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스님(明珠, 1904生, 비구니)
명주(明珠)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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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명주(明珠) |
법호 | 한산(寒山) |
속명 | 정명소(鄭明昭) |
출생 | 1904년 |
출가 | 1909년 |
입적 | 1986. 1. 17 |
사찰 | 정혜사(전북 전주시 효자동1가 2)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명주(明珠)스님은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보문종을 정착 발전시킴으로 비구니 위상을 지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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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 전주 출생 |
1909 | 해인사 약수암에서 도덕(道德)스님을 은사로 출가 |
해인사에서 우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
1925 | 해인사 강원에서 응해선사(應海講師)로부터 대교과 졸업 |
1927 | 내장사에서 학명(鶴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41 | 정혜사 주지 취임 |
1945 | 정혜사 불교전문강원 설립 |
1966 | 전주 노송동 중앙불교 포교당 설립 |
군산 흥천사, 부안 영월암, 청일암, 정읍 대원사 창건 | |
1972 |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 원로원장 |
1980~1986 | 대한불교 보문종 2대 종정 역임 |
1986. 1. 17. | 정혜사에서 (세수 83세, 법랍 78세) 입적 |
문중 | 계민(戒珉)문중 |
수행지침 |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 위도일체심(爲度一切心) 기무일체심(己無一切心) 하유일체법(何有一切法) |
생활신조 | 인욕행(忍辱行) |
수계제자 | 혜명(慧明)・혜일(慧日)・혜월(慧月)・혜진(慧眞)・혜석・선행 |
활동 및 공헌
출가
한산(寒山) 명주(明珠)스님은 1904년 음력 9월 25일 아버지 동래 정씨 정원명(鄭圓明)거사와 어머니 전주 최씨 최정명(崔淨名)보살 사이의 5남매 중 위로 오라버니 두 분을 두고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정명소이다. 스님의 부모님은 모두 도인으로 알려져 정도통, 최도통으로 불렸다.
아버지 정원명거사는 만공 큰스님과 법담을 나눌 정도로 불교에 해박하셨고, 정혜사 터를 정원명거사가 닦았다는 ‘정혜사 사적기’를 경허 스님이 친히 쓰신 걸로 보아 경허 큰스님과도 친분이 두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버지 정원명거사가 돌아가신 후 정혜사 법당에서 49재를 지내는 동안 춘담스님이 법문을 시작할 때, 법당인 보광전 동편에서 서쪽으로 세 줄기의 서기가 여러 시간에 걸쳐 빛을 발하는 방광을 하였고, 이 광경을 목격한 수 많은 스님들와 신도들이 거사님의 수행력에 탄복을 하였다.
명주스님의 형제자매 가운데 4남매가 출가를 하였는데, 특히 출가한 세 자매 중 스님의 속가 언니인 월광 정금룡(月光 鄭金龍)스님은 금광스님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근대 이후 최초의 비구니 법사로서 한국 비구니계의 3대 강백이요, 3대 법사 (금룡, 혜옥스님, 수옥스님)스님 중 한 분으로 부산 소림사 강백으로 주석하셨다. 그리고 동생 영명스님은 서울 보문사의 초대 강주로 있었다. 이 두 분 모두 입적한 뒤 정혜사에 부도를 모셨다.
완산 정혜사의 실질적인 창건주
한편, 둘째이신 명주스님은 완산 정혜사의 실질적인 창건주로서, 그리고 세계 최초의 유일한 비구니교단인 ‘대한불교보문종’ 창종(創宗)의 주역으로 제2대 종정(宗正)을 지내는 등 한국 비구니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스님은 일찍이 6세의 어린 나이로 해인사 약수암에서 도덕(道德)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다. 7세에 해인사에서 김우운(金友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하셨고, 이때부터 해인사 강당에서 응해(應海)스님으로부터 10년간 내전(內典-사미니과, 사집과, 대교과)을 공부하였으며, 그 사이 11세에 해인사에서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해인사에서 19세까지 경수학(經修學)을 마치고, 19세 되시던 해에 전주에 와서 전주시의 서쪽으로 우뚝 솟은 명산 완산칠봉,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머니 품 같은 완산 밑 서남쪽 양지바른 곳에 있는 정혜사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정혜사는 완산자락 안행동(鴈行洞)에 자리한 한 칸 법당과 초가삼간의 요사채가 전부였다. 스님은 이곳에 비구니 수행도량 건립과 불교선포(佛敎宣布)와 중생교화(衆生敎化)의 원력(願力)을 세워 20세부터 신도회를 조직하고, 매월 정기법회를 시작하여 부처님의 어려운 경전을 우리말로 쉽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매달 음력 초하루, 보름과 양력 1일, 13일 등 한 달에 4번씩 정기 법회를 열었다. 경을 하는 청아한 법음과 수려하고 존엄한 얼굴에서 마치 천상의 보살이 하강한 듯하여, 수많은 신도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그 후 35세에 5칸 법당을 중건하고 이어서 나한전(羅漢殿), 용화전(龍華殿), 명부전(冥府殿), 사천왕문(四天王門), 요사채, 범종각, 완산선원(完山禪院) 등을 건립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완산선원을 건립하여 10여년 이상 매곡대선사(梅谷大禪師)를 주실(籌室)로 모시고 하기와 동기 두 차례에 걸쳐 사대부중(四部大衆)이 참선수도(參禪修道)해서 자성(自性)을 찾게 하였다.
정혜사 강원
한편, 51세 때인 1954년 한국 비구니 교단으로는 동학사에 이어 두 번째로 정혜사 강원을 열어 강백으로 김보광(金藵光)스님, 포광스님, 그리고 김대은(金大隱)스님을 모시고 20여 년간 도제양성에 힘을 다하였으며, 지현스님과 지철스님을 강사로 배출하였다.
특히 포교사업으로 전라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전주 노송동에 ‘불교중앙포교당’을 건립하여 일요법회를 보게 하고 나아가 군산, 정읍, 부안, 고산, 금구 등지에 포교당을 세우고 매달 정기 법회를 열어 불교포교와 중생제도에 전력을 기울였다.
정혜사 내에 보문유치원 설립
명주스님은 길을 가다 가도 주변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나무불·나무법·나무승’을 가르쳐주며 합장하고 부르게 해서 어린이의 마음에도 불(佛)의 종자를 심어 주었다. 이렇듯 어린이 포교에도 박차를 가해 매주 녹야원 어린이 법회와 중·고등학생으로 구성된 보리수 법회를 열고, 전라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정혜사 내에 보문유치원을 설립하였다.
보살행과 인욕행
또 상가(喪家)에 가면 모든 절차를 스님이 다 알아서 하고 염까지도 다 해주어 상주들과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신도 보살들은 ‘스님 앞에서 죽어 스님이 천도해 주시면 극락세계에 갈 것.’이라 확신하고 스님 앞에서 임종하기를 발원하는 분이 많았다.
한번은 군산시 모 약방 주인 김원배라는 젊은이가 스님을 찾았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모친이 경찰서에 잡혀간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를 뵈러 갔더니 경찰이 하는 말이 명주스님의 증명 없이는 만나 볼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여 어머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이곳 정혜사까지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간곡한 청으로 스님은 어머니를 위하여 49재를 정성껏 지내 드렸다.
명주스님은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여든 세살로 입적하기까지 칠십여 년을 인욕행(忍辱行)으로 모든 경계를 슬기롭게 잘 넘기고, 항시 화엄경을 지성으로 독송하였다. 또한 그 몸가짐이 빙설과 같이 청정하였으며 한결같이 수행 정진하여 정혜사의 청정한 선풍을 진작시켰다. 스님은 길에서나 법당에서나 때로는 속가에서조차 임하는 모든 곳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행하시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한편 어려운 일을 당해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 해결책을 가르쳐 평안하게 해주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덜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항상 원만한 성품으로 모든 사람과 어울리며 보살도의 실천으로 법을 설하여 나이 드신 할머님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선지식이 되고 친구가 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안락하게 하는데 헌신하였다.
입적
명주스님은 1986년 세수 83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였다. 스님이 입적한 후 다비식을 치렀는데 두상(頭狀)이 본래의 원형 그대로,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사리로 수습되었다. 스님의 사리는 상좌인 혜일스님에 의해 정혜사 부도전에 봉안되었다.
스님은 ‘명주(明珠)’의 찬란한 광명을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에게 골고루 비추어, 무명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탐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삼독에 빠져 헤매고 있는 중생을 대광명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신 선지식이었다.
수계 제자로 혜명(慧明)·혜일(慧日)·혜월(慧月)·혜진(慧眞)·혜석·선행스님 등이 있다.
전주 정혜사
전주의 정혜사는 보문종 계열의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불교대학이다. 즉, 계룡산에 동학사가 있듯이 이에 버금가는 곳으로서, 전주에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대학이자, 기도하는 사찰이 정혜사인 것이다. 때문에 전주 시내 한복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혜사는 산사의 절집 느낌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만큼 사찰의 분위기가 조용하고 고즈넉한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따로 위치한 산사와 달리 불법수행에 열심인 비구니스님들의 청정한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흔치 않은 곳이다.
이러한 정혜사에 가면 비구니사찰의 이미지처럼 연꽃을 비롯한 각종 꽃이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고 아울러 10여 동 이상의 전각이 배치되어 꽤 큰 규모를 지니고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정혜사는 1899년 창건되어 110년 된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혜사는 원래 이곳의 본사 원장스님인 명주스님의 외조부께서 칠성각을 짓고 득남발원을 위하여 시작된 사찰이기 때문이다. 그후 정명주 노스님께서 주지를 역임하면서 정혜사 불사를 하였고 백혜명스님과 정례일스님이 거듭 중창불사를 하여 현재 13동의 전각을 갖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역사 : 정혜사는 1899년에 최향관선생이 득남발원을 위하여 완산 아래 이곳에 조그만 칠성각을 건축하게 한 후 불상을 모시고 그 옆에 십여간 되는 초가집을 사서 사찰을 만들고 절이름을 정혜사라고 하고 기도불사를 진행하였다. 그때의 본사 소재지는 동명이 안행동(雁行洞)이기 때문에 본사의 이름을 ‘안행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발음이 와전되어 ‘안양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정혜사라고 이름 지은 정(定)은 선리(禪理)를 연구하고 혜(慧)는 교리를 널리 알려 정혜쌍수를 실천하자는 취지라고 하겠다.
1921년 정명주 스님이 불교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보광전 15칸, 용화전 1칸을 건축하였으며 명부전, 나한전, 완산선원, 사대천왕문과 아울러 요사채를 건축하여 수행과 포교에 전력을 다했으며, 강원을 설치하여 도제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후 백혜명스님과 현 주지인 정혜일스님이 중건, 중창불사를 거듭하여 지금의 정혜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21~125.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23.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39.
- 불교신문, 세계 유일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 탑골승방 보문사 (2015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44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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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明珠)스님 | 본항목 | 명주스님(明珠, 1904~1986) | 明珠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명주스님(明珠,_1904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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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정혜사 (전북 전주시 효자동1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