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024-C201"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광주문화예술인문스토리플랫폼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야기)
(이야기)
4번째 줄: 4번째 줄:
  
 
== 이야기 ==
 
== 이야기 ==
1567년, 광주의 누정 희경루(喜慶樓)특별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1546년 명종 초, 증광시 문과와 무과에 각각 합격했던 동기생 다섯 명이었다. 세월이 흘러 각자의 삶을 걸어온 이들은 다시 광주에서 조우했다. 이 만남의 의미를 오래도록 간직하고자 ‘희경루방회(喜慶樓榜會)’가 열렸고, 이를 기념하여 한 폭의 그림이 남겨졌다. 바로 『희경루방회도』이다.
+
1546년, [[희경루|희경루(喜慶樓)]]에는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광주목사|광주목사]]로 재임 중이던 [[최응룡|최응룡]]이 [[희경루방회|희경루방회]]를 주재하여 동방의 인재들과 함께 연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는 [[1546년_증광시_문과|1546년 증광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후, 고을을 다스리는 동시에 학문과 인재를 중시하는 정치로 이름을 남겼다.
  
연회에 참여한 인물들은 조선 중기 전라도의 주요 행정과 군사체계의 중심을 이루던 이들이었다.
+
이날 방회에는 마찬가지로 시기 과거에 급제한 문무 관료들이 초대되었다. [[강섬|강섬]]은 [[1546년_증광시_문과|문과]] 병과 2위로 입격한 인물로, 훗날 [[전라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로 활약하게 된다. [[임복|임복]]은 을과 5위로 [[승문원부정자|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남효용|남효용]]과 [[유극공|유극공]]은 각각 [[1546년_증광시_무과|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낙안군수]]와 [[전라도병마우후|전라도병마우후]]로 관직에 나섰다.
  
최응룡은 1546년 문과 장원(갑과 1위)에 급제한 후, 광주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그는 이후 희경루방회도 발문을 직접 짓는 등 이 그림의 상징적 주체가 되었다.
+
이들은 [[희경루|희경루]]의 뜰 앞 [[활터|활터]]에서 활쏘기를 겨루고, 시문을 교유하며 연회를 즐겼다. 그 모습은 그림으로 남아 [[희경루방회도|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라 불리게 되었고, [[CPNO:1121118790000|(보물) 희경루방회도]]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림의 발문은 이 방회의 주최자였던 [[최응룡|최응룡]]이 직접 지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_박물관|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강섬은 같은 과거 시험에서 병과 2위로 합격해 전라도관찰사까지 지낸 문신이었고,
+
이 방회는 단순한 연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지역 인사들이 고을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희경루|희경루]]에 모여 과거 급제의 기쁨을 나누고 문무의 교류를 도모한 사건으로, 지역 엘리트들이 교류하며 유교적 가치와 지방 통치 이념을 실천했던 자리를 기록한 역사적 장면이다. [[vmap-광주_희경루|3D 지도) 광주 희경루]]를 통해 오늘날에도 공간을 가늠할 수 있다.
 
 
임복은 을과 5위로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를 역임했다.
 
 
 
무과 출신인 남효용과 유극공은 각각 낙안군수와 전라도병마우후로 지방 군사행정에 기여했던 인물이었다.
 
 
 
이들이 모인 장소 희경루는 단순한 연회의 장소가 아니었다. 활터로도 쓰였던 이 누정은 광주의 문무를 상징하는 공간이었고, 지금은 3D 지도(vmap)로 그 위치와 구조가 복원되며 디지털 공간에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만남은 단지 회포를 푸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 그림에는 총 36명의 기녀들이 음악과 무용으로 화답하는 연회 장면이 화려하게 담겼고, 당시 지방 양식의 회화기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지방화단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 준다.
 
 
 
이 기념 그림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제1879호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 한 점의 회화는 단지 한때의 잔치를 그린 것이 아니라, 지방관료 엘리트들의 우정과 연대, 그리고 광주라는 공간이 갖는 정치문화적 의미를 정제된 붓질로 기록한 것이다.
 
  
 
== 스토리 그래프 ==
 
== 스토리 그래프 ==

2025년 6월 23일 (월) 14:49 판

희경루방회도, 그림으로 남은 연회

이야기

1546년, 희경루(喜慶樓)에는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광주목사로 재임 중이던 최응룡희경루방회를 주재하여 동방의 인재들과 함께 연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는 1546년 증광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후, 고을을 다스리는 동시에 학문과 인재를 중시하는 정치로 이름을 남겼다.

이날 방회에는 마찬가지로 이 시기 과거에 급제한 문무 관료들이 초대되었다. 강섬문과 병과 2위로 입격한 인물로, 훗날 전라도관찰사로 활약하게 된다. 임복은 을과 5위로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남효용유극공은 각각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군수전라도병마우후로 관직에 나섰다.

이들은 희경루의 뜰 앞 활터에서 활쏘기를 겨루고, 시문을 교유하며 연회를 즐겼다. 그 모습은 그림으로 남아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라 불리게 되었고, (보물) 희경루방회도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림의 발문은 이 방회의 주최자였던 최응룡이 직접 지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방회는 단순한 연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지역 인사들이 고을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희경루에 모여 과거 급제의 기쁨을 나누고 문무의 교류를 도모한 사건으로, 지역 엘리트들이 교류하며 유교적 가치와 지방 통치 이념을 실천했던 자리를 기록한 역사적 장면이다. 3D 지도) 광주 희경루를 통해 오늘날에도 그 공간을 가늠할 수 있다.

스토리 그래프



이야기 지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