of Yi Deok-hong, and the complex was raised to the status of a Confucian academy in 1691. In 1711, the complex was moved back to its current location, as the location in Andong suffered from frequent floods. In 1724, the spirit tablet of Yi Si was additionally enshrined at the academy.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academy was demolished when most shrines and Confucian academies were shut down by a nationwide decree. The current buildings were reconstructed in 1976.

From front to back, there is a main gate, two dormitories, a lecture hall called Myeongnyundang, an inner gate, and a shrine. Ancestral rituals are held at the shrine in the third and ninth lunar months. To the right of the academy stands Gunjajeong Pavilion (Gyeongsangbuk-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276), an auxiliary building of the lecture hall built by Yi Deok-hong in 1570.

영문 해설 내용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 서원은 학자 이덕홍(1541-1596)과 그의 아들 이시(1569-1636)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덕홍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인 이황(1501-1570)의 제자였으며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세자였던 광해군(재위 1608-1623)을 호종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상소문을 통해 왜적을 물리칠 방책을 올리면서,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육지에서는 거북선과 유사한 구조의 수레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시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오계서원의 연원은 1570년 이덕홍이 학문을 수양하기 위해 세운 정사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이 임진왜란 이후 퇴락하자 이시가 1600년 안동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1665년 사당을 세워 이덕홍의 위패를 모셨으며, 1691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서원이 물가에 있어 홍수로 인한 피해가 잦아지자, 1711년 현재 위치로 옮겼고, 1724년에는 이시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19세기 후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가 1976년에 다시 세웠다.

서원은 앞쪽에서부터 정문,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강당인 명륜당, 내삼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린다. 서원 오른쪽에는 이덕홍이 1570년에 세운 정사의 부속 건물이었던 군자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6호)이 있다.

참고자료

Quote-left.png 귀갑선의 체제는 등에 창검을 붙이고, 머리에 쇠뇌를 숨겨 설치하며, 허리 부분에 작은 판옥을 두어 그 속에 사수(射手)가 들어가게 합니다. 옆으로는 사격하는 구멍을 내고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하고 가운데는 총통과 큰 도끼를 실어, 때려 부수기도 하고 포를 쏘기도 하고 활을 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면, 오는 적들이 많다 하더라도 반드시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횡전과 귀갑선을 마련하면 그 공력(功力)은 매우 적게 들이고 그 효과는 매우 클 것입니다. 아마 각 관청으로 하여금 한 달의 공력만 들이게 한다면 세상에 없는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오늘날의 전에 없던 치욕을 경계하시어 미천한 사람의 하찮은 말이라는 것을 잊으시고,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바로잡은 뒤에 특별히 전말을 아는 사람을 시켜 교지를 내리시어 점검하고 감독하시어 뒷날의 근심을 막으십시오.

또 포구에서 적이 육지에 내릴 만한 곳에 한 칸 정도의 판옥(板屋)과 판루(板樓)를 세워 밖에는 진흙을 바르고 안에는 판자 창문을 만들어 사수를 숨깁니다. 아래에는 사격하는 구멍을 내고 위에는 의병(疑兵)을 만들어 움직이고 구부렸다 폈다하기를 산 사람과 같이 하면 저들이 비록 철환을 쏘아도 사람은 상하지 않고 철환만 소진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누를 10보 간격으로 사면에 모두 그렇게 하고 예닐곱 명의 사수를 숨겨 각각 그 힘을 다하게 하면 백만의 적이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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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재소에 올린 소", 간재집,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20A_0030_020_0020_2019_001_XML


  • 오계서원, 서원연합회 http://www.seowonstay.com/bbs/board.php?bo_table=slist&wr_id=1098&sca=&sfl=wr_subject&stx=%EC%98%A4%EA%B3%84&sop=and =>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되었으나, 1595년(선조 28)에 쌍계(雙溪) 언덕으로 이건(移建)하였고, 1636년(인조 14)에 홍수로 유실되는 등, 여러차례 이건과 중건을 거쳤다. 사림의 공론으로 1665년(현종 6) 10월 2일에 도존사(道存祠)를 建立하고 이덕홍(李德弘)의 위패를 봉안한 후 1691년(숙종 17) 오계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99년과 1707년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서원이 침수 피해가 있자 1711년(숙종 37)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724년(경종 4)에 그의 장자 이시(李蒔)를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1919년에 복향하였고 1978년에 道存祠를 재건하였다.
  • 오계서원,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984 -> 오계서원은 1570년 이덕홍이 건립한 오계정사에서 출발한다. 임진왜란으로 오계정사가 퇴락하자, 1600년(선조 33) 이덕홍의 아들 이시가 쌍계(雙溪)[현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로 이건하였으며, 이름을 ‘오계서당(迂溪書堂)’으로 바꾸었다. 1663년(현종 4) 서당 뒤에 사당을 세우고 이덕홍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1691년(숙종 17)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물가에 있어 잦은 수재를 겪자 1711년(숙종 37) 송민도(宋敏道) 등이 여러 유생과 상의하여 부곡(釜谷)[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으로 이건하였다. 1724년(경종 4) 이시를 추향하였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78년 사당인 도존사(道存祠)를 재건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이밖에 오계서원의 관리 및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고직사가 있으며, 오계서원의 오른쪽에 군자정과 군자당, 오계서원 입구 양측에 활발대(活潑臺)와 연어대(鳶魚臺) 등이 있다.
  • 영주의 문화재, 오계서원과 군자정 - 161218, 겨울섬, 개인블로그 https://gotn.tistory.com/287
  • 퇴계 이황의 고제 이덕홍을 기리는 영주 군자정, 선비문화의 산실, 누정, 지역N문화 역사문화유산 https://ncms.nculture.org/pavilion/story/2275 -> 이덕홍은 예전에 거처하는 곳 앞에 연못을 파고 군자의 꽃인 연꽃을 심은 뒤 ‘군자당(君子塘)’이라 이름하고, 「군자당(君子塘)」이란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이를 추모하여 이덕홍을 추모하는 서원에서 연못을 파고 군자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군자정의 현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양호(楊鎬)가 쓴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