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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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
Tomb and Stele of Jo Gwang-jo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
영문명칭 Tomb and Stele of Jo Gwang-jo
한자 文正公 趙光祖 墓 및 神道碑
주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 55-1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169호
지정일 1999년 10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광조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중종 5년(1510)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중종 10년(1515)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나아갔다.

그는 사림파를 이끌며 ‘유교로서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어진 왕이 현명한 신하와 함께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또한 향촌을 유교 이념으로 교화하기 위해 ‘상호부조’를 내세운 ‘여씨향약’을 팔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밖에 도교적인 국가 제사를 주관하는 소격서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펴는 동시에 사림파를 이끌면서 훈구 대신들의 부패를 질타하고,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히 위훈삭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 세력인 훈구파의 강한 반발과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전라도 능주(현재 화순군 능주면)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훗날 선조는 조광조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며, 문집으로 『정암집』을 남겼다.

묘역은 선조 때 조성되어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묘는 그의 부인 한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묘역 내에는 대리석 묘표, 혼유석, 상석이 각 1개씩 있고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선조 18년(1585)에 세웠으며, 노수신이 비문을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으며, 김응남이 전액을 쓰는 등 당대의 문장가와 명필이 참여하여 금석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 위훈삭제: 중종이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앉도록 도운 공신 중 실제로 공을 세우지 않은 신하들은 공신록에서 삭제하고 상으로 내주었던 토지 등을 몰수하도록 한 것

영문

Tomb and Stele of Jo Gwang-jo

This is the tomb and stele of Jo Gwang-jo (1482-1520), a Confucian scholar and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stele was erected in 1585 to commemorate Jo Gwang-jo’s life and achievements.

A student of the renowned scholar Kim Goeng-pil (1454-1504), Jo placed first in the classics licentiate examination in 1510 and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15. He dedicated his life to the realization of an ideal governance system based on Confucian principles, which he believed to be the core of political doctrine. To promote Confucian ideology in rural areas, he supported the implementation of the village code (hyangyak), or a set of rules for self-governance designed to encourage mutual aid among the local community to achieve common goals.

Jo was also a proponent of radical reforms that aimed to establish a new political order by eradicating flawed political systems and punishing corrupt civil officials. While serving as inspector-general in 1519, Jo reviewed the deeds of individuals who had received titles and land for contributing to the dethronement of the tyrannical ruler King Yeonsangun (r. 1494-1506) and found that some of them had been given the awards under false pretenses. Jo had these awards revoked, which created many political enemies. As a result, Jo was falsely accused of treason and exiled to today’s Hwasun area, where he was forced to commit suicide by poison. In 1568, Jo’s honor was reinstated, and he was bestowed with the posthumous office of chief state councilor.

The tomb is well preserved in its original form. There are several stone sculptures in front of the earthen burial mound, including a tomb marker, a spirit seat, a table, a pair of pillars, and a pair of civil official statues. Jo Gwang-jo’s wife, a lady of the Hansan Yi Clan, is also buried in the tomb.

The stele is considered very valuable in the field of epigraphy as its text was composed by the famous writer No Su-sin (1515-1590) and calligraphed by the renowned calligrapher Yi San-hae (1539-1609), both of whom served as chief state councilor.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조광조(1482-1520)의 묘와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조광조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85년에 세워졌다.

조광조는 저명한 학자인 김굉필(1454-1504)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10년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151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유교로서 정치의 근본을 삼고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평생 노력하였다. 그리고 향촌을 유교 이념으로 교화하기 위해 전국에 향약을 실시하였는데, 이 향약은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 도와야 한다는 ‘상호부조’ 개념을 토대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광조는 부패한 관리들을 질타하고 잘못된 제도를 없앰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1519년 대사헌을 지내던 당시에는 폭군 연산군(재위 1494-1506)을 몰아내는데 기여한 공신들의 행적을 검사하였고, 공을 세우지 않은 신하들은 공신에서 제외하고 상으로 주었던 토지 등을 몰수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광조는 정적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역모를 꾀한다는 누명을 쓰고 지금의 화순 지역으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1568년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광조의 묘역은 조성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대리석 묘표, 혼유석, 상석이 각 1개씩 있고,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있다. 묘는 부인 한산이씨와의 합장묘이다.

신도비는 문장가이자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1515-1590)이 비문을 짓고 서예가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1539-1609)가 글씨를 써 금석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갤러리

참고자료

주석

  1.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 『경기도 문화재 총람 도지정편 2』, 경기도,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