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대우스님(大愚, 1949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0월 29일 (토) 12:48 판 (릴레이션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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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우(大愚)스님은 수원 봉녕사 강사로 묘엄스님에게 전강을 받고 중국 남경대에서 율학을 공부한 후 봉녕사 금강율학승가대원장으로 연구에 매진한 괴산 남화사 주지인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9 서울 출생
1963 가섭사에서 호관(好觀)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7 동학사 강원 승가대학 입학
1974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 졸업, 중앙교육원 6기 수료,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수료
1975~1984 전국 선원 10하안거 성만
1984 봉녕사 강원에서 중강
1987~1996 봉녕사 강원 강사 역임
1992 봉녕사 묘엄스님에게 전강(傳講)받음
1993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관리자과정 수료
1998~2006 중국 남경대 석사과정 유학
2006 충북 괴산 남화사 주지
2008 봉녕사 금강율학승가대학원장의 소임, 봉녕사 금강율원서 연구 매진
2020 현재 괴산 남화사 주지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행지침 청정한 계율(戒律)
저서 및 작품 〈기신론 소고〉(논문집 『수다라』에 수록)
수계제자 진응(眞應)·종화(宗和)

활동 및 공헌

출생

[봉녕사 승가대학장 묘엄스님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p172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p173
[대우스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p175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p176
[남화사]사진출처:네이버 블로그https://m.blog.naver.com/buddhafind/221825862812

정지(正智) 대우(大愚)스님은 1949년 4월 25일 서울 주교동에서 아버지 이희익과 어머니 최장록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종현이다. 스님은 아직 어린 나이인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당시 현‘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창간의 주역이자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불교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성장하였다.

14세 출가동기

“당시 법주사 주지였던 추담 스님이 부친과 친분이 있어 어느 날 우리 집에 오셔서 저녁 공양을 하셨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 공양을 올렸다. 그런데 다른 반찬은 하나도 안 드시고 오직 간장만 찍어서 공양을 하시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 정말이네, 스님들 고기 안 드신다더니 정말이네’ 하며 놀랐다. 그 모습이 너무 거룩해 보여 나도 출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듬해 부친은 손수 딸이 출가할만한 사찰을 물색했다. 바로 마포 극락암이었다.

스님들이 많은 곳으로 출가하고 싶다고 하여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때가 1963년 7월, 스님 나이 15세 되던 해 여름이었다. 무남독녀로 어려서 외롭게만 자랐던 스님에게 대중이 많은 수정암은 그야말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또한 절집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비스럽기만 하였다. 타고난 성격이 신명이 많고 장난기가 많았던 터라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수정암은 스님 세상만 같았다. 당시 스님이 얼마나 개구쟁이였던지 은사스님이 하루에 한 번씩 바뀔 정도였다.

덕분에 엄한 은사를 만났다. 호관 스님이었다. 부친이 처음 점찍어준 마포 극락암의 은사가 바로 호관 스님이었다. 대우 스님이 수정암에서 ‘뛰어다니던’ 한 달 여 사이에 호관 스님은 가섭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법주사 말사 등록을 위해 수정암에 들른 참이었다. 때마침 수정암에서 ‘감당 안 되는 아이’에 대한 대중 스님들의 호소를 들은 추담 스님이 호관 스님을 은사로 정해 주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인연이 한 걸음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호관스님과 스승의 인연을 맺고 마포 극락암에서 삭발을 한 뒤 스님은 가섭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산길이 얼마나 멀던지 몹시 힘겨웠지만 스승님은 행자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 버리셨다.

스님의 고된 행자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벽 예불로 시작 되는 하루 일과는 너무도 힘들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섭게 몰아붙이던 은사스님이 그때는 너무나 야속하여 원망도 많이 하였지만, 그 시절이 지금껏 스님을 버텨오게 한 가장 큰 힘이 되고 있음에 스님은 늘 감사히 생각한다.

동학사 강원 입학

18살, 동학사승가대학에 입학한 후 그 환희는 고스란히 경전으로 이어졌다. 부처님의 말씀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경이로운 세계였다. 지형, 상덕, 일연 스님 등 평생의 도반들도 승가대학에서 만났다. 무엇보다 당대의 대강백 호경 기환 스님이 동학사승가대학에 오신 후 “책도 없이 칠판에 판서하시며 강의하는 모습이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학인들이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대우 스님의 공부도 그야말로 날개를 달은 듯 막힘이 없었다.

호경 스님도 대우 스님의 총명함을 눈여겨봤다. “내 밑에서 3년만 재강을 하면 전강을 해주마”하며 대우 스님이 강원에 남길 권했다. 일초 스님과 함께 3년을 철썩같이 약속하고 재강을 시작했지만 초등학교에서 멈춰 선 배움에 대한 미련이 또 고개를 들었다. “대학 가서 공부를 더 하자”는 지형 스님, 일연 스님의 말에 재강 1년 여 만에 보따리를 싸들고 은사스님의 허락을 받으러갔다. 하지만 “스님 됐으면 참선해야지 무슨 대학.” 은사스님은 꿈쩍도 안했다. 은사스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말문을 닫고 방에 틀어 앉아 책만 들여다봤다. 무언의 시위였다. 그렇게 5~6개월이 지나가 은사스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 맘대로 해라. 학교를 가든, 선방을 가든, 유학을 가든.”

선방을 택하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막상 은사스님이 ‘네 마음대로 해라’ 하시니 며칠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금 대학을 가서 끝까지 공부를 한다면 박사가 되는 것인데, 박사가 되면 무엇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호경 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한번은 호경 스님이 대선사이신 전강(1898~1975) 스님과 나누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나도 일찌감치 (전강) 노스님처럼 참선 했으면’하며 후회하시는 말씀이었다. 당대의 대강백도 이런 후회를 하는데, 마음을 깨닫는 것과 경을 본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는 것은 선방이구나 싶었다. 선방으로 향했다.

꼬박 10년을 선객으로 살았다. 내원사를 시작으로 전국의 선방에서 10안거를 성만했다. 내원사에서는 3년 결사에 들어 산문 출입을 끊고 정진하기도 했다. “출가 후 바로 선방으로 향해 누더기 한 벌로 정진하는 스님들을 보니 강원에서 공부한 것이 그저 알음알이 하나 더 짊어지고 온 것 같아 부끄러웠다”는 스님은 늦어진 세월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더욱 열심히 정진했다. 하지만 급하게 먹는 밥에 어찌 탈이 없으랴. 성급한 마음은 상기를 불렀고 스님은 공양주 소임을 자청하고 묵언하며 하루 2000배의 절을 하며 스스로를 다스리기도 했다.

계율 공부

그러나 스님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못다 한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특히 강원에 있을 때부터 율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해제 때 계율 특강이 열리는 곳이 있으면 강의를 들었다. 비구니를 대상으로 한 첫 계율 특강이 진관사에서 열렸다, 전국의 승가대학 졸업생 가운데 중강급 스님들을 대상으로 마련된 연수교육이었다. 도반인 지형 스님이 선방에서 안거 중이던 대우 스님의 이름으로 신청서를 접수했다. “지금도 지형 스님에게 가장 고마운 점”이라는 대우 스님은 진관사를 시작으로 운문사와 봉녕사로 이어진 2, 3차 계율특강을 모두 찾아다니며 율장에 대한 목마름을 풀어나갔다.

1974년 범어사에서 비구니계 수계

1974년 범어사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한 후, 마음이 느슨해지면 범어사에서 열리는 수계산림에 반드시 참석하여 계율을 듣기도 했다. 50권 남짓 되는 분량의 『율장집』을 한 질 사놓고 네댓 명의 도반들과 함께 일타 큰스님께 수학 허락을 받아냈지만, 그 계획은 일타 큰스님의 건강 악화로 무산되어 스님을 안타깝게 했다.

1984년 10월부터 수원 봉녕사에서 중강

그럴 즈음 봉녕사에서 7일 동안 계율 특강이 열렸다. 스님은 율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열심히 들었는데 그 모습을 눈여겨보신 묘엄스님이 봉녕사에서 중강을 맡아달라고 하셨다.

자격이 없다며 사양하자 묘엄스님은 좋은 사상으로만 가르치라며 재차 부탁하셨고, 대우스님은 대신 묘엄스님께 율장을 가르쳐 달라고 청을 드려 허락을 받았다. 율장을 배운다는 기대와 학인들을 가르친다는 의무감을 갖고 스님은 1984년 10월부터 중강을 시작하였다. 대우스님은 봉녕사에서 4년 동안 치문만을 가르쳤다. 그것은 한 가지라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해야겠다는 스님의 투철한 자세에서 비롯되었다.

1992년 봉녕사 묘엄스님에게 전강(傳講)받음

스님은 1992년 중강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묘엄스님에게 전강을 받고, 그 후로도 몇 해를 더 학인들과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어의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학인들에게 선의 도리를 가르쳤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체험하고 터득한 공부가 아니라 남의 소리였던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음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이고 잘못된 것인지를 절감면서 스님은 다시 선방행을 결심하게 된다.

1996년, 마지막 삶은 선방에서 회향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리라 생각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 길 밖에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된 이유에는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 『능엄경』을 세 번째 가르치던 때였다. 어느 날 생과 사가 하나로 압축되어 나타나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이 너무나 끔찍하여 깨어난 후에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능력과, 사람이 아무리 자유로워도 깨달음을 위한 자유에 미칠 수 없음을 재확인하고, 1997년 4월 29일 12년의 강단생활을 접고 스님은 봉녕사를 떠나 선방으로 향하였다.

내원사와 백흥암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강단을 떠난 지 3년이 되자 접어두었던 율에 대한 미련이 다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이때 동학사에서 강사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내가 저 율장을 펼쳐보지 않으면 내 제자들은 과연 저 책을 열어나 보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강원에서 한문 경전을 가르쳤지만 율장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고대한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한 제자의 권유로 중국행을 결심하였다.

중국 남경대 석사 과정 입학

1999년 3월 48세에 스님은 좀 더 넓고 깊은 율을 연구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떠났다. 천진사범대학과 북경대학교의 어학연수과정을 거쳐 남경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상관없겠지만 조금 늦은 듯한 유학길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어느 젊은 사람 못지않게 배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도선율사의 계율 사상’을 주제로 2006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8년간의 유학은 율장을 보는 안목을 열어주었다. 중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우 스님에게 묘엄 스님은 2008년 율맥을 전하고 봉녕사 금강율학승가대학원장의 소임을 맡겼다. 그로부터 4년, 가장 존경하는 대학자이자 스승인 묘엄 스님아래서 율원의 학인들과 밤새워 율장을 연구했다.

청정한 계율이 올곧게 뿌리 내리기를

이 땅에 청정한 계율이 올곧게 뿌리를 내려서 모든 수행자들이 혼탁한 중생세계에 한 송이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기를 스님은 평생의 수행력으로 발원하고 있다. 대우스님은 2022년 현재 괴산 남화사 주지로 있으며 수계제자로는 진응(眞應)·종화(宗和)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대우(大愚)스님 본항목 대우스님(大愚, 1949~) 大愚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우스님(大愚,_194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대우(大愚)스님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대우(大愚)스님 호관(好觀)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대우(大愚)스님 가섭사 ~에서 출가하다
대우(大愚)스님 월산(月山)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대우(大愚)스님 석암(昔岩)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대우(大愚)스님 안거 ~을(를) 성만하다 전국 선원

지도

  • 금강암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363-2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