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륜스님(法倫, 1948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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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오상(悟常) 법륜(法倫)스님은 깊은 염불수행으로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 아미타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 포교에 매진하고 장수 팔성사를 중창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8 경북 청송 출생
1969 장수 팔성사에서 혜전(慧田)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9 인천 용화사에서 전강(田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7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운문사 강원 졸업
1978~1979 해인사 약수암, 대성암에서 동안거 성만
1981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사 자격증 취득
1983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87 팔성사 주지 취임
1989 천일기도와 도량 불사
1990 도량 중창 불사
1994 대만에서 전통불교와 전통계율 및 의식 수학
2000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2004 팔성사 주지
문중 백양사문중(白羊寺)
수행지침 고생고사대고해(苦生苦死大苦海) 무생무사시열반(無生無死是涅樂) 생사해탈진극락(生死解脫眞極樂) 여래여거역여주(如來如法亦如住)
생활신조 경을 보든 포교를 하는 깨달음에 목표를 두고 선(禪)을 한다.
상훈 종무감사결과 표창장 (1990, 포교사업 성적 우수)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원휴·지휴·명우·현우·태우·성우·용우
문중계보 법공(法空)혜전(慧田)법륜(法倫)→원휴, 지휴, 명우, 현우, 태우, 성우, 용우

활동 및 공헌

태몽과 출가인연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19
[녹야원 부처님 초전법륜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20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20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21

오상(悟常) 법륜(法倫)스님은 1948년 9월 5일(주민등록상에는 1952년 5월 15일로 기재되어 있다.)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현 안덕면) 성재동에서 아버지 김구갑과 어머니 박유희 사이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순옥이다.

어머니는 하늘에서 가마가 내려오더니 머리에 관을 쓴 사람이 여기에서 살고자 하니 받아 달라는 태몽을 꾸고 스님을 낳았다고 한다. 1969년 1월 22세 되던 해에 스님은 친구의 언니가 스님으로 있는 절을 찾아갔다가 발심하여 전북 장수의 팔성사에서 혜전(慧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인천 용화사에서 전강(田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출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부산 칠성암으로 갔으나 곧이어 지금의 팔성사로 자리를 옮겨 행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절 살림이 매우 어려웠던 탓에 탁발을 주로 다녔는데, 탁발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고 한다.

교육과 수행

스님은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했으나 팔성사 대웅전 불사 때문에 1973년에 사교까지 마치고 2년간 휴학하였다. 1976년 운문사 대교반으로 편입하여 1977년 10월 31일 졸업하였다. 1977년 3월 5일 통도사에서 월하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이어서 스님은 제방 선원을 다니다가 1978년 겨울 대성암에서 동안거를 성만하였다. 당시 비구니 어른 스님들은 비구니 대학을 건립하고 선방까지 찾아다니며 젊은 스님들에게 공부하여 포교를 해야 한다고 권유하시곤 하였다. 그래서 공부할 만한 젊은 스님들을 모두 찾아내서 시험을 거쳐 입학시켰는데, 스님 또한 포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 비구니 대학에 다니면서 1981년 7월 포교원의 포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런데 입학한 지 2년 뒤 비구니 대학은 중앙승가대학으로 병합되었다. 이 무렵 스님은 삼청교육단의 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팔성사 주지를 맡아 불사와 포교에 매진하다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한 스님은 곧바로 팔성사 총무를 맡았고 1987년 7월 23일에 주지로 취임하였다. 천일기도를 하면서 1989년에 시작한 도량 불사를 1990년 초에 원만히 완공하였다. 건물 4동의 불사가 순풍에 돛을 단 듯 잘 이루어진 것이다. 47세인 1994년에는 대만에서 전통 불교와 전통 계율, 전통 의식을 3개월간 배우고 돌아왔다.

현재 팔성사 경내에는 성적선원이 있는데, 겨울에는 길이 미끄럽고 위험하여 여름에만 결제를 하고 있다. 스님의 포교 활동은 광범위하고 매우 활발하다. 대한불교 경승단의 법사활동을 비롯하여 장수 지역의 전체 기관장, 노인대학, 4H클럽, 여성단체 (주부대학), 장수 지역의 초·중·고등학교, 장애인, 면단위의 부녀자 등을 대상으로 포교에 매진해 왔다. 또한 소년원, 교도소, 군부대, 논산훈련소 등에서 포교 활동을 벌이는 한편 각 호남권 불교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수상

스님은 1989년 4월 4일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주지 송월주 스님의 표창패를 비롯하여 1990년 포교사업 종무감사 결과 성적이 우수하여 표창패를 받았다. 또한 1998년 9월 23일 대한불교 경승단 총재 송월주 스님의 표창장, 1999년 1월 9일 장수 군수의 위원 위촉장과 감사장 등을 수여받았다.

법륜스님 법시(法詩)

법륜스님은 원력은 포교에 있되 수행자로서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어야 하며, 불경을 보든 포교를 하든 결국 깨달음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한다. 다음은 스님의 법시(法詩)이다.

 

            심주법(心珠法)

       할래야 할 일이 없고 갈래야 갈 곳이 없어
       그저 목석처럼 묵묵히 앉아 있으니
       이제야 비로소 할 일이 무엇이며 갈 곳이 어드멘지 알 것 같구나.

       거울을 만들기 위해 기와를 갈면 어떻고
       달을 밟기 위해 구름을 찢은들 어떠하랴
       거울이라 해도 좋고 달이라 해도 좋을
       우주에 꽉 찰만큼 커다란 한 구슬이 내게 들어 있으니

       그 구슬은
       두드려도 무쇠처럼 부서지지 않고
       눌러도 고무처럼 터지지 않고
       베어도 물처럼 베어지지 않으나
       어느 눈 밝은 선지식이 지혜의 보검으로 한 번만 내려치면
       아주 얇은 유리 껍질처럼 박살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 치면 먼지만 털어주어 더욱더 밝게
       빛이 날 것이다.
       누구든 이 구슬을 자신 있게 부수어준다면
       내 세세생생 그에게 향사루어 예 하리라.

2004년 법륜스님은 팔성사에 주석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원휴·지휴·명우·현우·태우·성우·용우스님이 있다.

법륜스님의 극락세계 체험 꿈 이야기

1969년 22세 때 초겨울 팔성사 행자시절 때 있었던 일이다. 인근 사찰에 행사가 있어 사중의 어른스님들이 모두 출타했는데 오후에 눈이 많이 내려 밖에 나가신 어른 스님들이 발이 묶이는 바람에 그날 밤을 어린 행자였던 법륜스님 홀로 남아 절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스님은 어른 스님들의 걱정과 달리 기왕에 혼자 남게 되었으니 그 동안 어른 스님들이 지루하실까봐 맘껏 하지 못했던 새벽 도량석 염불을 원 없이 하고자 마음먹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난 스님은 3시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드디어 3시가 되자 힘껏 목탁을 치면서 큰 소리로 목청껏 염불을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저 아래 마을까지 들릴 것 같은 염불 소리가 조금 뒤에는 저 멀리 읍내까지 들릴 것만 같았고, 그 다음은 저 허공계 삼천대천세계에 다 울리는 것만 같았다. 스님은 환희심과 황홀경에 젖어 ‘어차피 이 좋은 염불을 허공법계의 제불보살님을 비롯해서 유정무정 모든 생명, 무생명들까지도 인연 있는 존재들이라면 모두 다 들어라. 내 오늘 있는 신심 다 내어 염불하리라.’ 하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고 염불삼매에 빠져 『화엄경·약찬게』, 인생무상을 설명해주는 무상게, 의상대사의 법성게,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 등 그 동안 감명 깊게 배웠던 염불들을 다 마치고 나서 법당에 들어가 범종을 울리며 게송을 곁들여 나무아미타불을 목청껏 부르니 그 소리가 우주 법계에 다 울리는 것 같았다. 부처님과 각단에 예불을 올리고 『천수경』을 삼편 치고 관세음보살을 한없이 부르다 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깜짝 놀란 스님은 ‘아, 이거 너무 오래 한 것 같구나!’하고 서둘러 끝내고 가마솥에 물을 붓고 불을 지핀 후 그제야 추위를 느껴 잠시 아랫목에 누워 몸을 녹이려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 간에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앞마당에 희고 얇은 옷에 금관을 쓰시고 금으로 수놓은 붉은 신을 신으신 키가 40~50미터쯤 되는 두 분의 보살이 서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 분들을 보는 순간 스님은 이 세상에 저렇게 키가 크고 원만한 얼굴을 지닌 분이 계실까 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들은 스님을 어디로 가자고 하면서 한발 앞서 걸었고 스님도 그 두 분을 따라 나섰다. 어느 재를 넘다 보니 일차선 정도 넓은 길에는 흰 모래에 가까운 흙이 깔려 있는데, 가랑잎 하나 잡초 한 포기 없이 아주 깨끗한 길이었다. 양쪽으로 산의 나무들이 있는데 큰 나무마다 큰 족자 같은 것을 걸어두었는데 모두 좋은 글귀였다.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풀 포기 하나하나까지 작은 족자 같은 것이 걸려 있는데 저마다 한결 같이 좋은 글귀들이었다. 스님은 혼자 ‘이 넓은 산천에 이 많은 나무와 풀포기들까지 누가 어떻게 다 족자를 붙였을까?’생각하는데 그 분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역시 마음으로 말을 전하기를 ‘호사다마라. 좋은 길을 가는데 마가 생기니 이 태장계들을 걸어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아주 맑고 깊은 강이 있었는데, ‘배도 없고 다리도 없으니 이 물을 어떻게 건널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두 분 중 한 분의 보살이 오른팔을 들어 누군 가를 향해 손짓을 하셨다. 손짓하는 방향을 바라보니 크기가 타조만한 큰 새들이 물위로 날아왔고 그 보살님은 ‘여기에 삼삼오오 다리를 놓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새들은 징검다리가 될 만한 위치로 물에 떠서 긴 목으로 자신의 몸을 한 바퀴 빙빙 돌려 다시 목에다 척 걸치는데 이렇게 하면 한 개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새들은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구분이 될 수 있을 만큼 각자 조금씩 떨어져서 다리를 놓아 나가는 것이었다. 새들의 등을 밟고 한 분은 앞에 가시고 다른 한 분은 스님의 뒤에 오시는 것이었다. 스님은 새의 등을 밟고 건너면서 혼자 생각하기를 ‘이 새들을 부를 줄 모르면 이 물을 건널 수 없고, 이 새들은 아무나 부른다고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라고 느꼈다. 강을 다 건너니 새들은 각자 제 갈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물을 건너 언덕에 다다르니 크고 투명한 유리 집이 하나 있는데, 얼마나 큰 집인지 지붕은 구름 속에 들어 있고, 아랫부분은 물속에 잠겨있었다. 커다란 문이 열리어 들어가니 오른쪽으로 높은 탁자 위에 아미타 부처님이라 하시면서 부처님이 한 분 앉아 계셨다. 아미타 부처님은 희고 긴 수염이 가슴을 넘어 배 아래까지 드리워져 있는데 얼굴은 아기처럼 깨끗한 홍안이었다. 속으로 ‘홍안백발을 말로만 들어왔는데 바로 저런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삼배를 올리고 아미타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너는 여기 두 번째 왔지!”하시며 “저쪽으로 가서 구경해라.”라고 하시는데 이 또한 입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시는 말씀인데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두 분의 보살님과 돌아서니 집도 건물도 하나 없는 한없이 넓은 푸른 들판이 있을 뿐인데, 거기에는 아주 큰 나무들이 띄엄띄엄 서있고, 크고 작은 연못과 동산들이 있고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름답고 큰 꽃들이 많이 있었으며 커다란 새들도 한가롭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마치 이승의 가정에서 사랑 받는 개들처럼 한가롭게 보였다.

그 곳의 사람들은 모두가 두 분 보살님처럼 키가 컸고 스님 또한 그곳에서는 그렇게 키가 커져 있었다. 사람들이 입은 옷은 모두 연한빛깔이었는데 흰색, 연분홍, 연노랑, 연하늘색 등 … 또 그곳 사람들은 모두 한가롭고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가만히 앉아 선정에 들어있는 사람, 혼자 사색에 잠겨 거니는 사람, 두서너 명씩 함께 산책을 즐기거나 차를 마시는 사람, 누군가 설법을 하면 또 부담없이 듣기도 하며 어느 한 사람도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되거나 신경을 쓸 일이 없이 풍요롭고 고요하고 한가로울 뿐이었다. 이에 스님도 그들처럼 여기저기 구경하며 노닐다 문득 ‘아, 좋구나! 춥지도 덥지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아니하고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없는 이 세상에 이미 내가 와 있는데 저 일도 많고 탈도 많고 고통도 많은 물 건너 세상에 뭣 하러 또 돌아갈 것인가! 이제 여기에서 살며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아야지!’ 이런 마음을 먹다가 문득 어른 스님들이 절에 돌아와서 나의 죽은 몸을 보시면 혼자 절을 지키다 무서워 기절해서 죽었다고 마음 아파 하실 것 같아 조금은 죄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두 분 보살이 나타나시어 ‘이제 갈 때가 되었다!’ 하시며 스님을 아미타 부처님께 데려가는 것이었다.

아미타 부처님이 시동에게 눈짓을 하니 옆에 있던 시동이 곡식이 반 가마니 정도 담겨있는 묵직한 자루를 한 개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께서는 물 건너 세상을 가리키시면서 저기에다 이 씨앗을 다 뿌리고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리키는 건너편을 바라보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없는 사막이었다. 순간 스님은 누구에게 대신 뿌리고 오라고 부탁을 하고 본인은 가고 싶지 않았으나 마땅히 부탁을 할 데가 없는 데다 어른의 당부이니 내가 한 번은 더 나갔다는 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 마음을 미리 아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잘 뿌리고 오라고 하셨다.

부처님께 절을 하고 일어서니 보살님 한 분이 자루를 들고 따라 나오셨고 우리 일행은 올 때 건넜던 강가에 서게 되었다. 들어올 때처럼 보살님이 손짓을 하시니 예의 그 새들이 날아와 다리를 놓아주어 새의 등을 밟고 물을 건너오니 길가의 그 나무로부터 풀포기까지 그 족자들이 그대로 다 달려있었다. 재를 다 넘고 절에 도착하여 처음 두 보살을 만났던 때와 같이 그 분들은 마당에 서 계시고 스님은 마루에 올라서자 키가 도로 사람의 키만큼 작아졌고 그 분들은 크신 그대로 팔을 길게 뻗어 곡식이 든 자루를 큰 방 뒷구석에 자연스럽게 내려놓으시고는 잘 뿌리라는 듯 한번 빙긋이 웃으시고 돌아서다니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동쪽 하늘을 향해 움직임이 없이 미끄러지듯이 날아가셨다. 스님은 뒤에서 합장을 하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면서 ‘저분들은 본래 저렇게 날아다니시는데 인간인 나를 데리고 다니기 위해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고 걸어서 가셨다가 걸어서 여기 제자리까지 데려다 놓고 가시다니 참으로 거룩하고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와서 그 자루를 열어보니 아주 굵고 깨끗하여 벌레 하나 먹지 않은 붉은 팥이 가득히 들어있었다. ‘아! 참으로 좋은 씨앗이로구나. 어디에 뿌려도 한 알도 허실이 없이 싹이 잘 나오겠구나.’하며 긴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잠을 잔 시간이 1시간도 채 못 되었다.

그 후 스님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삼청교육대를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교도소, 군부대, 경찰, 일반 중고등학교, 대학교, 불교교양대학, 재가여성단체, 노인대학 등에 이르기까지 인연이 주어지는 대로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니며 부처님 말씀을 전하며 불교의 씨앗을 뿌리는 데에 최선을 다해왔는데 최근에 왜 그런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지고 강단에 설 마음이 사라지는 듯하더니 문득 꿈에 본 팥알의 숫자가 다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그 일이 있은 후로 기도를 하게 되면 처음에는 부처님을 향하여 기도를 시작하지만 한참을 하다 보면 부처님도, 절도, 지구마저도 다 없어지고 텅 빈 허공에서 그 때의 그 분들과 같이 있음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고 하신다.

장수 팔성사

[팔성사 대웅전]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bgu54.tistory.com/8347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백제 무왕 때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해감(解橄)이 창건하였으며, 해감과 그의 설법을 듣고 귀의한 7명의 제자를 기리기 위하여 팔공산이라는 산명을 붙이고 팔성사라 하였다.

이 때 팔성사를 중심으로 7명의 제자들이 각각 1개씩 암자를 세워 7개의 부속암자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원래의 팔성사는 폐허가 되고, 부속암자 중 하나가 현재의 팔성사가 되었으며, 7개 암자 중에서는 성불암(成佛庵)만이 현존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팔성사의 옛터에는 전성기의 웅장한 사찰 건물 초석이 남아 있고, 각 건물의 계단도 현존하여 10여 개의 큰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찰 뒤쪽의 암석대(巖石臺) 상부에는 백제형식의 조각수법으로 축조된 사리탑(舍利塔)이 서 있었으나, 1973년 도굴꾼들이 사리탑을 넘어뜨리고 사리함에 들어 있던 사리와 보물 등을 가져갔다. 현재 이 탑은 상부 4층이 모두 암대 밑에 떨어져 있고, 탑신의 일부도 파괴되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륜(法倫)스님 본항목 법륜스님(法倫, 1948~) 法倫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륜스님(法倫,_194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법륜스님(法倫) 백양사문중(白羊寺) ~의 일원이다
법륜스님(法倫) 혜전스님(慧田) ~의 수계제자이다
법륜스님(法倫) 장수 팔성사 ~에서 출가하다
법륜스님(法倫) 전강스님(田岡)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법륜스님(法倫)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법륜스님(法倫) 장수 팔성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법륜스님(法倫) 안거 ~을(를) 성만하다 합천 해인사 약수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지도

  • 팔성사 :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용계리 1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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