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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학자 박광일, 물 한 방울 새지 않던 학문
이야기
광주 지역의 학맥을 잇는 대표적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광일(朴光一)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 박상현(朴尙玄)은 광주에서 유학을 기반으로 한 가풍을 일구었으며, 박광일을 송시열에게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송시열은 박광일의 강론을 높이 평가하며 ‘치수불루(置水不漏)’라 칭했으며, 이는 박광일의 학문적 정밀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박광일은 말년에 관직을 사양하고 지리산 문수동에 거처하면서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의 시문은 후손에 의해 정리되어 『손재선생문집』으로 간행되었고, 그를 기리는 공간인 손재로 역시 그의 호를 따 명명되었다. 이처럼 박광일은 광주 지역 유학의 지적 전통과 정서를 집약한 인물로서, 광주 및 강진 지역에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배향 공간은 두 곳에 나뉜다. 광주광역시 진곡동의 진천사는 박상현, 박광일 부자를 비롯하여 박충정, 박치도, 박중회, 박영림 등 광주 유림들이 함께 배향된 사우로, 조선 후기의 유교 지식 공동체가 공간적으로 응집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진천사는 사라졌으나 진천사유허비가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한편, 전라남도 강진에 위치한 강진 남강서원에는 송시열과 함께 박광일이 배향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지역을 넘어 조선 유학의 계보에서 인정받은 인물임을 방증한다. 지역을 달리하는 두 기념공간은 박광일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지방 유학의 네트워크와 기억의 공간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지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