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조식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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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조식 유적
Historic Site Related to Jo Sik, Sancheong
산청 조식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산청 조식 유적
영문명칭 Historic Site Related to Jo Sik, Sancheong
한자 山淸 曺植 遺蹟
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384번지 일원
지정번호 사적 제305호
지정일 1984년 1월 26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71,915㎡
웹사이트 산청 조식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산청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과 관련된 사적지이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 조언형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이후 기묘사화로 아버지가 파직되고 세상을 떠난 후 중종 26년(1531)에 처가인 김해지역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특히 명종 10년(1555)에 내려진 단성현감 벼슬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단성현감사직소」를 통해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얻어 전국의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이후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현재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72세에 생을 마감한 후 영의정 벼슬과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에 남겨져 있다. 사리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와 조식 묘소, 신도비, 여재실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정구(鄭逑, 1543~1620), 김우옹(金宇顒, 1540~1603),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산천재 건너편의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경내에 신도비가 있고 우측에는 덕천서원과 별도로 문중에서 조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으며 뒷산에 조식 묘소가 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고종 7년(1870)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 새로 지었다. 서원 안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와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다. 서원 남쪽 하천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영문

Historic Site Related to Jo Sik, Sancheong

This historic site is related to Jo Sik (1501-1572, pen name: Nammyeong), a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Jo Sik was born in today’s Samga-myeon, Hapcheon, but when his father Jo Eon-hyeong (1469-1526)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he moved to Seoul. His father was removed form office during the Literati Purge of 1519. In 1531, a few years after his father passed away, Jo Sik moved to his wife’s hometown in the Gimhae area and devoted himself to studying.

Together with Yi Hwang (1501-1570), Jo Sik was renowned as a representative scholar of the Gyeongsang-do region. He was offered official posts in the government several times but refused them all. In particular, in 1555, he refused to serve as magistrate of Danseong (today’s Sancheong area) and strongly criticized the political reality in his letter of decline to the king. As a result, literati came to him from all over the country requesting that he teach them.

In 1561, he moved to Deokcheondong (today’s Sicheon-myeon, Sancheong) in Jirisan Mountain, devoting himself to educating young people and actively proposing reformation plans for the political inconsistencies and the public welfare stability of the time. In 1615, he was posthumously promoted to chief state councilor, the highest position in the government.

There are two historic sites related to Jo Sik in Sancheong: Sa-ri and Won-ri Villages.

In Sa-ri Village is Sancheonjae Lecture Hall where Jo Sik taught his students, many of whom went on to become talented men such as Jeong Gu (1543-1620), Kim U-ong (1540-1603), and Gwak Jae-u (1552-1617). The lecture hall was later used as a venue for publishing the collected works of Jo Sik. The complex includes a stele commemorating Jo Sik’s life and achievements, a shrine named Yeojaesil where veneration rituals for Jo Sik are held, and the tomb of Jo Sik which is located on the mountain. In 2004, the Nammyung Memorial Hall was built nearby.

In Won-ri Village are Deokcheonseowon Confucian Academy and Sesimjeong Pavilion. Deokcheonseowon Confucian Academy was established in 1576 to commemorate the Confucian scholarship of Jo Sik. It was once demolished in 1870 when most shrines and Confucian academies were shut down by a nationwide decree and was built anew in the 1930s. The complex includes a shrine named Sungdeoksa and a lecture hall named Gyeonguidang. Sesimjeong Pavilion is located on the riverside to the south of the Confucian academy and is said to have been where the literati who studied at Deokcheonseowon Confucian Academy engaged in leisurely activities.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조식(1501-1572)과 관련된 유적이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 조언형(1469-1526)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1519년 사화로 아버지가 파직되고 세상을 떠난 후, 1531년 처가인 김해 지역으로 이주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황(1501-1570)과 함께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특히 1555년에 단성(지금의 산청 지역) 현감 벼슬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사직소를 통해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얻어 전국의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이후 1561년 지리산 덕천동(지금의 산청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1615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에 남겨져 있다.

사리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가 있으며, 이곳에서 정구(1543-1620), 김우옹(1540-1603), 곽재우(1552-1617)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밖에 조식의 신도비, 조식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고, 뒷산에 조식의 묘소가 있다. 2004년에는 남명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덕천서원은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에 세운 서원이다. 1870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 새로 지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숭덕사와 강당인 경의당이 있다. 서원 남쪽 하천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