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준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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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준 묘소
Tomb of Yi Jun, Seoul
서울 이준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울 이준 묘소
영문명칭 Tomb of Yi Jun, Seoul
한자 서울 李儁 墓所
주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1
지정(등록) 종목 국가등록문화재 제514호
지정(등록)일 2012년 10월 19일
분류 등록문화재/기타/인물기념시설
시대 기타
수량/면적 현황측량면적 1,917㎡
웹사이트 서울 이준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대한 제국의 항일 애국지사이자 애국 계몽 운동가인 이준(1859~1907)의 묘소이다.

이준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1887년 과거 1차 시험인 초시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1895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률 교육 기관인 법관 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의 검사보가 되었으나, 욕심 많고 나쁜 짓을 일삼던 탐관오리들의 모함을 받아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 법과에 입학하였으며, 1898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돌아온 뒤에는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러 독립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 제국의 독립과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빼앗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상소문을 짓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펼쳤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은 비밀리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이준을 비롯한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은 무효임을 전 세계에 선언하고, 대한 제국이 독립할 수 있게 여러 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각국 대표들에게 문서를 보냈으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이준은 여러 날을 원통해 하다 결국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헤이그에 묻혀 있던 이준의 유해는 1963년에야 조국으로 돌아와 국민장을 치르고 이곳에 묻혔다.

묘역 중앙 제단 뒤의 담장에는 이준의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 부조상 오른쪽에는 고종이 내린 헤이그 특사 밀지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순국대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큰 절개)’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이준 열사의 글이 새겨져 있다. 담장 왼쪽에는 부인 이일정의 묘비가 있다.

영문

Tomb of Yi Jun, Seoul

This is the tomb of Yi Jun (1859-1907), a prominent leader in the movement to protect Korea’s sovereignty and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during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Born in Bukcheong (in today’s Hamgyeongnam-do Province, North Korea), Yi passed the first stage of the state examination in 1887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 1895, he graduated from the Education Institute for Judicial Officials, the first modern law school in Korea. Upon graduation, he received the position of assistant attorney at Hanseong District Court but was forced to resign after two months due to a slander campaign organized by the corrupt officials whom he was trying to persecute. He then went to Japan and enrolled in the Department of Law at Waseda University. In 1898, Yi graduated and returned to Korea.

Back in Korea, Yi joined several organizations involved in the movement to protect Korea’s sovereignty against foreign interference, such as the Independence Club (1896-1898),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movements for autonomy and enlightenment. In November 1905, when the illegal Japan-Korea Protectorate Treaty was signed and Korea was deprived of its diplomatic sovereignty, Yi together with other like-minded people wrote an official petition and organized protests insisting on the annulment of the treaty.

In June 1907, Emperor Gojong (r. 1863-1907) sent Yi Jun, together with Yi Sang-seol (1870-1917) and Yi Wi-jong (1887-?), as secret emissaries to the Second Hague Peace Convention to declare the invalidity of the Japan-Korea Protectorate Treaty of 1905 and to ask for other countries’ support in reestablishing Korea’s sovereignty. However, due to Japan’s interference, the delegation could not enter the convention hall and fulfill its diplomatic mission. Personal letters were sent to the representatives of the countries, but their reaction was indifferent. Distraught with the outcome of their mission, Yi Jun soon died in The Hague. In 1962, Yi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the highest among the Orders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recognition of his outstanding meritorious services to the country. The following year, his body, initially buried in The Hague, was returned to Korea where a state funeral took place, and the body was reinterred.

The tomb features a bust plaque depicting Yi Jun mounted above the altar. To the right of the bust are two plaques containing the confidential order issued to Yi by Emperor Gojong and an inscription reading “The Great Patriot Who Died for the Nation” calligraphed by Park Chung-hee, the former president of South Korea. To the left is a plaque engraved with Yi’s handwriting. Yi Jun’s wife Yi Il-jeong (1876-1935) is buried to the left of the stone wall.

영문 해설 내용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계몽운동가인 이준(1859-1907)의 묘소이다.

이준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1887년 과거 1차 시험인 초시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1895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률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으나, 탐관오리들의 모함을 받아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 법과에 입학하였으며, 1898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돌아온 뒤에는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러 독립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제국의 독립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빼앗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상소문을 짓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펼쳤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은 비밀리에 이준, 이상설(1870-1917), 이위종(1887-?)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은 무효임을 전 세계에 선언하고, 대한제국이 독립할 수 있게 여러 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각국 대표들에게 문서를 보냈으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이준은 여러 날을 원통해하다 결국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헤이그에 묻혀 있던 이준의 유해는 1963년에야 조국으로 돌아와 국민장을 치르고 이곳에 묻혔다.

묘역 중앙 제단 뒤의 담장에는 이준의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 부조상 오른쪽에는 고종이 내린 헤이그 특사 밀지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순국대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큰 절개)”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이준 열사의 필적이 새겨져 있다. 담장 왼편에는 부인 이일정(1876-1935)의 묘가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