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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루를 묘사한 옛 작품들
이야기
조선시대 광주읍성 내 희경루(喜慶樓)는 단순한 누각이 아니라 문인과 학자들이 자연과 사유를 공유하던 문화의 공간이었다. 이 누정은 광주읍성의 일부로, 그 자체로 문예의 정수가 담긴 장소로 회자되었다. 일찍이 신숙주(申叔舟)는 희경루기를 남기며 그 첫 기록을 시작했으며, 성임(成任)은 “호남 오십 고을 중 경치는 내 고향을 꼽는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희경루를 지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까지 그 이름을 올렸다.
16세기에는 송순(宋純)을 비롯한 호남 문인들이 희경루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차광주희경루운은 그의 문집 면앙집에 수록되었고, 그의 벗 임억령(林億齡)과 제자 임제(林悌) 역시 각각 차광주희경루운과 희경루를 남겼다. 이들은 석천시집, 임백호집에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희경루의 정취는 한 시대를 넘어 더 넓은 문단의 공통 기억으로 확장되었다. 소세양(蘇世讓), 권벽(權擘), 송인수(宋麟壽), 이석형(李石亨) 등은 각각 차광주희경루운, 차광주희경루운, 차광주희경루운, 차광주희경루운을 남겼고, 이 작품들은 양곡집, 습재집, 규암집, 저헌집에 각각 실려 희경루를 찬미했다.
17세기에도 그 흐름은 끊기지 않았다. 김상용(金尙容)의 망제, 이순인(李純仁)의 희경루, 조팽년(趙彭年)의 희경루별여상부는 각각 선원유고, 고담일고, 계음집에 실려 후대의 기억 속 희경루를 되살렸다.
이 흐름의 절정에는 박광옥(朴光玉)의 희경루전목사류후태호명경심이 있다. 이는 회재유집에 수록되었으며, 그 자신이 광주목사를 지낸 인물로서, 희경루에 머물렀던 여러 인물들의 풍모를 기리는 글이다.
이처럼 희경루는 조선 지식인들의 심상을 담은 정서적 무대였다. 누정은 시와 기록을 통해 수백 년을 이어 광주의 정신사에 깊이 각인되었고, 수많은 작품들이 서로를 참조하며 이 공간을 시공을 넘어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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