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반, 김익겸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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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김익겸의묘
Tombs of Kim Ban and Kim Ik-gyeom
김반김익겸의 묘, 유성구 홈페이지.
대표명칭 김반·김익겸의묘
영문명칭 Tombs of Kim Ban and Kim Ik-gyeom
한자 金槃·金益兼의墓
주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산18-1
지정(등록) 종목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등록)일 1989년 3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김반·김익겸의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곳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김반(金槃)과 그의 아들 김익겸(金益兼)의 묘이다. 김반(金槃)은 예학자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이자 문묘에 제향된 김집(金集)의 아우이다. 그는 문과 급제 후에 대사간·이조참판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1640년에 조성되었으며, 부인 안동 김씨·연산 서씨와 합장되었다. 묘역 입구에 신도비가 있고, 묘소에는 묘갈, 상석, 향로석, 금관조복(金冠朝服)을 한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김익겸(金益兼)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사수하며 항전하다 김상용, 권순장 등과 함께 23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복자가 서포 김만중이다. 그는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사신들이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함께 귀국하자 그와 성균관 유생들은 용골대의 주살(誅殺)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청나라 사신들이 서둘러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김익겸은 경기도 교하의 강가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1640년경 ‘산소골’로 불리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영문

Tombs of Kim Ban and Kim Ik-gyeom

These are the tombs of Kim Ban (1580-1640),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his son Kim Ik-gyeom (1614-1637). Kim Ban is buried in the tomb mound in the front, together with his first and second wives, Lady Kim and Lady Seo. Kim Ik-gyeom is buried in the mound in the back.

Kim Ban was the son of Kim Jang-saeng (1548-1631), an eminent philosopher and politician. In 1637, when the Manchu invasion began, Kim Ban escorted King Injo (r. 1623-1649) to refuge in Namhansanseong Fortress. At the same time, the crown prince and the royal relatives retreated to Ganghwado Island, and Kim Ik-gyeom and his mother, Lady Seo, followed. However, in less than a month, Ganghwado fell to the enemy. Kim Ik-gyeom desperately fought back until the very end before ultimately taking his own life. Upon hearing the news of her son’s death, Lady Seo also committed suicide. The two-month-long invasion ended with King Injo’s surrender to Qing China. Kim Ban was rewarded for his service to the king with various high official posts.

Initially, the bodies of Kim Ik-gyeom and Lady Seo were temporarily buried in Gyoha (today’s Paju), Gyeonggi-do, but were moved to their present location around 1640. In front of each tomb mound are a tombstone, a stone table, a stone incense table, and a pair of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At the entrance to the tombs is a stele erected in 1661, which record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Kim Ban.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김반(1580-1640)과 그의 아들 김익겸(1614-1637)의 묘이다. 앞쪽에 있는 것이 김반과 두 부인 안동김씨, 연산서씨의 합장묘이고, 뒤에 있는 것이 김익겸의 묘이다.

김반은 저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의 아들이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반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던 인조(재위 1623-1649)를 호종하였다. 당시 왕자와 종친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김익겸은 어머니인 연산서씨와 함께 강화도로 갔다. 적이 침입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김익겸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자결하였으며 아들의 소식을 들은 연산서씨도 자결하였다. 결국 인조가 항복하면서 약 두 달간의 전쟁이 끝났고, 김반은 왕을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김익겸과 연산서씨의 시신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경기도 교하(현재의 파주 지역)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1640년경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두 무덤의 주위에는 각각 묘비, 상석, 향로석, 1쌍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묘역 입구에는 김반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61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

=> 상세 위치 및 신도비 건립정보 확인.
=>김익겸 이장 관련 내용 확인
  • 김장생 - 김반 - 김익희, 김익겸 - 김만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