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자득스님(慈得, 1945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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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자득(慈得)은 계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하동 구봉사를 창건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5 경기 안성 출생
1954 서울 동산국민학교 졸업
1959 보문동 미타사에서 계주(季珠)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9 미타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0 보문사 강원에서 『초발심자경문』, 『치문』, 『서장』 수료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2~1965 미타사에서 천일기도 회향
1980 견성암 안거 성만
1981 석남사, 해인사 삼선암 안거 성만
1982~1985 삼선암 3년 결사 안거 성만
1987~1989 해인사 보현암 안거 성만
1989~1991 동화사 양진암, 대원사 등 안거 성만
1991 하동 구봉사 창건, 주지 취임
1994 인법당 (30평) 신축
2004 구봉사 주지
문중 수정(水晶)문중
수행지침 견성오도(見性悟道), 이익중생(利益衆生)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연허(然虛)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오봉(悟奉, 5)→두전(斗典, 6)→윤형(允亨, 7)→계주(季珠, 8)자득(慈得, 9)

활동 및 공헌

출가

[구봉사]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30
[노량 앞바다에서 조카 상좌들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32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633

자득(慈得)스님은 1945년 3월 30일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원리에서 아버지 이창재와 어머니, 홍분학 사이의 5남매 중 3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영숙이다. 8세에 안성 죽산국민학교에 입학하여 4학년 때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오면서 서울 동산국민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지만 스님은 어려운 가정 형편상 국민학교까지만 다녀야 했다. 한창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시 집 근처 보문동 미타사 스님들의 모습을 자주 접하면서 환희심이 생겼다. 이때 스님은 차라리 출가를 하여 절에 가서 공부를 하자고 마음을 먹고 1959년 계주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보문동 미타사로 출가하였다. 출가하던 바로 그해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하고, 석암화상께 비구니계도 수지하였다.

수학과 수행

스님은 행자 때부터 남들보다 염불을 열심히 배워 시달림이나 제사 등 어느 곳이든지 그곳이 기도처라고 생각하고 싫어하는 마음 없이 열심히 하였다. 염불은 스님들에게 배우고 보문 강원에서 『초발심자경문』, 『치문』, 『서장』을 배웠다. 그러나 은사스님과 보문사 어른스님은 스님에게 경을 그만 보고 참선을 하라고 권하셨다. 자득 스님은 이렇게 어른 스님들의 권유로 참선을 하게 되었다. 이때 스님의 나이 19세였다.

수행에 전념하다

참선을 하기로 한 자득스님은 『사집』까지만 마치고 미타사에서 천일 관음 기도를 하였다. “경을 배워서 강사가 될래, 아니면 참선을 하여 스스로 깨우쳐 네 마음에서 부처님 말씀이 속에 서 나오게 하는 선사가 될래?" 자득스님은 은사스님이 하신 말씀에 참선을 하기로 마음먹고 천일 관음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처음 다락방에서 염불을 할 때 다락에 있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고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서 선객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육조단경을 보고 어찌나 신심이 나던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경보다는 참선에 마음이 더 갔다. ‘그때는 어려서 마음이 맑아서 그런 것 같다.’는 자득스님은 결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스님은 물에 빠져 죽음의 어려움에 처했던 일과 단전호흡이 잘못되어 생긴 상기병 등 기도하면서 생겼던 어려운 고비를 관세음보살님을 의지하며 무사히 넘겨 그때마다 부처님의 가피를 느낄 수 있었다. 기도 도중 여러 번의 가피를 체험하고 난 후, 스님의 세수 21세 때인 1965년 무사히 기도를 회향하고 사중 소임을 보면서 지내던 중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셨다.

자득스님은 은사스님과 같이 생활할 때 산문을 나서지 않고 오로지 미타사 안에서만 살아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75년 12월 20일 은사스님은 미타사에서 생활하고 있던 자득스님한테 '이제 밖에 나가서 생활하라.‘ 하시며 입적하셨다.

은사스님이 입적하시자 스님은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공양을 올리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등 남다른 효심을 보였다.

미타사를 나서서 다른 선원에서 안거를 나다

은사스님의 3년 상이 끝나고, 자득스님은 출가 후 20년 만에 첫 안거를 수덕사 견성암에서 났다. 수덕사 견성암에서의 첫 철을 시작으로 석남사, 동화사 양진암, 해인사 삼선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해인사 삼선암에서 철을 날 때에는 깨달음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져 삼 년 결사를 하면서 하루 일종식으로 정진하였다. 삼선암에서 결사를 하면서 한 해를 공부하던 중 위장병이 생기기도 했다.

상기병을 앓다

스님은 참선을 하면서 어느 한 스님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방선 후 각자 포행을 하거나 기도 등을 하는데 그 스님만은 유독 가만히 앉아 계속 정진을 하는 것이었다. 그 분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하였고 그 스님의 목소리가 엄숙하고 좋기도 하면서 기이하였다. "어떻게 잘 앉아 계십니까?" "단전호흡 하는 것입니다.”

자득스님은 스님에게 부탁하여 단전호흡을 익혔다. 그 스님은 단전에 네 번을 들이마시고 여덟 번을 천천히 내뱉는 식으로 하라고 알려줬다. 스님은 무조건 앉아서 그 스님이 시키는 방법대로 했다. 처음에 잘 안 되어서 포기를 하였지만 참선을 다 하고 난 뒤엔 이상하게도 꼭 단전호흡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호흡에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새 호흡이 가빠지면서 상기가 되어 소화도 잘 안 돼 일종식으로 공양을 줄였지만 음식물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스님은 끝내 영양실조까지 걸려 배가 산만해져 법룡 노스님을 찾아갔다.

노스님께 상태를 말씀드리니 화두를 들든지 호흡을 놓든지 하라.'고 일러주셨다. 스님은 기왕 죽을 바엔 화두를 드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화두를 들었다. 정진에 집중하면 상기병이 가라앉는 것 같아 열심히 정진을 하였다.

삼선암에서 3년 결사를 끝내고 다시 보현암에서 2년 정도 지내면서 정진을 더 하였다. 그 뒤 스님의 본사인 미타사에서 1년 정도를 머무르면서 단전호흡으로 인하여 생겼던 병통을 완전히 치유하였다. 첫 철에 상기병이 생겨 고통이 심하였지만 깨달음에 대한 믿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 간절한 생각을 버리지 않고 정진을 하였던 것이다.

스님이 상기병에 걸렸을 때 무안하고 재미있던 추억담이 있다. 스님의 배는 항상 가스가 가득 차 있어서 더부룩했다. 참선을 하다가 가끔 졸곤 했었는데 그럴 때면 몸의 중심이 옆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때마다 “뿡~!” 하고 조용한 입선시간에 방귀소리가 나서 잠이 깨곤 했다. 그래서 큰 방에서 같이 정진하던 스님들이 방귀를 뀌면 벌금을 내자는 규칙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하동 구봉사를 창건하다

그러던 중 자득스님은 세수 48세 때 농촌 포교에 뜻을 두고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허물어져 가는 농가를 매입하여 구봉사를 창건하였다. 이때가 1991년이었다. 스님은 1994에서 1997년까지 30여 평 정도의 인법당을 신축하는 등 여러 필지의 땅을 매입해 사찰 토지를 확장하였다.

자득스님은 후인들에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계들을 비우고 안정시켜라. 선방에 앉아 있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고 가람 수호나 포교 활동을 하면서도 언제든 병행해서 지켜 가야 하는 것이다.' 라고 강조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일상 속에서 참선 수행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몸이 아파 기운이 없고 잠까지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던 스님은 몸이 약하여 무리하면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출가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새벽 예불을 거르지 않고, 남다른 신심으로 수행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2004년 세수 60세인 자득스님은 경남 하동군 구봉사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연허(然虛)스님이 있다.


하동 구봉사

구봉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지리산 쌍계사의 말사이다.

비구니 자득(自得)이 일찍 출가하여 30여 년을 여러 선원에서 선 수행을 해 오다가, 1991년에 도반(道伴)[함께 도를 닦는 벗]의 권유를 듣고 지금의 자리에 거처를 정하였다. 기도를 하면서 정진하다가 뜻있는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서 1997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지었다.

매월 초하루에 정기 법회를 열어 가까운 곳은 물론 먼 지방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주지 자득은 마을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으며, 차를 만들어서 널리 보시하고 있다.

구봉사에는 인법당과 그 아래쪽에 요사채 한 동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9~634.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84.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99, 404.
  • 유튜브, 구봉사 소개 (2013년) https://www.youtube.com/watch?v=HgPlJGXTyAc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자득(慈得)스님 본항목 자득스님(慈得, 1945~) 慈得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자득스님(慈得,_1945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자득스님(慈得) 수정문중(水晶) ~의 일원이다
자득스님(慈得) 계주스님(季珠) ~의 수계제자이다
자득스님(慈得) 보문동 미타사 ~에서 출가하다
자득스님(慈得)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자득스님(慈得) 하동 구봉사 ~을(를) 창건하다
자득스님(慈得) 하동 구봉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자득스님(慈得) 안거 ~을(를) 성만하다 예산 수덕사 견성암, 울주 석남사, 합천 해인사 삼선암, 합천 해인사 보현암, 대구 동화사 양진암(도학동), 산청 대원사 등

지도

  • 구봉사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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