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성타스님(性陀, 1934生, 비구니)

biguni
Ehjkkims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6일 (토) 05:40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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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성타(性陀)스님은 출가 11년째 되던 해에 소지공양(燒指供養)을 할 정도로 구도에 대한 열정이 높았으며, 선덕여왕의 원찰인 부인사 토지 환원 및 복원에 열정을 보여주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4 대구 출생
1947 충북 법주사에서 경담(鏡潭)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8 법주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8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9 김용사에서 수선 안거 이래 25 하안거 성만
1974~1981 8년간 4, 5대 종회의원 역임
1982~1985 석남사 3년 결사
1984 경북 영천 영지사 주지
1984~1986 경상북도 비구니회 지부장
1986~2004 대구 부인사 주지
1993~1995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14, 15, 16, 특 1, 2회 존증아사리)
1996~1997 단일계단 수계산림 비구니 니갈마 아사리
2002~2004 법기문중 회장
2021 부인사 회주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계제자 탄형(呑炯)·종진(悰晋)·청호(靑昊)·종원(宗圓)·청원(靑圓)

활동 및 공헌

출가

서현(西現) 성타(性陀)스님은 1934년 대구시 도학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곡산이고, 이름은 연제한이다. 스님은 1947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충북 법주사에서 경담(鏡潭)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그 후 법주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소지 공양

성타스님은 평생을 수행에만 몰두하겠다는 의지로 출가 11년째 되던 해에 오른손 검지와 중지 두 마디에 향유를 바르고 소지공양(燒指供養)을 했다. “소지공양을 올리면 육체로 인해 생기는 번뇌를 끊을 수 있고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반 4명과 함께 연비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님은 부처님 법만 보고 들으며 살아왔다. 그동안 타 들어가는 손가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스님은 그런 물음에 묵묵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타스님이 수행하던 시절은 6·25전쟁, 불교정화운동 등 불교계 안팎으로 변화가 많던 격동의 시대였다. 먹을 것이 없어서 매일 탁발로 끼니를 이어갔으며, 선방에 들어갈 때도 안거 동안 자신이 먹을 양식을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등 수행자로 살아가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향한 마음만은 매우 간절하여 생활의 고단함을 이기고도 남았다.

성타스님이 태백산 각화사 인근 암자에서 토굴 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이다. “그때는 매일 화두를 들었는데, 허리를 땅에 대지 않아도 정말로 피곤하지 않았어요. 가끔 밖에 나가려고 고무신에 발을 넣어보면 따뜻했지요. 그러면 다시 선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어요. 환희심이 절로 났지요. 신이 나서 미친 듯이 화두 참구를 한 것 같아요.”

부인사 소유 토지 환원 불사

[선덕여왕 숭모재(2013년)] 사진출처: [사진]봉은불자 다음 카페https://cafe.daum.net/domunsrory/Y1ZK/171?q=%EC%84%A0%EB%8D%95%EC%97%AC%EC%99%95+%EC%88%AD%EB%AA%A8%EC%A0%9C&re=1

1986년 성타스님은 의현스님께 “경상남도에는 비구니 선방이 3개 밖에 없습니다. 저는 비구니 선방을 여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의현스님은 “삼년 결사를 마치면 나와서 동화사 말사를 둘러보고, 마음에 들면 때에 따라서 주겠다.” 라는 약속을 하셨다.

결사를 마친 스님은 마땅한 사찰을 찾아 나섰다. “나는 그때 차도 없이 버스를 타고 걸어 다녔는데, 자그마치 15군데를 돌아보았어요. 비구니 처소는 산중에 있으면서도 평탄하고 교통도 괜찮은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은 차가 들어오지만 그때는 참 힘들었어요.”

스님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에 대가람을 세우는 불사를 시작했다. 우선 되찾을 수 있는 땅은 되찾고, 사야 할 땅은 따로 매입해야 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내 수중에 있는 거라고는 6~7만 원뿐이었는데, 불사를 다 해놓고 따져보니 50억이 넘게 들었어요. 나는 불사한다면서 구구하게 신도 집을 찾아다니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원을 세웠고, 나는 스스로 그 약속을 지켰지요. 나는 지금까지 큰 신도가 없었어요. 불사 때문에 특별히 신도들한테 신경 쓴다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았던 거지요. 그래도 내가 복이 많고 덕이 많았으면 큰 신도들이 찾아왔을텐데, 다 내가 부족해서 20년 주지 생활하면서 이것밖에 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 대신 지난 20 년간 나는 하루 사분 정근을 빠진 적이 없고, 한 시간도 늦은 적이 없어요. 덕도 부족하고 큰 신도도 없이 이만큼이라도 불사를 이룬 것은 모두 기도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부인사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사찰 부지를 포도밭 등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되찾은 땅은 3,000평 정도이고, 새로 매입한 땅도 3,000평 가량 된다. 재판을 하지 않고 등기한 땅이 300평 정도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재판을 통해 되찾았다. 스님은 종교 용지로 2필지를 묶어 총 7,000평의 땅을 사찰부지로 등록했다.

부인사 선덕여왕 숭모재

매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신라 27대 선덕여왕을 기리는 불교행사인 ‘부인사 선덕여왕 숭모재’가 매년 3월 보름에 부인사 경내 숭모전에서 개최되는데, 성타스님이 1987년 음력 3월15일을 시작으로 이 행사를 부활했다. 부인사는 7세기 중반 경 신라 27대 선덕여왕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유력한 사찰로, 숭모전에서 매년 3월 보름 열리는 ‘숭모재(崇慕齋)’를 통해 신라 선덕여왕을 100여 년 동안 기려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왕에 제사를 올리는 유일한 행사로 민속학 관련 학자들로부터 민속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행사로 평가받고 있다.

성타스님의 오도송(悟道頌)

평생 정진만 해온 스님은 토굴 정진을 하던 어느 눈 내린 아침에 자연 풍경을 바라보다가 불쑥 오도송이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큰스님께 점검 받지 않아서 오도송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부인하며, 오히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말씀만 거듭했다.

지난밤 검은 구름 달빛을 세우더니
안개에 쌓인 나무 가지마다 눈꽃일세.
토굴방 혼자 앉아 의구심 바로 보니
고요한 이 내 마음 산천을 감싸더라.

성타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탄형(呑炯)·종진(悰晋)·청호(靑昊)·종원(宗圓)·청원(靑圓) 스님 등이 있다.

대구 부인사]

[부인사전경]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goddragon1/222762528795

대구의 팔공산(八公山) 남쪽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부인사(符仁寺)는 이 지역의 대표적 명찰 가운데 하나이다. 행정구역상 소재지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355번지이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로 속해 있다.

창건 이후 고려 말까지의 부인사 연혁은 자세히 전하는 내용이 없다. 다만 고려 말의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부인사는 오랫동안 거찰의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39개의 부속암자를 관장하였고 2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였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부터 문종 때까지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고려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을 판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판각은 몽골의 칩입으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1,715판도 일본 교토[京都] 난젠사[南禪寺]에 보관되어 있다. 몽골 칩입 이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탔다.

지금 건물은 1930년대 초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원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 거리에 있는 암자터에 중창한 것이다. 당우에는 석가모니불상과 아미타불상,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한 대웅전과 선덕묘, 2동의 요사채가 있다.

부인사 승도란(僧徒亂) : 무신집권에 대한 반란

고려 후기인 1203년(고려 신종 6) 무렵에 이르러 부인사에서는 큰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 보통 "부인사 승도란(僧徒亂)"으로 부르는 사건인데, 이 사건은 부인사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최씨 무신정권에 반발한 반란이었다. 이미 1202년에도 운문사와 부인사·동화사 등의 승려들이 연합하여 경상북도 영천(永川)의 관아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1203년의 부인사 승도란은 그 전 해에 있었던 영천 공격 사건과 연계되는 난이었다.

무신집권기에 지방 사원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되는데, 부인사 승려들이 일으킨 이 난은 경상북도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발생한 난과 함께 규모가 컸던 승려란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 승려와 지방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반란 사건은 고려 후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일반 정치사 분야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다음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X317499)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성타(性陀)스님 본항목 성타스님(性陀, 1934~) 性陀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타스님(性陀,_193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성타(性陀)스님 법기(法起)문중 ~의 일원이다
성타(性陀)스님 경담(鏡潭)스님 ~의 제자이다
성타(性陀)스님 법주사 ~에서 출가하다
성타(性陀)스님 자운(慈雲)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성타(性陀)스님 자운(慈雲)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성타(性陀)스님 부인사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성타(性陀)스님 부인사 ~을 중창하다

지도

  • 부인사(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356-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