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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둔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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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둔대교회
대표명칭 군포 둔대교회
한자 軍浦 屯垈敎會
국가유산 종목 경기도 등록문화유산
지정(등록)일 2022년 4월 6일
분류 등록문화유산 / 기타 / 종교시설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군포 둔대교회,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군포 둔대교회는 농촌계몽운동*과 야학* 등 근대 교육이 이루어졌던 현장이다. 배재학당 출신의 가정교사 황삼봉이 1902년에 반월면 지주였던 박영식의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올리고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던 것이 그 시작이다. 원래는 1903년에 흙으로 지은 토담 구조의 작은 교회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건물은 1936년에 박영식의 손자인 박용덕과 박인기가 신축한 것이다.

박용덕은 소설 『상록수』의 실제 배경이 된 ‘샘골교회’의 부지를 기증해 샘골학원을 짓는 것을 지원하고, 한국전쟁 때 반월초교가 불타자 둔대교회 예배당을 학교 건물로 활용하게 하는 등 교육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용덕의 동생인 박인기 역시 둔대교회의 장로이자 야학의 교장이 되어 적극적으로 선교와 교육 활동에 앞장섰다.

둔대교회의 교육 활동은 190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둔대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야학으로 정착하여 지역 주민들의 교육과 농촌계몽운동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이는 소설 『상록수』의 모델이 되었던 최용신이 1931년에 샘골교회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한 것보다 20여 년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교육 활동은 1960년대 초기까지 이어졌으며 현재도 둔대교회는 계몽운동의 역사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교회 건물은 지상 1층의 목조건물로 사방이 경사를 이룬 우진각 지붕으로,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을 이룬다. 한옥으로 건립하였으나 넓은 예배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실내 공간을 도리 방향에서 보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였고, 우측면에 양쪽이 경사진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돌출하여 현관을 두었다. 우리나라 건축은 정면에 출입구를 두는 것이 보편적인 데 반해 측면에 출입구를 둔 점이 특징적이다.

둔대교회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한 시기에 한옥에 교회의 기능을 부여한 절충형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유사한 형태의 건축물이 많이 소실된 가운데 그 희소성을 인정받고 있다.


  • 농촌계몽운동: 학생이나 지식층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형성하여 진행한 사회교육운동. 식민 통치 항쟁기에는 독립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광복 후에는 농촌사회의 근대화를 위해 추진되었다.
  • 야학: 근로 청소년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을 대상으로 야간에 수업을 하는 교육기관.
  • 배재학당: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1995년 8월에 서울 중구 정동에 세운 근대 교육기관.

영문

Dundae Church, Gunpo

Dundae Church, located behind the Bak Family's Historic House, was built in 1936 by the brothers Bak Yong-deok and Bak In-gi, who were the grandsons of the church's founder Bak Yeong-sik. A rare example of an extant Korean-style church from the early 20th century, the building is also of great historical importance as a center of Christian worship and modern education in the Gunpo area.

Dundae Church traces its origins to 1902, when the wealthy local resident Bak Yeong-sik invited Hwang Sam-bong, a graduate of the Western missionary school Pai Chai Academy, to serve as a private tutor for his grandson Bak Yong-deok. While staying with the family, Hwang Sam-bong invited local residents to the house's men's quarters for worship and education. To accommodate these gatherings, Bak Yeong-sik built a small earthen church building in front of his house in 1903, which was relocated to the current site in 1910.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the church became a local hub for the rural enlightenment movement, having served as the venue of a night school. It continued to be used as an educational space until the 1960s, having temporarily served as a public school after the nearby Banwol National School was destroyed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These various activities were supported and led by both Bak Yong-deok and Bak In-gi, who actively contributed to the local community through their missionary and educational work. Today, the building continues to serve as an educational space to teach about the history of the rural enlightenment movement.

The current single-story wooden building, which was built in a traditional style with a hip roof, is characterized by its unusual features designed to optimize the interior space for use as a worship venue. Most notably, the entrance is placed on the right end of the building, rather than along the front, and is fitted with an extension that serves as a porch.

영문 해설 내용

둔대교회는 군포 지역의 예배 공간이었을뿐 아니라 농촌계몽운동과 야학 등 근대 교육이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1902년 당시 군포 지역에서 가장 부자였던 박영식은 손주 박용덕의 교육을 위해 서울 배재학당 출신의 황삼봉을 가정교사로 초빙하였다. 황삼봉은 박영식의 집 사랑채에서 박용덕을 가르쳤으며, 주민들까지 모아 예배를 올리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에 박영식은 1903년 집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토담 구조의 작은 교회 건물을 지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였고, 이후 1910년 자신의 집 뒷쪽으로 교회를 옮기게 하였다. 지금의 둔대교회 건물은 1936년 박용덕과 박용덕의 동생인 박인기가 새로 지은 것이다.

둔대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야학으로 정착하여 지역 주민들의 교육과 농촌계몽운동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인근의 반월국민학교가 소실되자 둔대교회 예배당을 임시 학교 건물로 활용하였다. 박인기는 둔대교회의 장로이자 야학의 교장으로, 적극적으로 선교와 교육 활동에 앞장섰다. 둔대교회의 교육 활동은 1960년대 초기까지 이어졌고, 지금도 둔대교회는 계몽운동의 역사를 교육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교회 건물은 지상 1층의 목조건물이고 사방이 경사를 이룬 우진각지붕을 얹었다. 건물 오른쪽에 박공지붕을 돌출하여 현관을 두었다. 전통 한옥 건물은 정면에 출입구를 두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실내 공간을 넓게 활용하기 위해 측면에 출입구를 둔 점이 특징적이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20세기 초 한옥에 교회의 기능을 부여한 절충형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유사한 형태의 건축물이 많이 소실된 가운데 그 희소성을 인정받고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