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9월 1일 (목) 14:43 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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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육년(六年)스님은 부용암 만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우기 위해 어린이 교육에 매진한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6 경북 성주 출생
1944 부용암에서 만선(萬善)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7 보덕사에서 2하안거 성만
1951 인천 도화동 대원암 (현 부용암) 주지 취임
1952 춘성(春城)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0 춘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0~1999 부용암 주석, 부용암 대웅전 중창 불사, 요사채 불사
1999. 5. 29(음력) 부용암에서 입적(세수 94세, 법랍 56세)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 문 중 : 법기(法起)문중
  • 수행지침 : 자비실천
  • 상 훈 : 인천시장 표창장(고아 20여 명을 양육한 공로)
  • 수계제자 : 연경(학수)·본각(本覺)

활동 및 공헌

출가

부용당(芙蓉堂) 육년(六年)스님은 1906년 1월 26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서 아버지 성태영과 어머니 벽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성남수이다. 일찍이 부모님의 권유로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던 중, 39세 되던 1944년에 법기문중의 제6대 만선스님을 은사로 늦은 출가를 하였다. 1947년 5월 충남 예산 보덕사에서 2하안거를 성만한 이래로 일생 부용암 산문을 벗어나지 않고 가람수호와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수행의 일과를 삼았다. 은사스님이신 만선(萬善)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바위틈에서 백일기도를 하시고 꿈에 인천 부용암 터를 선몽 받았다. 함께 있던 부영스님께서 부처님 한 분과 짚신 몇 켤레를 주며 터를 찾아 떠나라고 권유하여 탁발을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에서 본 곳을 찾게 되어 터를 잡고 암자를 열었는데, 그때가 1941년경이었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만선스님과 인연

처음에는 암자 이름이 대원암이었는데, 정화운동 후에 대원암 현판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재의 부용암(芙蓉庵)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일설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 부속암자인 대원암 현판이 정화 당시 인천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만선스님은 다시 금강산 유점사에 다녀오면서 나한님 두 분을 모시고 오셨다. 이렇게 모시고 내려온 나한님은 모두 8분이었고, 현재까지 부용암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

만선스님은 1945년부터 탁발을 하며 부용암 불사를 시작하셨는데, 탁 발을 다니실 때는 과일 껍질, 헌옷 등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주워 걸망 속에 넣어왔다. 그리고 과일 껍질은 깨끗이 씻어서 햇빛에 말려 장아찌를 담그고 누더기 옷은 잘 기워서 동자승들에게 입히곤 하였다. 만선스님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영험함이 있었다. 눈병이 유행할 당시 탁발을 하다가 눈병환자를 만나 진언을 외우면 곧 깨끗하게 나았다. 몸에 기생하는 이를 머리 깎는 삭두칼에 모이게 해서 갖다버리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선스님은 ‘신통쟁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성격이 몹시 괴팍한 면이 있어서 법당에 마지를 삐뚤게 올리거나 잘못 올리면 그대로 마당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밥을 씻어서 먹고 마지를 다시 지어 올리게 하였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다 부서진 대소쿠리를 불에 태우다가 들킨 스님도 있었다. 그러면 도로 끄집어내어 타버린 반쪽을 삼베로 이어서 다시 사용하게 만들만큼 물건을 철저하게 아끼셨다. 은사스님의 꾸중이 무서웠던 대중들은 늘 긴장 속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육년스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닦은 그릇을 또 닦고 하다못해 솥 밑에 묻은 그을음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그을음이 많으면 땔감도 많이 들어간다고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은사스님 곁을 떠나려고 네 번이나 마음을 먹었는데, 인연이 중하였던지 떠나지 못하고 부용암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혹독한 시집살이 같은 생활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던 육년스님은 1955년에 만선스님이 입적하시자 그 뒤를 이어서 부용암을 계속 지켜왔다.

육년스님은 평소에 말이 없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은사스님께 걱정을 들은 날은 어김없이 밥을 굶어야 했는데, 밥을 먹지 말라고 하면 허락이 있을 때까지 이틀이든 사흘이든 먹지 않았다. 하루는 동자스님이 볼 일이 있어 마을에 다녀왔는데, 와서 보니 스님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은사스님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육년스님은 평생 말이 없었고 의식염불을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진 당일 새벽녘에 돌배를 주우러 뒷산에 갔는데 짐을 진 사람들이 몰려오고, 비행기에서는 삐라가 뿌려졌다. 인천 사람 전부가 수봉산으로 몰려오는 듯하였다. 배를 주워서 절에 가니 절에도 피난민들이 가득하였다. 그 중에는 스님들도 많았다. 육년스님은 배를 나눠주는 것을 시작으로 피난민들에게 공양을 준비해 주었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육년스님은 전쟁 통에 불이 난 밀가루 공장에 가서 타다 남은 밀가루를 퍼 왔다. 낮에는 땔감을 아끼느라 불을 때지 못하고 밤에만 군불을 지폈는데, 그때 밀가루 죽을 쑤어서 피난민들을 돌보았다. 사람들이 많아 밀가루 양이 적으면 물을 넉넉히 넣어 모두가 골고루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하였다. 그때 육년스님과 사제 동자스님은 밀가루 묻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단무지 공장에 불이 났는데, 반찬이 없어서 고심하던 육년스님은 불탄 공장에 가서 무거운 단무지를 걸망에 잔뜩 담아 짊어 지고 또 양손 가득히 들고 와서 대중들이 먹도록 하였다. 육년스님과 사제스님은 배가 고파 그 자리에서 조금 먹고 왔는데, 절에 돌아와서 은사스님께 시주의 은혜가 들어 있는 단무지를 먹었다고 걱정을 들어야만 했다.

전쟁 중에는 탁발을 다니면 어느 집에서든 조금이라도 시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부용암도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육년스님은 절을 지키고 은사스님과 동자스님들은 수원으로 떠나기로 했다. 은사 만선스님은 동자스님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교육을 단단히 시켰다. 산과 절 이름을 외우게 하고,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얻어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행기가 폭격을 하면 같이 있지 말고 떨어져 있고, 잘 때는 손을 붙들고 자고, 낮에는 멀리 떨어져서 서로 눈빛만 보고 있으라 당부하며 당시로서는 큰돈인 200원을 쥐어주셨다. 육년스님은 전쟁 중에도 성격이 괴팍하신 은사스님을 위하여 필요한 생필품을 챙겨드리고 피난길에서도 빨래를 한 뒤 양은대야에 진흙을 담아 그 대야를 불에 달궈서 다림질까지 해드렸다.

한번은 육년스님이 쌀을 탁발하고 동자스님은 김치를 얻고자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집은 비어 있고 장독위에 사람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무서움도 두려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시체의 머리를 들어 장독뚜껑에 올려놓고 속을 헤치니 김치가 나왔다. 그 당시에는 비닐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김칫국물을 꼭 짜서 걸망에 넣고 돌아왔다. 부용암에 도착하여 김치에 소금을 뿌린 후 장독에 물을 부어 함께 넣었다. 그리고 죽과 함께 반찬으로 공양을 하였다. 육년스님은 은사스님의 고된 시집살이 때문에 화병이 생겼었다. 그래서 얼음을 좋아하였고 입적할 때까지 뜨거운 것은 물론이고 미지근한 것도 먹지 못했으며, 상좌스님들은 공양을 모두 식혀서 올렸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워라

육년스님은 은사스님께 받은 상처를 자비로 승화시켜 전쟁고아와 부모 없는 아이들을 평생 보살피며 살았다. 어려운 형편에 야학까지 보내면서 교육을 시켰으며 항상 바르게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아이들이 절집에서 산다고 하면 또래들에게 놀림을 받을까봐 신도회장에게 어머니 역할을 하게 하는 등 다른 사람들이 부모 없는 아이라고 흉보지 못하게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또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절의 신도와 수양딸의 인연을 맺게 하였다. 절에서 사는 아이가 아니라 넉넉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선생님 이후에 모든 것을 알고 스님의 깊은 배려에 감동하여 교사부부가 함께 귀의하여 신도가 된 일도 있었다. 스님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친 적이 없었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당신이 키운 아이들이 시집을 갈 때면 손수 모든 것을 준비하여 보냈다.

하루는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자고 있는데 강도가 들어왔다. 도둑의 발이 하도 커서 구둣발로 아이들을 밟으면 아이가 죽을까봐 밟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평소에 건강을 위하여 끼고 있던 구리반지까지 다 내어주고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스님은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아끼며 모든 뒷바라지를 다하였다.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매우 좋았는데, 설날에 아이들에게 새 옷을 입히려고 겨울 내내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만들곤 하였다. 만선스님의 원력만큼 육년스님도 평생 부용암을 지키며 살았다. 스님은 일생에 단 한 번 7일간의 전국 여행을 하였는데, 그만큼 어렵고 답답하게 살아서인지 당신의 상좌들은 가능하면 자유롭게 살도록 하였다.

자랑스런 인천시민상 수상

스님은 인천시 모범시민으로 뽑혀서 제6회 모범시민상을 수상하였다. 아이들을 잘 키울 뿐만 아니라 교육을 잘 시킨 공로였다. 당신은 배운 것이 없었지만 아이들 교육문제만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부 지원해주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좋은데, 좁은 곳에서 너의 인생을 스스로 막으려고 하느냐. 어디든지 가고 싶으면 가고, 하고 싶으면 해라. 인생은 짧다. 그러니 큰 욕심 내지마라. 괜히 집 크게 짓고 욕심내면 그것 치다꺼리 하다가 인생 다 간다. 너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히 살아라.” 하고 늘 당부하였다.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인 본각스님은 세 살 때부터 육년스님이 기상을 꺾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키웠다. 본각스님은 ‘모든 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고, 사람을 소중히 여겨서 귀하게 키우며, 자기의 일로써 남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던 은사 육년스님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입적

육년스님은 1999년 음력 5월 29일 인천 부용암에서 힘들었던 사바의 일생을 접고 세수 94세, 법랍 56세로 입적에 들었다. 다비 후에 부분적으로 거둔 사리만도 47과나 되었다. 현재 부용암은 육년스님의 맏시봉인 연경스님이 1999년에 도량불사를 완비하고 스님의 뒤를 이어 3대째 도량을 지키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연경(학수)스님과 본각(本覺)스님이 있고, 손상좌 선덕·덕현·덕민·효공·덕효·효범·효욱·효장·효은·효근·효중·효석스님과 증손 상좌 효상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2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49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육년(六年)스님 본항목 육년스님(六年 1906~1999) 六年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육년스님(六年,_190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육년(六年)스님 법기(法起)문중 ~의 일원이다
육년(六年)스님 덕운당 성진스님 ~의 제자이다
육년(六年)스님 부산 금천선원 ~에서 출가하다
육년(六年)스님 운암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육년(六年)스님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지도

  • 부용사(부용암)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624-24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