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晦光)스님
- 인물명 : 회광(晦光)스님
회광스님(晦光, 1862~1933)은 친일행정이 있는 한국의 승려이다. 양주 출신으로 19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신흥사에서 정함스님에게 득도한 뒤 건봉사에서 보운스님의 법통을 이었다.
회광스님은 역대 고승들의 행적을 적은 《동사열전》에 조선의 마지막 대강백(大講伯)으로 기록되었을 만큼 명망이 높은 승려였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앞두고 1906년 조직된 친일 성향의 불교 단체 불교연구회는 1908년 원종이라는 종단을 창설해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이때부터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한 이회광은 이용구의 권유에 따라 일본인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임명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성사되자마자 일본의 소토슈(曺洞宗)와 연합을 추진했다. 연합 조인은 1910년 10월 6일의 일로, 이에 따르면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합병된 셈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연합 조약을 직접 체결한 이회광은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며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조선총독부는 이듬해 사찰령을 발포하여 이회광이 추진한 소토슈와의 연합은 부결하였으나, 그를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사찰령에 따라 통폐합된 30본산 연합체의 대표격인 주지회의원 초대 원장도 맡았다. 원종 고문으로 임명된 다케다는 일본 불교 소토슈 승려로 현성사 주기를 하였고, 을미사변에 참여하였으며 이용구를 통해서 동학의 분열과 일진회의 어용화를 획책한 사람이다.
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 임제종을 합병하고자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접촉하고 돌아와 합병을 추진했으나, 강대련과의 갈등으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여론이 악화되면서 해인사 승려들이 이회광의 사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1924년 결국 해임사 주지 자리에서도 밀려났다. 조선총독부를 제치고 일본 본국과 직접 접촉하다가 말썽을 일으키는 지나친 친일 성향과 권력욕은 총독부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출처 및 참고자료] 위키백과 이회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