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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구산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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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구산동 고분군
Ancient Tombs in Gusan-dong, Gimhae
김해 구산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김해 구산동 고분군
영문명칭 Ancient Tombs in Gusan-dong, Gimhae
한자 金海 龜山洞 古墳群
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
지정번호 사적 제75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시대 가야
수량/면적 3,663㎡
웹사이트 김해 구산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분산(盆山)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한 가야멸망기 내지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이다. 원래는 대규모의 고분군이었으나 최근까지 계속된 파괴로 현재는 겨우 3기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수로왕비릉 동쪽 100m 거리에 2기의 고분이 있고, 200m 정도 떨어져 산복도로 변의 높은 곳에 1기의 고분이 있다. 산복도로 변에 위치한 고분은 최근에 구산동 백운대고분(龜山洞 白雲臺 古墳)으로 개칭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발굴조사되었던 삼산리 1호분은 수로왕비릉에 가까운 직경 12.8m, 높이 4m의 거대한 봉토를 가진 고분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고분은 굴식돌방무덤[積穴式石室墳]으로서 동서 3.4m, 남북 3m의 장방형 돌방[石室]에 남쪽으로 연도(羨道)가 달려있다. 4벽은 위로 가면서 좁혀 쌓았고, 좁아진 천정은 2장의 뚜껑돌[蓋石]로 덮었다. 돌방 바닥에는 ㄱ자 모양의 관대(棺臺)가 만들어졌다.

수정 국문

초고

1호분

이곳은 분산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한 무덤군이다.

수로왕비릉의 오른편에 가깝게 위치한 고분 1은 직경 최대 12.8m, 높이 최대 4m 규모로, 1919년 발굴을 거쳐 사적 제109호 ‘삼산리 고분(三山里 古墳)’으로 지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은 바닥에 ‘ㄱ‘자 모양의 관 받침대를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였으며,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묘역을 구분하였다.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은 남쪽으로 두었고 봉토를 덮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김해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발견된 토기가 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무덤은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가 된다.

2호분

이곳은 분산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한 무덤군이다.

고분 2는 고분 1보다 조금 작은 직경 최대 5.5m, 높이 최대 2m 규모이며, 6세기 중반~후반 사이에 고분 1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석이 노출되고 한쪽 벽이 파괴되어 내부가 들여다보였던 상태였지만, 지금은 흙을 덮었다.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묘역을 구분하고 남쪽에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을 두었으며 봉토를 덮었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김해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고분 1과 같이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

  • 내부가 노출되었던 고분이 작은 규모의 고분이 맞는지 확인 한 번 더 필요.

1차 수정

1호분

수로왕비릉의 오른편에 가깝게 위치한 1호분은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크기는 직경 최대 12.8m, 높이 최대 4m이다.

바닥에 ‘ㄱ‘자 모양의 관 받침대를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였으며,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묘역을 구분하였다.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은 남쪽으로 두었고 봉토를 덮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김해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2호분

2호분은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크기는 직경 최대 5.5m, 높이 최대 2m 이며, 1호분보다 약간 작다.

개석이 노출되고 한쪽 벽이 파괴되어 내부가 들여다보였던 상태였지만, 근래에 흙을 덮었다.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묘역을 구분하고 남쪽에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을 두었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김해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분)으로
    • 관 받침대 -> 시상
    • 석실의 형태와 규모 추가 ->석실은 평면 장방형(너비 약 260㎝, 길이 약 310㎝)으로 천장은 궁륭형에 가까운 평천장이다.
    • 의미 추가 ->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의 동향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고분이다.
    • 석실의 구조적인 특징 추가
    • 연대와 위상을 추정할 수 있는 토기, 금속제품 등 부장품에 대한 기술 추가
    • 역사적인 의미 추가 바람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수로왕비릉의 동쪽에 위치한 1호분은 6세기 중반 이후에 만든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봉분의 크기는 직경 최대 12.8m, 높이 최고 4m이고, 가장자리에 둘레돌을 둘렀다.
    •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은 남쪽으로 두었고, 돌방 바닥에 ‘ㄱ‘자 모양의 받침대를 만들어 주검을 안치하였는데, 4차례의 매장이 되었다.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세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2호분은 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굴식돌방 무덤이다. 봉분 크기는 직경 최대 5.5m, 높이 최고 2m이며, 1호분보다 약간 작다.
    • 무덤은 통로와 주검과 껴묻거리를 넣은 돌방으로 이루어졌다. 돌방 벽면과 주검 받침대는 백회를 발랐다. 이 무덤은 뚜껑돌이 지면에 드러나고 한쪽 벽이 파괴되었으나 근래에 흙을 덮어 정비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돌방에서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 이 무덤은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세력자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수로왕비릉의 오른편에 가깝게 위치한 1호분은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직경 최대 12.8m, 높이 최대 4m로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2호분은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크기는 직경 최대 5.5m, 높이 최대 2m 이며, 1호분보다 약간 작다.

2차 수정

1호분

수로왕비릉의 오른편에 위치한 1호분은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봉분의 크기는 직경 최대 12.8m, 높이 최고 4m이고, 가장자리에 둘레돌을 둘렀다. 내부는 주검과 껴묻거리를 넣은 돌방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로 이루어져 있다. 통로와 출입문은 남쪽으로 두었고, 돌방 바닥에 ‘ㄱ‘자 모양의 받침대를 만들어 주검을 안치하였다.

2호분

2호분은 7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봉분의 크기는 직경 최대 5.5m, 높이 최고 2m 이며, 1호분보다 약간 작다. 내부는 주검과 껴묻거리를 넣은 돌방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무덤은 뚜껑돌이 지면에 드러나고 한쪽 벽이 파괴되었으나 근래에 흙을 덮어 정비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돌방에서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