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영양남씨 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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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영양남씨 재사
Ritual House of the Yeongyang Nam Clan, Andong
안동 영양남씨 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안동 영양남씨 재사
영문명칭 Ritual House of the Yeongyang Nam Clan, Andong
한자 安東 英陽南氏 齋舍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 650
지정번호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1호
지정일 2012년 10월 22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곽
웹사이트 안동 영양남씨 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영양 남씨 재사는 조선 시대의 문신 둔재 남창년(屯齋 南昌年)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순조 26년(1826) 후손들이 지었다. 영양 남씨는 고려 숙종 4년(1099) 남공약이 안동 지역에 정착한 후, 와룡면, 일직면, 북후면, 풍산읍 일대에 대대로 살고 있다.

남창년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꼽히는 정여창의 제자였으나, 연산군 4년(1498) 스승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이 재사는 후손의 강학지소로 사용하였으며, 주변에 담장이 없는 ‘口’ 자형 건물이다. 건물 앞면에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마굿간과 부엌이 있고 오른쪽에 온돌방이 있다. 중문과 마주 보는 위치에 대청이 있고, 대청의 왼쪽 날개채에는 온돌방과 부엌이 있으며, 오른쪽 날개채에는 온돌방이 있다.

영문

Ritual House of the Yeongyang Nam Clan, Andong

This ritual house was built in 1826 by the descendants of the Yeongyang Nam Clan for the preparation of veneration rituals for Nam Chang-nyeon (1463-?),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Ever since Nam Gong-yak settled in Andong in 1099, generations of the Yeongyang Nam Clan have lived in the area, including in Waryong-myeon, Iljik-myeon, Bukhu-myeon, and Pungsan-eup.

Nam Chang-nyeon was a disciple of the scholar Jeong Yeo-chang (1450-1504), considered a master of Joseon-period neo-Confucianism. In 1498, his teacher was implicated in a literati purge, so he returned to his hometown where he dedicated himself to studying and teaching his disciples.

This ritual house has a square shape with a courtyard in the middle. The front of the building consists of a stable and kitchen to the left, a gate in the center,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to the right. In the back of the house is a wooden-floored hall. In the left wing of the house is an underfloor-heated room and a kitchen, while in the right wing is an underfloor-heated room.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 남창년(1463-?)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826년 영양남씨 후손들이 지었다. 영양남씨는 남공약이 1099년 안동 지역에 정착한 이후, 와룡면, 일직면, 북후면, 풍산읍 일대에 대대로 살고 있다.

남창년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꼽히는 정여창(1450-1504)의 제자였다. 1498년 스승이 사화에 연루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이 재사는 안마당을 가운데에 둔 ‘ㅁ’자형 건물이다. 건물 앞면에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마굿간과 부엌이 있고, 오른쪽에 온돌방이 있다. 중문과 마주 보는 위치에 대청이 있고, 대청의 왼쪽 날개채에는 온돌방과 부엌이 있으며, 오른쪽 날개채에는 온돌방이 있다.

참고자료

  • 안동 영양남씨 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76 -> 건물은 ‘口’자형으로 정면 맨 오른쪽에 1칸이 날개처럼 돌출되어 있다. 정면 중앙에 나 있는 중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마구간 1칸과 부엌 1칸을 두었고, 오른쪽으로는 2칸통 온돌방을 두었다. 중정 건너에는 2칸 대청이 마당 폭을 메우고 있으며, 대청 왼쪽에는 앞뒤 2칸통 온돌방과 부엌이 좌익사를, 오른쪽에는 2칸통 온돌방과 1칸 온돌방이 우익사를 구성하고 있다. 대청 배면의 쌍여닫이 울거미널 창호는 18세기 이후부터 거의 자취를 감춘 고식의 영쌍창으로 창틀 가운데에 작은 기둥이 서 있다. 건물의 구조 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3량가의 홑처마 건물이다. 고식의 자귀 수법으로 다듬은 대들보와 대청의 상부가구, 그리고 배면의 창호 형식이 고졸한 맛을 느끼게 한다. / ‘둔재(屯齋)’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 영양남씨,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118 -> 남휘주가 처음으로 안동 서가현촌(西可峴村,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에 살았고 무과에 올라 벼슬이 전리판서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입향 경위는 알 수 없다. 남휘주의 아들 남민생(南敏生, 1348~1403)은 호조참의를 지내고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5형제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남부량(南富良)은 삼척진병마검절사, 남수량(南遂良)은 중령호군, 남의량(南義良)은 수위교위, 남우량(南佑良)은 회령도호부사, 남보량(南普良)은 만호를 역임했으며 사위 황재(黃裁)는 현감, 배남(裴楠)은 정랑이 되었다. 남의량의 손자 남팔개(南八凱), 남팔준(南八俊) 형제가 현재의 일직면 망호2리로 이거하고 남항년(南恒年), 남창년(南昌年) 형제가 일직면 원리에 이거하였으며 남팔개의 증손 허영정(許水+穎亭) 남응원(南應元, 1539~1611)은 효행으로 정려되었다.
  • (참고)함양 정여창 묘역 -> 남창년의 스승 정여창 행적 참조. ; 정여창은 1486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추구하였다. 1498년 사화로 사림들이 화를 입었을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후인 1504년에 다시 한번 사화가 일어났을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이후 신원되어 1517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1610년에는 문묘에 모셔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