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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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Birthplace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Mujang, Gochang
고창 무장 동학 농민 혁명 기포지, 고창동학농민혁명, 고창군.
대표명칭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영문명칭 Birthplace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Mujang, Gochang
한자 高敞 茂長 東學農民革命 起包地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0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129호
지정(등록)일 2014년 10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민족종교/천도교
웹사이트 고창 무장 동학 농민 혁명 기포지, 고창동학농민혁명, 고창군.



해설문

국문

'무장 동학 농민 혁명 기포지'는 1차 동학 농민 혁명이 시작한 곳이다.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뜻하는 서학과 대비가 된다는 의미의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관군의 소탕을 피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 함께 손을 잡고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켜 봉기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뫼’*이다. 1894년 3월 20일에 밝힌 ‘무장 포고문’에는 사대 명의(四大名義)와 12개조 기율 등 봉기의 목적과 행동 지침이 담겨 있다. 이는 세상에 거대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반침략을 지향하는 개혁 운동이자 전국적 항쟁이었다. 동학 농민 혁명은 조선의 봉건 사회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저항 의지를 확연히 보여준 반제국주의 운동이다. 이 농민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뒤의 항일 의병 운동과 3·1 독립 만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당뫼: 고창 공음의 구암 또는 구수라는 마을 앞에는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당산’또는 ‘당뫼’라 불렀다.

영문

Birthplace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Mujang, Gochang

This place is where the local peasant armies who particip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ere trained. To honor this historic site, a memorial park was established here in 1994.

Donghak, meaning “Eastern Learning,” is a teaching established in 1860 by Choe Je-u (1824-1864). It arose in opposition to the growing presence of Western powers and Christianity in the 19th century. Donghak promoted the belief that “man is heaven, and all men are equal.” This academic teaching began to develop into a social reform movement to protect the country and ease the lives of the common people.

In 1894, the magistrate of Gobu (today’s Jeongeup) excessively exploited farmers, so the Donghak followers and peasant army of the Gobu area, with Jeon Bong-jun (1855-1895) at the center, staged an uprising and drove out the corrupt government officials. While retreating from the government troops, Jeon Bong-jun fled to Mujang (today’s Gochang) where he and Son Hwa-jung (1861-1895), the leader of the movement in the Mujang area, enlisted and trained farmers. In addition, Jeon declared the beginning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alling for each district in Jeolla-do Province to join and participate. The declaration stated the objective of the revolution and the guidelines of the activity.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ontinued for about one year. Not merely a local rebellion, the revolution spread nationwide as a large-scale resistance movement founded on the principles of anti-feudalism and anti-foreign influence. The majority of the Donghak leadership, including Jeon Bong-jun, were arrested an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ultimately failed. However, the basic philosophy of the revolution greatly influenced the subsequent anti-Japanese movement at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and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1994년 기념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1824-1864)가 창시한 종교이다. 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뜻하는 '서학'에 대립하는 민족 종교라는 의미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며, "사람이 곧 하늘이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이후 동학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1894년 고부(지금의 정읍 지역)의 군수가 농민들을 과도하게 수탈하자, 전봉준(1855-1895)을 중심으로 한 고부 지역의 동학교도와 농민군이 시위를 벌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다. 전봉준은 관군을 피해 무장(지금의 고창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며, 무장 지역의 동학 지도자였던 손화중(1861-1895)과 함께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켰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전라도 일대의 각 지역에 알리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포고문에는 봉기의 목적과 행동 지침 등이 담겨 있었다.

무장에서 시작되어 1년 여간 계속된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반침략을 지향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혁명의 기본 정신은 이후의 항일 의병 운동과 3·1 독립 만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