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 Head House of the Onhye Branch of the Jinseong Yi Clan, And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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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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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ead House of the Onhye Branch of the Jinseong Yi Clan, Andong |
한자 | 安東 眞城李氏 溫惠派 宗宅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604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민속문화재 제295호 |
지정(등록)일 | 2018년 11월 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4동 |
웹사이트 |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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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조부 이계양(李繼陽)이 조선 단종 2년(1454)에 지었다.
이계양이 봉화현 교도(敎導)*가 되어 부임지로 가는 길에 온혜리를 지나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산중턱에 앉아 쉬다가 지나가는 승려와 온혜의 풍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함께 마을로 내려왔는데 스님이 주변을 살피다가 낮은 구릉 기슭의 빈터를 가리키며“여기에 집을 짓고 살면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계양이 노송정 종택을 짓고 대대로 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에 퇴계가 1501년 이 집 몸채 한가운데 있는 튀어나온 방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퇴계 태실(退溪 胎室)’로 부르게 되었다.
본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口’자형이다. 본채의 중앙에 세 면을 계자 난간(鷄子欄干)**으로 둘러 누각 형식으로 독특하게 꾸민 곳이 ‘퇴계 태실’이다. 동남쪽 모서리에 마루를 두어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분리되어 있는데, 마루 위쪽에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본채 동쪽에는 ‘一’자형 건물인 노송정(老松亭)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대문은 성림문(聖臨門)이라고 한다.
온혜파 종택은 20세기 중반에 고쳐 지어졌다고 하나 전체적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모습을 지닌다. 특히 태실과 같은 독특한 방은 상류 주택의 한 면을 보여준다.
본래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60호 ‘퇴계 태실’로 지정되어 있었다. 2018년 11월에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으로 이름을 바꾸고 국가 민속 문화재로 등급이 올랐다.
- 교도: 고려ㆍ조선 시대에, 각 지방의 교육 기관에 파견하던 교관(敎官). 교수관이 없는 학교에 생원, 진사로 임명하였다.
- 계자난간: 조선 시대 가장 널리 쓰이던 난간으로, 계자다리라는 구름모양의 자재가 난간대를 지지하여 옆에서 보았을 때 난간대가 약간 밖으로 튀어나온 난간을 말한다.
영문
Head House of the Onhye Branch of the Jinseong Yi Clan, Andong
This house, built in 1454, is the head house of the family of Yi Gye-yang (1424-1488), a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 head house is a residence passed down among the male successors of a family lineage. It is also the birthplace of Yi Gye-yang’s grandson, the renowned Confucian scholar Yi Hwang (1501-1570, pen name: Toegye).
Yi Gye-yang originally lived in the neighboring Yean-myeon Township. In 1454, he was appointed as the headteacher of the local Confucian school in Bonghwa. As he was traveling from his home in the south to the school in the north, he stopped here in Onhye-ri to take a rest. As he sat on the mountain slope and took in the beautiful scenery, a Buddhist monk passed by, who explained the feng shui of the area to Yi. The two men went down to the village below, and the monk scanned the area and pointed to some empty land, stating that “If you build a house there, you will gain a precious son.” So, Yi Gye-yang relocated his house to this place. Just two generations later, Yi Hwang would go on to become one of the esteemed figures in Korean history and a teacher respected by the entire country.
The house consists of a gate quarters, main quarters, men’s quarters, and shrine, which were all renovated in the mid-20th century. The main quarters has a square layout with a courtyard in the middle. Jutting out into the courtyard is a room with an elevated wooden porch that is surrounded on three sides by a balustrade. This unusual architectural feature is said to be the place where Yi Hwang was born. To the right of the main quarters is the men’s quarters, which dates to 1589 and is named Nosongjeong (“Pavilion of the Elderly Pine”). To the right of this is the family shrine, which holds the spirit tablets of the family’s ancestors.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학자인 이계양(1424-1488) 가문의 종택으로 1454년에 처음 지었다. 종택이란 한 집안의 종가가 대대로 사는 집이다. 이곳은 이계양의 손자이자 대학자인 이황(1501-1570, 호: 퇴계)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계양은 원래 안동 예안면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1454년 봉화 지역 학교의 선생으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이곳 온혜리를 지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주변 산수의 아름다움에 취해 산중턱에 앉아 쉬다가, 지나가는 승려와 온혜의 풍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함께 마을로 내려왔고, 스님이 주변을 살피다가 어느 빈터를 가리키며 “여기에 집을 짓고 살면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계양이 그 터에 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였으며, 후에 이 집에서 태어난 이황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학자이자 국가적 스승으로 명망을 떨치게 되었다.
이 집은 대문채, 본채, 사랑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금의 건물들은 20세기 중반에 고쳐 지었다고 한다. 본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본채의 중앙에는 세 면에 난간을 두른 누각 형식의 방이 돌출되어 있는데, 이곳이 이황이 태어난 곳이다. 이 방의 전면에는 "퇴계의 태실"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본채의 오른쪽에는 1589년에 지은 사랑채인 노송정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문중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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