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효성스님(曉惺, 1927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4월 12일 (금) 06:15 판 (릴레이션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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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효성(曉惺)스님은 장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했고 해인사 약수암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한국의 비구니의 문중에서는 태성(泰性)으로 나온다. 이 책에는 효성이란 이름은 없고 태성의 제자가 금봉・일묵・대우・종근・대효로 나와 제자가 일치한다. 은사인 장일스님의 수행담록에도 태성으로 나고 효성이란 법명은 없다.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460~469.)

생애

연도 내용
1927 충북 음성 출생
1957 해인사 약수암에서 장일(長一)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1 해인사에서 종수(宗壽)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김룡사 별좌 소임, 석남사 큰방 소임
191964~1967 동화사 내원암 중창 불사
1966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9 영덕 토굴에서 1년간 기도정진
1974 약수암 죽림선원 안거 성만
1975~1978 약수암 소임 중 법당 중수, 요사채 중수, 담장 등 불사
2004 해인사 약수암 주석
문중 청해(靑海)문중
생활신조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고 시은(施恩)을 두려워하자
수계제자 금봉・일묵・대우・종근・대효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37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38

효성(曉惺)스님은 1927년 10월 30일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서 아버지 반호준과 어머니 연복순 사이의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반채월이다.

성장하면서 병고가 심하여 강원도 태백산에 요양을 갔다가 한 스님으로부터 해인사로 가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약수암 장일스님을 찾아 은사가 되어 주시길 청하여 1957년 출가하였다. 몸이 허약하여 스님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에 먼저 복을 짓기로 마음을 정하고 공양주[1]를 4년 동안이나 살면서 무량공덕을 지으려고 발원하였다. 그 뒤 1961년 종수스님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사미니계를 받았다.

수행

그 후 은사스님을 따라 김룡사로 가서 별좌[2], 채공[3] 등 어려운 소임을 마다 않고 결제를 났으며, 언양 석남사에서는 큰방에 앉는 틈틈이 종두[4], 별좌 등 하소임을 살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중스님들을 공 경하며 정성을 다하였다.

동화사 내원암에서 중창 불사를 하면서 3년을 지낸 효성스님은 1966년 해인사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한 후 영덕 토굴에서 1년간 기도 정진을 하였다. 기도를 마친 뒤에는 여러 회상을 다니면서 안거를 났다.

약수암 주석

1975년 약수암 원주[5] 소임을 살면서 법당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담장 불사 등 많은 불사 정진을 하였다.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5세 때 벌써 천자문을 외웠으며 한 번 배운 것은 잊지 않을 만큼 기억력이 좋았다. 출가 후에는 겉으로 드러내는 겉살림보다는 언제나 조용히 마음으로 성찰하고, 참다운 수행자로서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하여 대중 생활을 하였다.

평생 허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정진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으며 젊어서는 하루에 절을 천배씩 하였고, 연로해서는 당뇨 등 지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백팔배를 거르지 않는 것을 수행 신조로 삼고 있다.

효성스님은 입적하는 날까지 다른 이의 신세를 지지 않기로 원을 세웠다. 시봉들에게도 일체의 수발을 시키지 않고 손수 하며 그 시간에 오히려 공부하기를 당부한다. ‘다른 이의 신세를 지지 않고 시주의 은혜를 두려워하라.'는 생활신조에 따라 시은을 두려워하여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이라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으며, 참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4년 해인사 약수암에 주석하는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금봉·일묵·대우·종근·대효 스님 등이 있다.

해인사 약수암

[약수암 전경] 사진출처: 다음카페https://cafe.daum.net/jungyulmodusa/FGRT/1336?q=%ED%95%B4%EC%9D%B8%EC%82%AC+%EC%95%BD%EC%88%98%EC%95%94&re=1

성주스님이 지리산 천은사 도계암에서 수행하다가 1903년 가야산 남쪽 계곡의 마르지 않는 샘을 발견하고 이곳에 가람을 창건하니 지모암이다. 덕망이 높았던 성주는 이후 지모암의 명칭을 약수암으로 바꾸고 많은 후계승들을 배출했는데, 청해문중 일파로서 번성을 이룬 것과 약수암이 종문의 본찰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로부터 연유한다.

청해문중 태동 당시 고문으로 추대된 보현(普賢)·학련(鶴蓮)·태구(茶具)와 문중태동의 주역인 묘관(妙觀)·용운(龍雲)등이 모두 이 계열에 속한다.

약수암은 성주의 네 번째 상좌 도삼(道三)이 1927년 1차 중건했으며 두 번째 상좌 의영(義)의 증손인 법공이 1969년 중창하고 [1]을 개설해 비구니 납자들로 하여금 수선정진할 수 있도록 도량을 일신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출처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27~128.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536~538.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79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2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효성(曉惺)스님 본항목 효성스님(曉惺, 1927~) 曉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효성스님(曉惺,_192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효성(曉惺)스님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효성(曉惺)스님 장일스님(長一) ~의 수계제자이다
효성(曉惺)스님 해인사 약수암 ~에서 출가하다
효성(曉惺)스님 종수스님(宗壽)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효성(曉惺)스님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효성(曉惺)스님 동화사 내원암 ~을(를) 중창하다
효성(曉惺)스님 해인사 약수암 ~을(를) 중창하다
효성(曉惺)스님 안거 ~을(를) 성만하다 합천 해인사 약수암 죽림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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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주석

  1. 후원(부엌)에서 밥을 짓는 소임
  2. 음식 · 방석 · 이부자리 등을 담당하는 소임
  3. 반찬을 만드는 소임
  4. 종을 치는 소임
  5.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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