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륜스님(性輪, 1918生, 비구니)
성륜(性輪)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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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성륜(性輪) |
법호 | |
속명 | 권무현(權茂鉉) |
출생 | 1918년 |
출가 | 1958년 |
입적 | 1998.1.18. |
사찰 | 견성암(경남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산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성륜(性輪)스님은 정각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수행과 자비실천에 전념하고 물욕을 버린 참 수행자였던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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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 경남 산청 출생 |
19 | 해인사 국일암에서 정각(正覺)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에서 도원(道圓)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59~1963 | 해인사 국일암, 양산 내원사, 사천 미륵암에서 안거 |
1961 |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64~1973 | 지리산 대원사, 실상사 약수암, 김해 성덕암에서 안거 |
1974~1981 | 해인사 국일암, 사천 미륵암에서 안거 |
1982~1997 | 산청군 단성면 견성암에서 정진 |
1998. 1.18 | 견성암에서 입적(세수 81세, 법랍 41세) * 사리 수십 과가 나왔으나, 문중 스님들의 뜻에 따라 49재 후 지리산 도솔암 길목 벽암 주위에 뿌렸음. |
문중 | 청해(靑海)문중 |
수행지침 | 견성성불(見性成佛), 역지사지(易地思之) |
수계제자 | 법우(法雨) |
활동 및 공헌
출가
성륜(性輪)스님은 1918년 7월 12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 1013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며, 이름은 권무현이다. 스님이 불가에 첫발을 디딘 곳은 경남 진양군 미천면에 소재한 집현산의 월명암이었다. 당시 월명암은 현재 해인사 국일암 주지스님인 성원스님이 계시던 곳이었다. 1958년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날 오후였다. 월명암을 그리며 부처님 곁으로 달려가는 게 그리도 급했던지 스님은 외아들에게 이별의 말도 없이 한시바삐 속세를 벗어나고 있었다. 예순여덟의 친정 모친이 하나뿐인 딸을 비구니 승려로 만들기 위하여 월명암으로 데려다주는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버스가 귀한 시절이라 점심을 일찍 먹고 친정을 나선 모녀는 이웃 신안면을 지나 생비량면으로 접어들 면서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였다. 집을 출발한 지 서 너 시간이 지나자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한 디미(지금의 현동)에 이르자 어느덧 서산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 눈발이 심하고 재가 높고 길이 험하여 월명암까지는 어둡기 전에 도착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한디미 동네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설마 죽기야 하겠나.' 라는 생각으로 눈 덮인 집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화적들이 들끓었다던 험준한 한디미 재를 넘어 산의 반대편 중턱에 자리 잡은 월명암을 향해 사력을 다해 바삐 걸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날이 어둑어둑해 오는데, 워낙 눈이 많이 내려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불안이 엄습해왔다. 내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월명암 쪽으로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함박눈과 함께 세찬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이제 속절없이 우리 모녀는 여기서 죽는구나! 그토록 되고 싶은 스님도 되지 못하고 이렇게 얼어 죽는구나!' 마지막으로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모녀는 그 자리에서 정성을 다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관세음보살 명호를 간절히 염했다. 그때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월명암 쪽으로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이 선명히 나타나 있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이 밤중에 불과 몇 분 전까지도 인적없이 하얗기만 하던 산에 어떻게 사람의 발자국이 생겨났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모녀는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확인하고 죽을 힘을 다해 발자국을 따라 부지런히 소나무 사이를 기어올라갔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 스님은 ‘그때는 아무 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으며 오직 부처님을 그리는 일념뿐이었다.’ 고 회상하였다. 멀리 달빛 속에 월명암이 보이자 눈 위에 선명하게 나 있던 발자국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온몸이 물에 빠진 듯 땀과 눈과 흙으로 뒤범벅이 된 모녀가 월명암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고, 주무시다가 달려 나온 스님들은 까무러치듯 놀라며 험준한 재를 넘어 이 눈 속을 어떻게 왔느냐며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그 길로 스님은 정각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같은 해 도원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1961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수행
1959년부터 1963년에 이르는 동안 해인사 국일암, 양산 내원사, 사천 미륵암에서 안거를 성만 하였고,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지리산 대원사, 실상사 약수암, 김해 성덕암에서 안거를 성만하 였으며, 1974년부터 1981년까지 해인사 국일암, 사천 미륵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스님이 미륵암에서 참선수행 할 때의 일이다. 미륵암은 경남 사천군 서포면 무고리 만점 부락 뒤 방장산에 있는 수백 년도 넘는 조그마한 고찰이었다.
당시 이 암자는 비구니스님 4~5명이 부처님 은덕으로 겨우 연명을 하면서 정진하는 참선 도량이었다. 도반인 도안스님이 주지로 있었기에 성륜스님이 종종 찾으셨던 곳이다. 두 분은 연세도 비슷하고 도안스님 역시 꾸밈이 없어 부담이 적고 친근감이 갔다. 좌선 후에 체조라도 하기 위해 밤중에 마당에 나서면 이산 저산으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호랑이의 번뜩이는 눈빛이 선명하였다.
어느 날 법당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틈의 산신각에서 밤을 새워 좌선을 하고 있는데 무엇인가 산신각 문을 허리띠로 후려치듯 하면서 마치 자동차 불빛같은 두 개의 불덩이가 축대에서 산신각을 향해 비추고 있었다. '설마 날 잡아 가기야 하랴. 부처님이 계시는 도량인데..........' 하며 마음을 안정시키기는 하였지만, 불과 1~2m 남짓한 곳에서 불빛과 꼬리로 소리를 내며 마치 저승사자처럼 버티고 서있으니 머리끝이 쭈뼛거리며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스님은 오직 부처님께 매달리며 좌선에 열중하다 한참을 지나서 문을 열어보니, 비호같다는 옛말처럼 절 장독대 위를 덜거덕거리며 숲 속으로 나는 듯이 사라지는 호랑이의 두 눈에서는 불똥이 뚝뚝 떨어졌다고 한다.
견성암에 주석하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스님은 견성암에 상주하면서 안거 정진을 계속하였다. 견성암 뒷동네는 교동이라 하여 향교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견성암과 4km 거리에 인접한 계곡에는 금계사라는 절이 있다. 옛날에는 현재의 해인사 규모에 버금가는 큰 절이 있었으나 병자호란 때 모두 소실되고 보물 제72호와 제73호로 지정된 동서 3층 석탑과 흩어진 주춧돌만이 고려시대 번성했던 불교문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논농사를 하므로 소득이 낮고 불심이 적어 시주다운 시주는 물론이고 초파일, 칠석 등 행사 때 절간에 와서 허드렛일을 돕는 것조차 천박스럽게 여기고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초파일이 되면 성륜스님의 소박한 인품과 독실한 불심을 알고 있는 할머니들이 견성암을 찾아와 손자손녀들의 대학합격을 기원하거나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연등을 달았다.
스님은 쌀 1되를 가져와도 연등을 달아드리고, 때로는 돈이 없는 신도의 등불을 밝혀주기도 하였다. 어느 해 초파일이었다. 한 할머니가 등 값으로 2만원을 냈다. 스님은 깜짝 놀라며 '1만원 넘게는 받지 않는다.‘ 며 나머지 만원을 돌려드렸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정성을 보실 뿐 돈의 액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씀도 하였다.
어느 날 성륜스님은 부산 서부 교육청에 있는 마을 상좌에게 전화를 하여 '내가 평생 남에게 도움만 받다가 이제 떠날 때가 다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남을 도와야겠다. 그동안 물고기 방생은 많이 했으나 인간 방생이 더 소중하니 인간 방생처를 찾아 알려 달라.'고 하였다.
때마침 서부교육청 관할 내에 정신지체아, 장애아 등을 수용하고 특수교육으로 재활교육을 하는 '천마 재활원'이라는 곳이 있어 스님이 130만원과 함께 백미 50되를 보시하였다. 성륜스님은 재활원 원장님 간청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는 무척 기뻐하였다.
절에는 인등이라 하여 신도들이 복을 받기 위해 24시간 법당 안에 호롱불을 켜는데, 견성암에도 몇 개 안되는 인등이 있었다.
물욕을 버린 참다운 수도자의 진면목
스님은 신도들이 가져오는 불전 한 푼, 쌀 한 톨도 모두가 내생에 갚아야 할 빚이 된다며 참으로 무섭게 여겼다.
성륜스님은 항상 부처님 은덕으로 편안히 살고 있음에 감사드렸으며 조그마한 삼간의 슬레이트 집이 임금님 궁전보다 좋다고 생각했다. 부처님 곁에 있고 불제자 된 것이 어찌나 좋던지 잠을 자다가 생각하여도 너무 좋았다고 한다.
스님은 물욕을 버린 참다운 수도자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길이 길이 세인의 본보기가 되었다. 성륜스님은 언제나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를, 유식한 자보다는 배우지 못한 자를, 건강한 자보다는 병약한 자를, 권력자보다는 힘없는 자를, 젊은이보다는 노인들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 처하여 고민하는 이를 도와주지 못하여 늘 걱정이었다.
시장을 보러 가서도 번쩍거리는 상점은 거들떠보지 않고 언제나 길가 난전의 할머니 물건을 샀다. 뿐만 아니라 물건 값을 전혀 깎지 않았다. 고생해서 한 푼 두 푼 버는 사람에게 냉정하게 너무 깎아 손해 가는 아픔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시골 장터에서 힘없는 노인을 발견하면 국수라도 사 잡수시라며 천 원 짜리 몇 장을 손에 꼭 쥐어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정작 스님 자신에게는 매우 인색하였다. 머지않아 벗어버릴 자신의 몸뚱이를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며 겨울철이면 두터운 솜옷이나 새옷을 두고도 바람막이도 제대로 안 되는 낡고 해진 옷으로 지내기 일쑤였다.
또한 어쩌다 불공을 하거나 불사가 있어 시장을 보고 짐이 무거워 택시를 타게 될 때면 얼마 되지 않는 지척의 거리였지만 요구하는 요금보다 꼭 얼마를 더 주고 내렸다. 그래서 택시 기사들 사이에 스님이 택시를 부르면 서로 견성암으로 가려고 앞을 다툴 정도였다.
또한 견성암 신도 대부분이 60세 이상의 몇 안 되는 할머니들이었으므로 신경통, 중풍 등 노인병 예방에 효험이 있다는 ’화풍단'을 약국에서 구입하여 이 약을 부지런히 나누어주기를 즐겨하였다.
방광의 기적을 보이다
견성암에서 가까운 대방 부락에 ‘창환이 엄마'라는 분이 살고 있었다. 건강한 두 아들을 둔 창환이 엄마와 아버지는 부지런하여 살림이 넉넉하였다. 어느 날 두 부부는 우연히 견성암을 찾았고, 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난 뒤 부처님을 의지처로 삼고 살아가야겠다는 불심이 싹텄다.
틈나는 대로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매일 새벽마다 견성암을 찾아와 노스님과 함께 예불에 참여하고 땀에 옷이 젖도록 노스님을 따라 일심으로 부처님께 절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노스님은 학식이 풍부하지도, 그렇다고 법문을 잘하지도 않았지만 부처님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과 소박한 인간애만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 외유내강하여 남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하리만치 엄격하였다. 견성암(見性庵)이란 암자 이름도 평소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는 것이 지고의 소망이었기에 노스님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
어느 날 깜깜한 새벽 찬바람을 헤치고 새벽 예불을 위해 창환이 엄마는 견성암으로 향하였다. 찻길에서 논길로 들어서자 견성암이 훤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 동지 팥죽 준비로 새벽부터 불을 지피는가보다 생각하며 견성암에 당도하였다. "스님! 스님!” 창환이 엄마는 대문에 이르러 스님을 불렀다. “오냐! 창환이 엄마냐?" 스님이 조그마한 법당 문을 열어 젖혔다.
그 순간 창환이 엄마는 어리둥절했다. 법당 안의 스님도, 촛대도, 부처님도, 모두 금빛으로 변해 있었고, 광원(불빛을 내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게 오직 금색 불빛만이 좁은 법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하여 창환이 엄마는 스님을 다시 불렀으나 금빛 옷을 입은 성륜스님은 여전히 어서 들어오라는 말씀뿐이었다. 창환이 엄마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보아도 장삼을 입은 노스님, 법당 바닥, 관세음보살, 부처님, 모두가 금광처럼 금빛으로 밝게 빛났다. 며칠 뒤 창환이 엄마가 그날 새벽에 보았던 광경을 노스님에게 말씀드리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1998년 정월 열여드렛 날 오후 3시 성륜 노스님이 입적하였으니 이때 스님의 세수 81세요, 법랍 41세였다. 청해문중의 스님들과 도반스님들을 비롯한 많은 스님들의 은은한 독경 속에 장례가 치러졌다. 다비식 뒤 나온 크고 작은 사리 수십 과는 49재까지 영단에 고이 간직했다가 문중 스님들의 뜻에 따라 지리산 도솔암 길목 벽암 속에 뿌려졌다.
성륜 노스님의 방광 모습을 직접 본 창환이 엄마는 지금도 부산 해운대구 재송 2동에서 고추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창환이 엄마는 그때 그 일을 마음에 묻어두고 살다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스님이 돌아가신 지 2년 째 되던 날, 스님의 제사를 지내면서 여러 스님과 신도들에게 비로소 자신이 목격했던 일을 들려주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법우(法雨)스님이 있다.
산청 견성암
- 산청 견성암 신중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산청 견성암 신중도(山淸 見聖庵 神衆圖)는 경상남도 산청군 견성암에 있는 신중도이다. 2018년 6월 21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645호로 지정되었다.
산청 견성암 신중도는 1873년 진주 월아산 성은암에서 조성된 불화이다. 비록 제작자는 알 수 없으나, 제작시기와 봉안처가 남아 있는 19세기 후반의 소규모 신중도로 안정된 화면 구성, 13위의 인물 구성과 비례를 잘 갖춘 인물표현 등 조선후기 신중도의 형식과 양식이 잘 갖추어진 작품이다. 색채는 주색과 녹색, 백색 외에 부분적으로 청색과 황색 등을 활용하였다. 본 작품은 19세기 불화의 화풍과 안정된 인물 구성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 포털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58~566.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66.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25, 33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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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륜(性輪)스님 | 본항목 | 성륜스님(性輪, 19~19) | 性輪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륜스님(性輪,_1918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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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륜(性輪)스님 | 청해(靑海)문중 | ~의 일원이다 |
성륜(性輪)스님 | 정각(正覺)스님 | ~의 제자이다 |
성륜(性輪)스님 | 해인사 국일암 | ~에서 출가하다 |
성륜(性輪)스님 | 도원(道圓)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성륜(性輪)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지도
- 견성암 (경남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