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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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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 [[희경루|희경루(喜慶樓)]]에는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광주목사|광주목사]]로 재임 중이던 [[최응룡|최응룡]][[희경루방회|희경루방회]]를 주재하여 동방의 인재들과 함께 연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는 [[1546년_증광시_문과|1546년 증광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후, 고을을 다스리는 동시에 학문과 인재를 중시하는 정치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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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 전라도 [[희경루|희경루(喜慶樓)]]에서는 특별한 만남이 열렸다. 1546년 [[1546년_증광시_문과|증광시 문과]][[1546년_증광시_무과|무과]]에 급제한 동기생 다섯 명이 20여 년 만에 다시 모여 [[희경루방회|방회(榜會)]]를 가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최응룡|최응룡]], [[강섬|강섬]], [[임복|임복]], [[남효용|남효용]], [[유극공|유극공]]이다. 각기 문과 장원, 병과, 을과 등으로 급제한 이들은 그 [[광주목사|광주목사]], [[전라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 [[승문원부정자|승문원부정자]], [[전라도병마우후|전라도병마우후]], [[낙안군수|낙안군수]] 등으로 출사하며 각자의 경로를 걸었다.
  
이날 방회에는 마찬가지로 이 시기 과거에 급제한 문무 관료들이 초대되었다. [[강섬|강섬]][[1546년_증광시_문과|문과]] 병과 2위로 입격한 인물로, 훗날 [[전라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로 활약하게 된다. [[임복|임복]]은 을과 5위로 [[승문원부정자|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남효용|남효용]][[유극공|유극공]]은 각각 [[1546년_증광시_무과|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낙안군수]]와 [[전라도병마우후|전라도병마우후]]로 관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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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방회는 단순한 회포가 아닌,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위치를 함께 기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장소는 당시 [[활터|활터]]로도 기능했던 [[희경루|희경루(喜慶樓)]]였고, 이 장면은 회화를 통해 기록되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희경루방회도|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이다. 이 회화는 [[희경루방회|희경루방회]]의 순간을 포착한 계회도이며, [[희경루방회도_발문|발문]]은 모임의 주도자 [[최응룡|최응룡]]이 남겼다. 현재 이 작품은 [[동국대학교_박물관|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CPNO:1121118790000|(보물) 희경루방회도]]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희경루|희경루]]의 뜰 앞 [[활터|활터]]에서 활쏘기를 겨루고, 시문을 교유하며 연회를 즐겼다. 그 모습은 그림으로 남아 [[희경루방회도|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라 불리게 되었고, [[CPNO:1121118790000|(보물) 희경루방회도]]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림의 발문은 이 방회의 주최자였던 [[최응룡|최응룡]]이 직접 지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_박물관|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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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map-광주_희경루|3D 지도]]로 복원된 희경루의 공간을 통해, 우리는 조선 중기의 인재들이 나눈 우정과 교유, 그리고 문무를 아우른 그들의 삶의 궤적을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다.
 
 
이 방회는 단순한 연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지역 인사들이 고을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희경루|희경루]]에 모여 과거 급제의 기쁨을 나누고 문무의 교류를 도모한 사건으로, 지역 엘리트들이 교류하며 유교적 가치와 지방 통치 이념을 실천했던 자리를 기록한 역사적 장면이다. [[vmap-광주_희경루|3D 지도) 광주 희경루]]통해 오늘날에도 그 공간을 가늠할 수 있다.
 
  
 
== 스토리 그래프 ==
 
== 스토리 그래프 ==

2025년 6월 23일 (월) 15:30 판

희경루방회도, 그림으로 남은 연회

이야기

1567년, 전라도 희경루(喜慶樓)에서는 특별한 만남이 열렸다. 1546년 증광시 문과무과에 급제한 동기생 다섯 명이 20여 년 만에 다시 모여 방회(榜會)를 가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최응룡, 강섬, 임복, 남효용, 유극공이다. 각기 문과 장원, 병과, 을과 등으로 급제한 이들은 그 후 광주목사, 전라도관찰사, 승문원부정자, 전라도병마우후, 낙안군수 등으로 출사하며 각자의 경로를 걸었다.

이들의 방회는 단순한 회포가 아닌,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위치를 함께 기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장소는 당시 활터로도 기능했던 희경루(喜慶樓)였고, 이 장면은 회화를 통해 기록되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이다. 이 회화는 희경루방회의 순간을 포착한 계회도이며, 발문은 모임의 주도자 최응룡이 남겼다. 현재 이 작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희경루방회도로 지정되었다.

3D 지도로 복원된 희경루의 공간을 통해, 우리는 조선 중기의 인재들이 나눈 우정과 교유, 그리고 문무를 아우른 그들의 삶의 궤적을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다.

스토리 그래프



이야기 지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