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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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묘려
Gwandongmyoryeo Ritual House
관동묘려, 두피디아.
대표명칭 관동묘려
영문명칭 Gwandongmyoryeo Ritual House
한자 寬洞墓廬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냉천로152번길 291 (마산동)
지정번호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7호
지정일 1994년 6월 7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2동
웹사이트 관동묘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관동묘려는 관동(마산동의 옛 지명)에 있는 묘를 돌보기 위해 지은 작은 집이다. 이 묘려는 효행과 정절로 정문(旌門)을 하사받은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어머니 류씨 부인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건립된 재실이다.

솟을대문 형식의 문간채 뒤편으로 ‘ㄱ’자형 평면의 묘려가 배치되어 있으며, 묘려의 대청에는 ‘관동묘려(寬洞墓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류씨 부인의 묘소는 재실 동쪽에 있다.

류씨 부인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다. 이를 가엽게 여긴 친정 부모는 고려의 풍습대로 재혼을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류씨 부인은 일부종사(一夫從事: 평생 한 남편만을 섬김)를 고집하며 4살의 송유를 업고 개성에서 시댁이 있는 이곳 회덕까지 내려와 아들을 키우면서 시부모를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영문

Gwandongmyoryeo Ritual House

Gwandongmyoryeo Ritual House was built for the preparation of ancestral rituals and the maintenance of the tomb of Lady Ryu (1371-1452) of the Goheung Ryu Clan, who was the mother of Song Yu (1388-1446),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Her tomb is located to the east of the ritual house.

Lady Ryu’s husband died when she was only 22 years old. It is said that her family encouraged her to remarry, but she chose to remain devoted to her late husband, carrying her then four-year-old son on her back all the way from her parents’ house in Gaeseong (in present-day North Korea) to her in-law’s house in Hoedeok (present-day Daejeon). Lady Ryu served her in-laws with great care and devoted herself to raising her son benevolently, resulting in Song Yu’s descendants becoming esteemed scholar-politicians and the Eunjin Song Clan taking its place as a prestigious family. In 1653, Lady Ryu was posthumously commemorated by the government in recognition of her matrimonial devotion.

The ritual house consists of a gate quarters and a main quarters. The wooden-floored hall of the main quarters features a wooden plaque inscribed with the name of the house, Gwandongmyoryeo, which means “Tomb Hut of Gwandong,” referring to the former name of Masan-dong, where this ritual house is located.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 송유(1388-1446)의 어머니 고흥류씨(1371-1452)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재실이다. 류씨의 묘소는 재실 동쪽에 있다.

류씨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친정 부모가 그녀를 재혼시키려 하였으나, 그녀는 일부종사를 고집하며 4살의 송유를 업고 친정인 개성(지금의 북한)에서 시댁인 회덕(지금의 대전 지역)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류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고, 송유의 후손들이 학자와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며 은진송씨가 명문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에 류씨의 업적을 인정하여 1653년 정려가 내려졌다.

이 재실은 문간채와 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 대청에는 ‘관동묘려’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관동은 이 재실이 위치한 마산동의 옛 지명이고, 묘려란 "묘를 돌보기 위해 지은 작은 집"이라는 뜻이다.

갤러리

참고자료

주석

  1. 관동묘려, 두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