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3.1운동 기념관
해설문
국문
독립지사 유경근과 조종환 선생은 일본경찰의 감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강화 남부지역에서 강화 3·1 만세 운동을 시작하자고 결의하였다.
이에 연희전문학교 재학생 황도문이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피뫼교회 담임목사 이진형과 장윤백, 황도문, 황유부, 유봉진 선생이 이곳에서 회동하여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세우고 1919. 3. 18. 유봉진 대장을 필두로 강화읍 장터에서 2만 여명의 군중과 함께 강화 3·1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1919. 3. 9. 조종환 외 20여명이 모여 강화 3·1 만세운동을 최초로 논의 했던 곳으로, 강화군은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20년 복원사업을 실시하여 당시 피뫼교회(現 강화초대교회) 예배당을 복원하였다.
영문
Ganghwa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Memorial Hall
This memorial hall was established in 2020 to commemorate the participation of the people of Ganghwa in the March 1st Indepenence Movement of 1919.
In 1910, Korea was illegally and forcibly colonized by Imperial Japan. On March 1, 1919,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as proclaimed by 33 activist leaders in Seoul, and Korean people all across the country began to protest for the end of colonial rule.
On Ganghwado Isl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began on March 9, when around 20 people, including Yu Gyeong-geun (1877-1956) and Jo Jong-hwan (1890-1937), gathered at the private residence of Yi Jin-hyeong, the minister of Pimoe Church (today’s Ganghwa First Methodist Church), to make formal plans for a demonstration. The southern area of Ganghwado Island, where the church was located, was largely overlooked by the colonial police and was, therefore, a suitable location for such a gathering. Hwang Do-mun (1897-1950), who was a student at Yonhi College (today’s Yonsei University), had obtained a copy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n Seoul and brought it to the meeting. On March 18, 1919, around 20,000 locals gathered at the market in Ganghwa-eup to call for Korea’s independence from Imperial Japan. This independence demonstration was the largest among all those held in the Seoul and Incheon region.
This memorial hall is a reconstruction of the chapel of Pimoe Church as it stood at the tim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영문 해설 내용
이 기념관은 1919년 강화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을 기념하여 2020년에 건립되었다.
1910년 한국은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식민지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33인의 민족대표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전국적으로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강화도에서는 3월 9일 유경근(1877-1956), 조종환(1890-1937)을 비롯한 20여 명의 사람들이 피뫼교회(현 강화초대교회)의 담임목사 이진형의 사택에 모여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세우면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위치한 강화 남부 지역은 일본 경찰의 감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모임에 적합하였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던 황도문(1897-1950)이 경성에서 독립선언서 사본을 입수하여 강화로 가져왔다. 1919년 3월 18일 강화읍 장터에서 2만 여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는 당시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수의 주민들이 참여했던 만세 운동이었다.
이 기념관은 3.1운동 당시 피뫼교회 예배당을 복원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