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8월 18일 (목) 20:32 판 (시맨틱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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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성스님은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법성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경력

연도 내용
1938 대전 출생
1970 동학사 미타암에서 혜문(慧文)스님을 은사로 출가
마곡사에서 일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2 해인사에서 비구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 입학, 태경스님을 강사로 수학
1988 법성사 창건 및 주지 취임
1994 법성사 중창 불사
2004 현재 법성사 주지

활동 및 공헌

출가

수녀와 스님을 천상의 사람이라 여기며 출가를 꿈꾸다.

법성스님은 1938년 10월 25일 대전에서 아버지 유봉노와 어머니 민옥례 사이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이며, 이름은 유민순이다. 어린 민순의 외가는 가정교사를 둘 정도로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정작 자신의 집은 가난한 데에다 학교가 십 리나 떨어진 시골에 있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린 동생과 함께 홍역에 걸렸는데, 결국 생사를 넘나들던 동생은 죽고 민순만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죽다가 살아난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고 바느질을 해서 딸의 학비를 대주었다. 민순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이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혼자서 산 넘고 강 건너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집안에서는 뒷바라지가 어렵다며 학교를 그만두도록 종용하였다. 그래도 민순은 꿋꿋이 학교를 다녔는데 머리가 좋아서 한번 들은 것은 곧바로 외울 수 있었다.

민순은 성장하면서 수녀나 스님을 천상의 사람처럼 여기며 그런 삶을 늘 동경하였고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니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꿈을 접고 말았다. 그러다가 출가의 꿈을 끝내 접지 못하여 뒤늦게나마 허락을 받은 뒤 마침내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성당이 아니라 절로 출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70년 동학사 미타암에서 혜문(慧文)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법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출가 후 은사스님을 15년간 시봉하다

법성스님의 은사 혜문스님은 수묵화로 명성이 자자하던 옥봉스님의 사제였는데, 법성스님은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이 난 은사스님을 15년 동안 곁에서 시봉하였다. 법성스님은 은사스님의 지시로 불빛 한 점 없는 남매탑에서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을 드렸는데, 아무리 거센 눈비가 몰아쳐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예불을 드렸다. 어느 날 남매탑에서 한 총각이 목을 매고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현장조사를 위해 출입금지 선을 두르고 시신을 그대로 둔 상태였고 마침 은사스님이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하루쯤은 건너뛸 수도 있었음에도 은사스님에게 거짓말을 할 줄 몰랐기에 평소처럼 남매탑을 돌며 예불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바쁜 시간을 쪼개어 스님은 동학사 강원을 다니며 교학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은사스님이 속가에 가셔서 암자를 혼자 돌봐야 하는 상황에도 강원수업이 끝나면 남매탑으로 달려가서 저녁예불을 했고 또 새벽이 되면 구르듯이 뛰어내려와 수업을 들었다. 당시 강사스님이셨던 태경스님은 매우 성품이 좋은 분이셨는데, 법성스님을 보고 “법성이는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오면서도 지각 한 번 하지 않느냐.” 하며 칭찬을 하곤 하셨다.

법성사를 창건하다

스님이 강원에서 『기신론』을 볼 무렵 은사스님의 명으로 동학사 관음암의 살림을 맡아 5년간 지극정성으로 절을

돌보았고 5년 후에는 사숙이신 옥봉스님이 관음암으로 들어오게 되어 스님은 근처 마을에 집을 한 칸 마련하여 법성사를 세웠다. 처음 법성사를 세울 무렵 스님은 신도 한 명 없는 곳에서 절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님이 법성사로 들어오는 날 마을의 신도 한 사람이 스님을 꿈에서 보았다며 찾아왔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법성사를 찾는 신도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법성스님은 허허벌판 같은 곳에 논과 밭을 조금 매입하였고, 곧이어 80평을 더 샀다. 그 다음에는 앞에 논이 있는 땅 45평을 더 사들였으며, 이후 140평을 매입하여 주차장까지 만들면서 현재의 법성사를 이룩하였다.

법성스님은 나이가 들면서 공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여 마음이 급해졌다고 한다. “독살이로 살다 보니 낮에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초저녁에 한숨 자고 밤 한 시에 일어나서 그때부터 기도를 합니다. 저는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중이 공부하는 소망 말고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수계제자

수계제자로는 혜명·혜성 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44~449.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7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성(法惺)스님 본항목 법성스님(法惺, 1938~ ) 法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성(法惺)스님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법성(法惺)스님 혜문(慧文)스님 ~의 제자이다
법성(法惺)스님 동학사 미타암 ~에서 출가하다
법성(法惺)스님 일연스님을 계사 ~로 사미니계를 수지하다
법성(法惺)스님 해인사 ~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하다
법성(法惺)스님 동학사 강원 ~을 입학하다
법성(法惺)스님 태경스님 ~을 강사로 수학하다
법성(法惺)스님 내원사 동안거 ~를 성만하다
법성(法惺)스님 동학사 내원암 ~에 주석하다
법성(法惺)스님 법성사 ~를 창건하다
법성(法惺)스님 법성사 주지 ~에 취임하다
법성(法惺)스님 법성사 중창 불사 ~를 진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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