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문규
기본 정보
| 이름 | 노문규 |
|---|---|
| 한자명 | 盧汶奎 |
| 이칭 | 응삼(應三), 송해(松海) |
| 생몰년도 | 1850년~1935년 |
| 성별 | 남성 |
| 국적 | 조선 |
정의 및 개요
- 노문규(盧汶奎, 1850~1935)는 어지러운 세태에서 자신의 종적을 숨기기 위해 일곡마을 입구에 송해당(松海堂)을 지었다.
특징
- 노문규는 광산노씨다. 그의 문집으로 송해유집(松海遺集)이 있다.
- 광주향교의 유사를 맡았고 향약을 만들어 관찰부주사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병합 후 사직하였다.
- 간재(艮齋) 전우(田愚),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편지로 교우를 나눈 사이다.
- 노문규는 1906년 송해당을 중수하고 휴양처로 삼았다.
- 송해당은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전통 가옥이다. 송해당의 의미는 그의 뜻이 솔처럼 곧고 마음이 바다처럼 넓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 송해당은 현재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1860년도에 건립되었으며 1906(고종 10년)에 중수되었다.
- 노문규는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후 7년 동안 옥고를 치뤘다. 1935년 풍질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송해당 | http://aks.ai/GC60001196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송해유집 | http://aks.ai/GC60004690 |
| 웹리소스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 송해당 |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1345#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노문규 | 송해당 | 노문규는 송해당을 지었다. | ||
| 송해당 | 일곡동 | 송해당은 일곡동에 있다. | ||
| 노문규 | 기우만 | 노문규와 기우만은 관련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