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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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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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원록(李源祿)
출생 1904년 음력 4월 4일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시
사망 1944년 1월 16일
사망지 베이징 감옥

생애 및 활동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1]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이육사의 조부가 사망하였고, 그 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보문의숙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에 이육사는 안용락의 딸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되고, 1923년에는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다. 1924년, 이육사가 20살이 되던 해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25년 1월에 일본에서 귀국한 이육사[1]는 형 이원기, 아우 이원유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2025)에 가입하였다. 그는 의열단 활동을 하며 항일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1927년에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었고, 이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밖에도 이육사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자 대구청년동맹 간부로서 옥고를 치루게 된다.

1930년에 이육사는 첫번째 시인 조선일보에 발표하였고, 평문인 <대구사회단체개관>을 <별건곤>에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이육사의 문단활동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는 1931년 대구격문사건에 연루되어서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루게 된다.

1935년에는 <신조선>에 <춘수삼제>, <황혼>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인으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1939년에는 종암동으로 이사하여, 대표작인 <청포도>, <절정>, <광인의 태양>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43년에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었고,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육사 사망 이후, 이육사의 친동생인 이원조는 죽기 전 남긴 시인 <꽃>과 <광야> 를 소개하였고, <육사시집>을 출판하였다.

대표 작품


광야(2025)

절정(2025)

청포도(2025)

• 황혼

관련 영상

각주

  1. 음력 4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