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소스님(慧沼, 1931生, 비구니)
혜소(慧沼)스님[1] | |
---|---|
법명 | 혜소(慧沼) |
법호 | |
속명 | 심의원(沈宜嫄) |
출생 | 1931.10.02. |
출가 | 1956년 |
입적 | 2015.10.21.(음9.9) (세수 85세, 법랍 60세) |
사찰 | 성불사(성불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리 산19-4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혜소(慧沼)스님은 윤필암에서 혜륭(慧隆)스님을 은사로 출가 문경 성불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31 | 경북 청송군 출생 |
1956 | 윤필암에서 혜륭(慧隆)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6 | 김룡사에서 종수(宗壽)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57 | 성불암 불사 |
1957~1983 | 백일 법화경 기도, 천일기도 정진 |
1984 |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91~1993 | 대웅전 30평 불사 |
1997 | 성불암 도로 포장공사 |
1998 | 성불암 40평 요사채 불사 |
2000 | 성불사 주지 취임(개칭) |
2015 | 2015. 9. 9.(음력) 성불사에서 입적 (사리36과를 남김) |
문중 | 수정(水晶)문중 |
수행지침 |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 |
수계제자 | 견진・대과・진묵 |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소(慧沼)스님은 1931년 10월 2일 경북 청송군 부남면 감연 2동에서 아버지 심능문과 어머니 남월란 사이의 1남 2녀 중 딸로는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이며 이름은 심의원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대동아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오빠가 학도병으로 끌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에 스님은 오빠가 없어도 우리 집은 잘 살아야 한다며 집안을 꾸리며 어른 노릇을 했다. 이런 스님을 보고 아버님은 장한 딸이 아니고 장한 아들 같다고 말씀하셨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영특해서 공부를 잘하였고 결국 공부로 성공하였지만 스님 자신은 일로써 성공을 했다. 스님은 지금도 일로 하는 것은 뭐든지 자신이 있다고 한다.
스님은 사명대사, 원효대사, 이차돈에 관한 3권의 책을 읽은 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감동적이어서 발심을 하셨고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스님은 예쁜 송곳과 가위를 들고 출가를 하였다. 옷을 만들어 입을 때 이 도구를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처음 출가를 결심했을 당시 스님과 제일 친했던 간호사 친구와 8개월 동안 시멘트 공장을 다니면서 김룡사에 다녔다.
혜소스님이 김룡사를 다니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스님이 되려면 염불을 잘 해야 하는데 스님은 목청이 안 좋아서 크게 외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스님이 되고 싶어 하자 어떤 스님 말씀이 ‘김룡사는 염불은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줬던 것이다.
그 후 혜소스님은 1965년 결제 때 문경 윤필암에서 혜륭(慧隆)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1965년 7월 15일 김룡사에서 종수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84년 10월 20일 해인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 하였다.
수행
성철 큰스님께서 김룡사에 계실 때 화두를 탔고, 일을 할 때도 화두를 들다보니 지겹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혜소스님이 윤필암에서 살 때에는 각자의 양식은 개인적으로 탁발을 해서 한 철에 3말씩 절에 내놓고 살았다. 그러나 스님은 기관지가 나빠서 대중들과 함께 오래 있지 못하고 결국 1959년 기관지병으로 인해 윤필암에서 나왔다. 그리고 1966년 봄 은사스님과 탁발을 하여 토굴(지금의 성불암 터) 불사를 하였다.
성불암 불사
현재 성불암이 있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리 산19-4번지는 원래 전 종정이신 서암 큰스님께서 토굴을 짓기 위해 잡아 두었던 터였다. 그렇지만 서암 큰스님이 도봉산 천축사의 무문관으로 들어가시고 터가 비어있다는 말을 듣고 은사스님과 혜소스님께서 들어가서 지금의 성불암 불사를 하신 것이다.
혜소스님이 충주 쪽으로 탁발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은사스님께서 목탁을 치고 혜소스님은 발우를 들고 광목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의 빛깔이 얇은 금이 입혀진 것처럼 느껴졌다. 스님은 ‘신심이 있으면 사물이 달리 보이는 것 같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렇게 한철을 탁발하여 2만원을 모았는데, 당시 스님께서는 맹장 수술을 한 뒤여서 고통이 심했다.
또 한번은 대구로 탁발을 나갔을 때였다. 비구스님의 절인 원만사에서 묵었는데 ,신세를 지고 그냥 올 수 없어서 은사스님이 장삼을 한 벌 지어주고 나왔다. 요즘은 객비로 드리곤 하는데, 그 당시는 돈이 없는 어려운 시절이어서 장삼을 해 주었던 것이다. 혜소스님은 주름을 잡는 등의 잡일을 하였는데, 은사스님은 정화 후에 장삼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1966년 봄에 탁발을 하여 7월부터 불사를 시작하고 동짓달에 완공하였는데, 은사스님은 일꾼들에게 술과 담배를 못하게 하셨다. 당연히 일꾼들이 기막혀 했다. 아침 공양을 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어영부영 하다보면 자연히 일하는 시간이 늦어져서 11시나 되어서야 일을 시작하곤 했었다. 때문에 은사스님이 술과 담배를 못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돈 7만원을 기와지붕에 흙담으로 인법당을 완공하였다.
은사스님(혜륭스님)의 소신공양
은사스님은 토굴이 완공되고 나자 여기저기로 공부를 다니셨다. 이때 은사스님의 속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서 은사스님은 어머니의 49재를 보지 못하셨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은사스님은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해서 천일 동안 『법화경』 기도를 시작하셨다. 이때 약왕보살 본사품 중에서 혜경보살이 스스로 소신공양을 한 부분을 읽고 자신도 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그런데 은사스님은 생각으로만 하지 않고 동화사 내원암에서 1976년 11월 13일 세수 58세, 법납 31세에 스스로 다비를 차려 소신공양을 하셨다. 다비가 되는 중간에 입도 벌리지 않았으며 완전히 연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은사스님을 보고 다른 스님들은 독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입적하면서 유언을 남기셨는데, 5재는 해인사 백련암 성철 큰스님께서 부탁을 드렸고, 문경 혜소스님에게 연락을 하라고 하셨다 한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에 혜소스님은 건강이 악화되어 각혈까지 하며 토굴을 짓고 난 뒤 백일일 동안 『법화경』기도를 하고, 다시 심부름을 하면서 천일기도를 어렵게 끝마쳤다.
성불암 이야기
성불암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신도가 있었다. 자궁 밖 임신이 되어 아이를 낳지 못하여 다른 곳에서 아이를 낳아서 데려와 키웠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장하여 장가를 가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아들이 장가를 못 가자 신도님은 며느리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오직 며느리 보는 소원을 가지고 절을 다녔고 어렵게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며느리마저 자궁 밖 임신이 되어 유산을 했다.
수원이 고향인 며느리는 3년 동안 병원을 다니라는 말을 듣고 생남불공을 올렸는데, 시어머니는 손주 욕심에 기도를 열심히 다녔지만 며느리는 게으름을 피웠다 한다. 이 때 시어머니가 며느리 때문에 어찌나 신경을 썼던지 심장병이 생길 정도였다.
혜소스님이 그 신도님을 보고 관음주력 천 번씩 삼천 번을 하라고 하면서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혜소스님 꿈에 은사스님이 오셨는데, 스님은 은사스님을 보자마자 “나를 속이고 어디 갔다 왔느냐.”며 원망 섞인 투로 말하였다. 그런데 은사스님은 전혀 화를 내시지 않고 온화하신 목소리로 “왜 여기 떠날까봐 그러니 내 저기 아래 집을 얻어 두었다”라고 하셨다.
그 일이 있고 10여 일이 지났을 무렵 며느리가 임신을 하였다며 신도님이 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러 왔다. 그 뒤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석형이라고 지었다. 석형이는 얼굴이 잘생겼고 별명을 ‘음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얌전했다.
스님의 은사스님도 그러하셨다. 은사스님의 속가 이름이 최음전이었는데 이름처럼 성품이 얌전했다. 너무 가난하던 시절 은사스님의 어머니는 개가를 하여 스님의 성은 ‘최’씨에서 ‘정’씨로 바뀌었다. 혜소스님은 은사스님이 전생에 너무 어렵게 사셨기에 손이 귀하고 잘 사는 집을 골라서 태어나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의 성불암은 1991년 스님의 세수 61세에 1완공하고, 1993년에 법당(대웅전) 30평, 1998년에 40평의 요사를 완공하였다. 성불암으로 올라오는 도로는 군청에서 2천만 원을 보조받고 사중의 1천만 원을 들여 1km의 도로를 시멘트 포장을 하여 닦은 뒤, 문경시에서 1억원을 보조 받아서 1997년 나머지 구간의 도로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수사와의 인연
성불암 위에 수사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수사님이 스님을 찾아와 예불을 같이 모셔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매일 6시에 예불을 하고 30분간 정진을 하자고 서로 약속을 하였다. 그 뒤 그 수사는 매일 6시에 내려와 죽비를 치고 1시간씩 공부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사님이 심각한 얼굴로 ‘어지간한 경계는 다 밀어붙이겠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경계가 왔다.’며 공부하는 스님을 소개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께서는 범어사 조실스님인 지유 큰스님을 소개해 주었다. 수사님이 경험한 경계는 다름이 아니라 스님과 공부를 하고 난 뒤 타심을 알 정도가 되었는데 자꾸만 교만한 생각이 들어서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품이 깔끔하신 수사님은 그냥 산에서만 살면 흔들린다고 일요일마다 성당에 내려간다. 스님은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 배척 할 것이 아니라 배우면서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스님
혜소스님은 평소에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다. 한번은 혜소스님을 보신 어느 스님이 “융스님이 약속을 잘 지키는 상좌가 있다고 하더니 바로 그 스님이구나!”하셨다고 한다. 그 정도로 혜소스님은 한번 약속을 하면 절대 어기지 않는 스님으로 정평이 나있다.
스님은 밖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활동을 하는 것보다 낭비 안하고 조촐하게 살면서 승려 생활을 해야 자신이 한걸음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어렵고 불편해서 공부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다 자신들이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토굴 지을 때 은사스님은 남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아서 직접 탁발하셨습니다. 젊은 스님네들이 이런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자비를 베풀고 자신이 먼저 나서고 돈에 물들지 않아야 하는데 요새는 살 만하고 물자가 너무 흔해 낭비벽이 심해져서 걱정입니다.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예의범절을 잘 지켜서 지금은 저절로 예의 있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특별히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이 없다고 겸손해하는 스님은 ‘그저 소신껏 열심히 사는 것뿐이고, 중노릇이라는 것은 특이한 것이 없다.’며 자비를 베풀고 수행 정진에 힘써야 한다고 한다.
입적
혜소스님은 2015년 성불사에서 입적했으며 사리 36과를 남겼다. 수계제자로는 견진·대과·진묵스님이 있다.
문경 성불사
성불사는 지난 1966년에 비구니 혜륭스님과 성좌 비구니 혜소 스님이 창건하였고, 지난 1976년 비구니 혜소 스님이 인법당ㆍ흙집 요사채 1동을 증축하였다.
1992년 주지 비구니 혜소 스님과 상좌 비구니 대과 스님이 현재의 대웅전(정면 3칸ㆍ측면 3칸 규모의 단아한 주심포계 맞배 지붕 형식)과 산신각ㆍ서요사채 1개 동을 중창하였다.
2000년 승려 분한 신고 때 선학원으로 명의 등록된 것을 대한불교조계종 제 직할교구 사설 사암으로 등록하면서 성불암을 성불사로 개칭하였다.
1994년 가을에 석가모니불ㆍ관세음보살ㆍ지장보살 동불상을 모셨다. 지난 1995년에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그리고 산신각에 칠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그리고 2003년에 동요사채 1개 동을 건립하였고, 지난 2012년에 대웅전 석가모니불ㆍ관세음보살ㆍ지장보살 동불상에 칠보로 개금불사를 하였다.
- 출처: 문경시민신문, 주흘산 중턱 성불사의 사리탑 및 부도탑 제막식 법회 개최 http://www.mgnews.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239&idx=50409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480~486.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49.
- 오마이뉴스, 이 문에 들어오는 자, 망념에 빠지지 말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63066
- 문경시민신문, 주흘산 중턱 성불사의 사리탑 및 부도탑 제막식 법회 개최http://www.mgnews.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239&idx=50409
- 문경타임즈, 문경 성불사, `사리탑 및 부도탑 제막식 법회` 행사 개최 http://www.mgtime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357&idx=214794
- 시사문경, 주흘산이 품은 숨은 도량 “성불사” http://www.sisamg.com/home/news.asp?id=1367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혜소(慧沼)스님 | 본항목 | 혜소스님(慧沼, 1931~2015) | 慧沼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소스님(慧沼,_1931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혜소스님(慧沼) | 수정문중(水晶) | ~의 일원이다 | |
혜소스님(慧沼) | 혜륭스님(慧隆) | ~의 수계제자이다 | |
혜소스님(慧沼) | 대승사 윤필암 | ~에서 출가하다 | |
혜소스님(慧沼) | 일우스님(一愚)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혜소스님(慧沼)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혜소스님(慧沼) | 문경 성불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혜소스님(慧沼) | 문경 성불사 | ~을(를) 창건하다 |
❁ 한국 비구니 인명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로 가기
지도
- 성불사(성불암)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리 산19-4
주석
- ↑ 『한국의 비구니 문중』에는 해소(解笑)스님으로 되어 있음(출처: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07.)
다른 비구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