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능인스님(能忍, 1944生, 비구니)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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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능인(能忍)스님은 범어사 대성암에서 혜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내원사 노전암을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4 경남 함양에서 출생
1957 범어사 대성암에서 혜전(惠典)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9 통도사에서 경봉(鏡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8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1969 선원에서 안거 성만, 내원사 노전암 주석
1971~1974 노전암 증축 불사
1988 미소실 신축
1989~2000 일주문, 수로이전 공사, 석등, 공양간 해뜨는 집 완공
2020 노전암 주석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행지침 1. 새벽예불 철저히 할 것 2. 신심이 있어야 한다. 3. 백장청규 실천 4. 보시(布施)정신
생활신조 신심을 가득히 품고 생활할 것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성(慧成)・대원(大願)・성률(成律)・성봉(成奉)・성호(成護)・성법(成法)・성보(成普)・성가(成可)・성귀(成貴)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해훈(海訓, 6)→전오(典悟, 7)→행관(行觀, 8)→혜전(惠典, 9)→능인(能忍, 10)→혜성(慧成, 11), 대원(大圓, 11), 성화(性和, 11), 영화(榮花, 11), 성봉(聲奉, 11), 성호(聲護, 11), 성법(聲法, 11), 성보(聲寶, 11), 성귀(聲貴, 11), 성가(聲家, 11), 성민(聲民, 11)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491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492

능인(能忍)스님은 1944년 3월 18일(실제 생년월일은 1940년 2월 25일이다) 경남 함양군 아니면 당분리에서 아버지 박문서와 어머니 조일순의 6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봉순이다.

스님은 5세 되던 해에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오빠들 사이에서 성장하여 서울 덕성 여자중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마저 어린 스님을 두고 갑작스럽게 별세를 하여 한 학기만을 다니고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스님은, 어린 마음에 어디를 가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매일 같이 울며 지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스님으로부터 머리 깎고 승려가 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스님은, 그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출가를 결심하기에 이른다.

어린 시절에 겪은 부모님과의 갑작스런 이별의 고통은, 스님이 훗날 부처님 법을 만나 수행자로서의 삶으로 나아가게한 소중한 인연이 되어주었다. 스님은 1957년 5월 20일 18세에 범어사 대성암의 혜전스님을 은사로 삼현 문중에 출가하였다.

출가 후 발심

출가 후 행자 생활을 하던 시절, 스님의 머릿속에는 오직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스님이 되는 것도, 불법을 공부하는 것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공양주를 살고 있던 다른 행자님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진실한 발심을 하게 되었다. 그 행자님은 대중스님들을 위해 밥을 짓기 위해 쌀을 고르는데, 거칠거나 썩은 낟알을 가려내어 안 좋은 쌀을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두었다. 무엇을 하려고 그러나 하고 유심히 살펴보니, 좋은 쌀로는 대중을 위한 밥을 짓고 거칠고 썩은 쌀은 자신이 밥을 지어 먹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너무나도 충격을 받은 스님은 수행자의 본분을 몸소 보여주던 행자님의 거룩한 모습에서 신심을 내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매사 구도의 열정을 가지고 수행자의 본분을 항시 염두에 두며 수행 정진에 임하였다.

1959년 음력 10월 14일에 통도사에서 경봉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20년의 긴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하여 은사스님을 시봉하였다. 당시는 가난한 시절이라 주로 탁발을 하여 생활하였다. 탁발한 식량은 시주물로 귀히 여기며 한 톨도 헛되이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은사 스님으로부터 항상 배워왔다.

은사스님은 사람 수에 맞추어 일정한 양을 정해 놓고는 그 이상은 허락지 않으셨는데, 밥을 지으려 다락에 쌀을 가지러 가면 누룽지가 아닌 제대로 된 쌀밥을 먹고 싶은 욕심이 났다. 그래서 쌀의 양을 조금 더 불려 떠올라치면 어김없이 은사스님의 검사가 이어졌다. 은사스님은 “바가지 내려보아라.”하시고 정확한 양만을 주고는 덜어내셨다. 은사 스님의 그 살뜰한 면목은 그대로 스님의 삶에 배어들었다.

밥을 지을 때 잠시 한눈을 팔거나 불 조절이 잘못되어도 밥이 솥에 눌어붙어서 스님 몫이 모자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밥을 지을 때는 항상 신묘장구대다라니 염송을 놓지 않고 염원을 하며 밥을 지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양주, 채공의 마음은 한결 같아서 대중스님들을 위한 공심으로 다라니를 외우게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은사스님(혜전(慧典)스님)을 시봉

스님은 강원 정진은 하지 못하였다. 1960년 김천 직지사의 서전에서, 비구니 통학 강원이 생겨 방부를 들여놓은 찰나 은사스님의 건강이 악화되어 강원에 가겠다는 마음을 접고 은사스님을 시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원을 포기하고 갈등이 일었던 스님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을 비추었다. 성수스님이 직접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에, 아쉬운 대로 마음을 달래었고, 자민스님 또한 『치문』을 직접 가르쳐주셨다.

1960년부터 68년까지 노전암에서 은사스님을 시봉하며 지낸 스님은 이후에는 참선 기도 수행에 일념을 가지고 정진하였다. 1968년 제방 선원에서 동안거를 성만하였고, 이듬해에도 동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리고 그해 음력 3월 15일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그러나 은사스님의 건강이 다시 안 좋아지셔 시봉을 위하여 참선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노전암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72년 은사스님이 입적하신 뒤 강원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던 터라 능인스님은 강원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성수스님은 “그간 네가 해온 것이 불법이고 고귀한 데 강원 공부가 무엇에 그리 중하냐. 그저 노전암에서 계속 지금대로만 살아라.”하고 말씀하셔서 강원에 가는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그 후 1년 정도 전국 각지를 돌며 만행을 하는 중에 일순 깨우침을 얻고 불현듯 노전암으로 돌아가 불사를 해야겠다는 원력을 세우게 되었다.

노전암을 중창하다

그동안 능인스님이 노전암을 불사한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4년 1월 무진장을 헐고 31평의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음력 9월 30일에 완공하였다. 1988년 ‘미소실’ 25평을 완성하였으며, 그로부터 3년 뒤인 1991년 수로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음력 10월 30일에 완공하였다.

1992년 음력 1월 14일에는 일주문을 시작하여 음력 3월 30일에 완공하였다. 1994년 음력 3월 20일에는 탑을 완공했으며, 대웅전 앞의 석등은 1995년 음력 4월 30일에 완공하였다. 1996년에는 식당인 ‘해뜨는 집’을 음력 7월 10일에 완공하였다. 이후 1999년 음력 10월 30일 산신각을 불사를 시작하여 음력 12월 28일에 완공하였다.

처음 시작할 때 70평에 불과했던 협소한 절터와 대웅전 한 채가 전부였던 것이 현재 15,000평의 장엄한 불 국토의 도량으로 중창된 것은 혼신을 불사른 스님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님의 순수하고도 영롱한 정서는 ‘미소실’과 ‘해뜨는 집’이라는 건물의 이름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일기를 매일 쓰다

또한 스님은 도서를 소장하는 취미가 있는데,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순리이므로 가지고 있는 도서를 도서관 등지에 기증할 계획이다.

능인스님은 출가 이후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 날의 일들을 소상히 기록해 놓았는데 25세 때부터 1999년까지 기록한 엄청난 양의 일기를 가끔씩 들춰보시며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힘겹던 지난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용기를 주고 참회와 반성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사바세계에 왜 이렇게 생명을 받아 왔던가?
         생명을 받아 왔으니, 나 자신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
         나의 물이 맑아야 내 주위에 물이 맑아진다.

일기 속의 한 구절인 이 글은 스님이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스스로 경책하며 정진에 임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에서 생활과 수행을 따로 놓고 보지 않았던 스님의 수행자로서의 면목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능인스님은 ‘능할 能, 참을 忍’의 법명처럼 언젠가 경봉 큰스님께서 “너는 훌륭한 스님이 될 것이니, 꾹 참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이르신 말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여 명심하고 있다.

또한 스님은 1,300여 평의 땅에 차밭을 만들고 손수 차를 가꾸어 스님이나 재가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보시 행을 실천하고 잇다.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농사일을 하며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백장청규을 실천 수행하시면서 살고 있다.

출가자는 새벽 예불을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 출가한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벽 예불은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참여하였다.

능인스님은 2020년 노전암에서 수행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혜성(慧成)・대원(大願)・성률(成律)・성봉(成奉)・성호(成護)・성법(成法)・성보(成普)・성가(成可)・성귀(成貴)스님 등이 있다.

내원사 노전암

[노전암 새 대웅전 2021년]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sukpar/222579730776

노전암은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천성산 계곡에 세운 내원사의 암자 중 하나다.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순조(재위 1800∼1834) 때 태희선사가 보수했다고 전한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능인(能忍)스님 본항목 능인스님(能忍, 1944~) 能忍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능인스님(能忍,_194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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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능인스님(能忍)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능인스님(能忍) 혜전스님(惠典) ~의 수계제자이다
능인스님(能忍) 범어사 대성암 ~에서 출가하다
능인스님(能忍) 경봉스님(鏡峰)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능인스님(能忍)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능인스님(能忍) 내원사 노전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능인스님(能忍) 내원사 노전암 ~을(를) 중창하다
능인스님(能忍) 안거 ~을(를) 성만하다 제방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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