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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이들은 [[희경루|희경루]]의 뜰 앞 [[활터|활터]]에서 활쏘기를 겨루고, 시문을 교유하며 연회를 즐겼다. 그 모습은 그림으로 남아 [[희경루방회도|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라 불리게 되었고, [[CPNO:1121118790000|(보물) 희경루방회도]]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림의 발문은 이 방회의 주최자였던 [[최응룡|최응룡]]이 직접 지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_박물관|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
| − | + | 이 방회는 단순한 연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지역 인사들이 고을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희경루|희경루]]에 모여 과거 급제의 기쁨을 나누고 문무의 교류를 도모한 사건으로, 지역 엘리트들이 교류하며 유교적 가치와 지방 통치 이념을 실천했던 자리를 기록한 역사적 장면이다. [[vmap-광주_희경루|3D 지도) 광주 희경루]]를 통해 오늘날에도 그 공간을 가늠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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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3일 (월) 14:49 판
희경루방회도, 그림으로 남은 연회
이야기
1546년, 희경루(喜慶樓)에는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광주목사로 재임 중이던 최응룡이 희경루방회를 주재하여 동방의 인재들과 함께 연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는 1546년 증광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후, 고을을 다스리는 동시에 학문과 인재를 중시하는 정치로 이름을 남겼다.
이날 방회에는 마찬가지로 이 시기 과거에 급제한 문무 관료들이 초대되었다. 강섬은 문과 병과 2위로 입격한 인물로, 훗날 전라도관찰사로 활약하게 된다. 임복은 을과 5위로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남효용과 유극공은 각각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와 전라도병마우후로 관직에 나섰다.
이들은 희경루의 뜰 앞 활터에서 활쏘기를 겨루고, 시문을 교유하며 연회를 즐겼다. 그 모습은 그림으로 남아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라 불리게 되었고, (보물) 희경루방회도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림의 발문은 이 방회의 주최자였던 최응룡이 직접 지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방회는 단순한 연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지역 인사들이 고을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희경루에 모여 과거 급제의 기쁨을 나누고 문무의 교류를 도모한 사건으로, 지역 엘리트들이 교류하며 유교적 가치와 지방 통치 이념을 실천했던 자리를 기록한 역사적 장면이다. 3D 지도) 광주 희경루를 통해 오늘날에도 그 공간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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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