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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노리 조세성 묘, 조동점 묘, 조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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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노리 조세성 묘, 조동점 묘, 조완 묘
대표명칭 양노리 조세성 묘, 조동점 묘, 조완 묘
한자 趙世成 墓, 趙東漸 墓, 趙𡷗 墓
지정(등록) 종목 화성시 향토문화유산



해설문

국문

양노리 조세성 묘, 조동점 묘, 조완 묘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무반(武班) 가문 중 하나인 평양 조씨(平壤 趙氏) 일가의 묘역이다. 내금위장을 지낸 조세성(趙世成)의 묘 아래에 그의 손자인 어영대장 조동점(趙東漸)의 묘가 있으며,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80m 거리에 조동점의 아들인 통제사 조완(趙𡷗)의 묘가 있다.

조세성의 묘에는 원수방부(圓首方趺)* 형태의 묘표와 1740년에 세워진 개석방부(蓋石方趺)**형태의 묘갈***이 있고, 조동점의 묘에는 1774년에 세워진 개석방부 형태의 묘갈이 있다. 조세성 묘표는 그의 아들 조경(趙儆)이 글을 짓고 썼다. 조세성의 묘갈은 당대 문장가인 이조판서 이덕수(李德壽)가 글을 짓고, 명필 예조판서 윤순(尹淳)이 썼으며, 병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전자(篆字)를 썼다. 조동점 묘갈은 그의 아들 조완이 지었다. 앞면 큰 글씨는 우리나라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를 모았고, 작은 글씨는 당(唐)나라 명필 유공권(柳公權)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집자비(集字碑)로 당대 유명한 서예가의 글자를 모았다는 점에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양노리 평양 조씨 일가의 각 묘소에는 공통적으로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이 우수한 솜씨로 만들어졌으며, 18세기 석물을 대표할 만한 묘비도 세워져 있어 사료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 원수방부(圓首方趺): 비석의 머리(碑首)가 둥글고, 받침이 네모난 비석 형태
  • 개석방부(蓋石方趺): 비석의 머리가 가옥 지붕 같고, 받침이 네모난 비석 형태
  • 묘갈(墓碣): 머리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양노리에 위치한 이 묘역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무반 가문 중 하나인 평양조씨 일가의 묘역이다. 조세성(1656~1707)과 그의 손자 조동점(1700~1755)의 묘가 나란히 있으며,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80m 떨어진 곳에 조동점의 아들 조완(1724~1778)의 묘가 있다. 각 묘소에는 우수한 솜씨로 만들어진 상석, 향로석, 혼유석, 망주석이 있으며, 18세기 석물을 대표할 만한 비석들도 세워져 있어 사료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세성의 묘에는 윗부분이 둥근 묘표와 1740년에 세워진 지붕돌을 얹은 형태의 묘갈이 있다. 묘표에 새겨진 비문은 그의 아들 조경이 글을 짓고 썼다. 묘갈의 비문은 문장가 이덕수가 짓고, 명필 윤순이 글씨를 썼다. 조동점의 묘에는 1774년에 세워진 지붕돌을 얹은 형태의 묘갈이 있으며, 비문은 그의 아들 조완이 지었다. 특히 이 묘갈은 유명한 서예가의 글자를 모아 새겼다는 점에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큰 글씨는 한국의 명필 한호(1543-1605)의 글씨를 모았고, 작은 글씨는 당나라 명필 유공권(778-865)의 글씨를 모아서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