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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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모당
Mangmodang Pavilion
망모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망모당
영문명칭 Mangmodang Pavilion
한자 望慕堂
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356번지
지정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지정일 1979년 12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망모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조참판을 지낸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 1556~1620)가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1605년 집의 후원에 세운 정자이다. 이곳에서 우산(紆山)에 있는 선영을 바라보며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망모당이라 하였다. 편액(扁額: 건축물의 명칭을 쓴 액자) 글씨는 중국 명나라의 명필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이다. 주지번은 송영구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맺은 인연으로 그를 스승처럼 여겼다.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오면서 소식을 듣고 글씨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앞면은 주초석의 높이가 1m에 달하지만 뒷면은 얕게 지반을 계단식으로 다져 지었다. 망모당은 건립 연대가 빠르며, 조선 시대 상류층의 생활문화와 함께 우수한 건축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

영문

Mangmodang Pavilion

Mangmodang Pavilion was built in 1605 by the civil official Song Yeong-gu (1556-1620) in his father’s memory. The name Mangmodang means “Hall of Gazing with Admiration” and evokes the image of looking upon an ancestor’s tomb and cherishing their memory.

Song Yeong-gu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84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From 1593 to 1613, he was dispatched to Ming China as an official envoy. During this time, he met the famous Chinese calligrapher Zhu Zhifan (1575-1624), who was preparing for the state examination, and with whom he eventually developed a teacher-student relationship. It is said that in 1606 when Zhu was sent as an envoy to Korea, he came to Iksan to visit Song and calligraphed the name plaque for this pavilion.

The pavilion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Balustrades are installed along the front of the building.

영문 해설 내용

망모당은 조선시대의 문신 송영구(1556-1620)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1605년 집 후원에 세운 정자이다. ‘망모당’은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추모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송영구는 1584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고, 1593년과 1613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때 과거를 준비하고 있던 명필 주지번(1575-1624)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주지번은 송영구를 스승으로 여겼다. 이후 주지번이 1606년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직접 익산을 방문해 현판의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정자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쪽에는 난간을 설치했다.

참고자료

  • 망모당, 디지털익산문화대전 http://iksan.grandculture.net/iksan/toc/GC07500435 -> 망모당은 1605년 표옹 송영구가 창건한 후 1704년 종손이 서쪽으로 옮기면서 대들보를 고쳤다. 1903년 옛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1995년 지붕을 보수하고, 1999년 문짝을 보수하고, 2007년 기단을 보수하였다. 여러 차례 수리를 한 뒤 2011년 해체 보수하였으며 담장 및 조경 공사를 하였다. 망모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정자이다. 바닥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는데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 1칸은 방으로 구성하였다. 정면은 난간만 설치하고 개방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은 벽을 치고 바라지창을 내었다. 기단은 경사지를 따라 조성하였는데, 누정의 멋을 내기 위하여 전면부 기단을 낮추고 높은 주춧돌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반듯한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앞에서 두 번째 기둥 열에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 위에 공포는 초익공 형식인데 조각 수법이 우수하다.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부재인 창방을 끼우지 않고 조각한 첨차와 소로를 놓아 장여와 주심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팔자(八字)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 송영구, 디지털익산문화대전 http://iksan.grandculture.net/iksan/toc/GC07500644 -> 송영구는 1556년(명종 11) 익산에서 태어났다. 1584년(선조 17)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주서와 사과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을 지냈다. 이후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송영구는 1599년 관직에 복귀하여 충청도도사와 지평을 거쳐 1600년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간원사간·청풍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필선으로 재임 중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1613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4년 송영구는 오위도총부부총관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1615년 이이첨(李爾瞻)이 권력을 장악하고 폐모론(廢母論)을 일으키자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620년 사망하였다.
  • 표옹 송영구와 중국 사신 주지번의 인연, 디지털익산문화대전 http://iksan.grandculture.net/iksan/toc/GC07501342 -> . 평소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이었던 송영구는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정청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직된다. 이후 익산 왕궁(王宮)에 낙향하여 있을 때, 북경에서 알게 된 주지번(朱之蕃)[?~1624]이 조선의 사신으로 자원하여 익산 왕궁까지 내려와 송영구를 만나고 갔다. 이때 주지번이 남긴 것이 망모당액자 편액이다. 망모당은 송영구의 집 후원에 있는 누정인데, 우산(紆山)에 위치한 선영(先塋)을 망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익산학 도보체험, 표옹 송영구와 주지번 인연을 찾아서, 익산시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hiksanin/222302335348
  • [이승연교수의 전북문화재이야기]조선시대 민간외교의 결실, 익산의 망모당 현판, 새전북신문, 2020.12.8. http://sjbnews.com/news/news.php?number=700364
  • 10.망모당, 익산문화 사랑방,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jeun58/222001282799 -> 실제 답사 사진.
  • 송영구는 광해군(재위 1608-1623)의 계모인 인목왕후를 몰아내는 데 반대하다가, 1615년 파직당했고, 이후 관직에 복귀하지 않고 생을 마감했다.
  • 주지번과 송영구 이야기 -> 주지번과 송영구는 1593년 송영구가 명나라에 갔을 때 처음 만났다. 주지번은 과거를 준비하면서 객관의 잡부로 일했는데, 그를 본 송영구가 과거 답안을 작성하는 요령을 알려주면서 책과 돈을 건네며 주지번을 격려했다. 주지번은 2년 후인 1595년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했고, 자신을 도와주었던 송영구를 스승으로 여기며 그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1606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주지번은 송영구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조정에서는 처음에는 송영구가 죽었다고 했으나 주지번은 믿지 않았고, 말 1필과 하인 1명만 대동하고 전라도 지역을 방문해 전주객사에 묵으며 ‘豊沛之館(풍패지관)’이란 현판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주지번이 익산으로 향했을 당시 송영구는 평양 대동역참(大同驛站)의 찰방(察訪)이라는 종6품의 문관으로 좌천된 상태여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두 사람이 만났다는 설명이 많으나 오류로 보임.) 그는 현판을 써주면서 송영구의 묘자리를 정해주고 돌아갔다. 이후 1613년 송영구가 두 번째 사행을 갔을 때 주지번을 만나 당시의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을 이야기하고 함께 감회를 나누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