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상근스님(祥根, 1872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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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경기경성동부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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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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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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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당(印月堂) 상근(祥根)스님은 1872년(고종9년) 9월 6일 한성부 동부 이교동(지금의 종로 4가)에서 아버지남양 홍씨 홍영일(洪英日), 어머니 충주 김씨의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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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근스님이 10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청룡사에서 계흔(桂肵)스님의 상좌로 출가를 하여 법명을 창수(昌洙)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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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언니 되는 금전(錦典)이 어머니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를 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883년 9월 24일 상근스님 역시 어머니를 은사 스님으로 모시고 출가를 하였다. 세모녀가 함께 스님과 상좌간이 된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그 때 스님의 나이 1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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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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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 뒤 개운사 극락암에서 초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1894년 23세에 처음으로 당시 참선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금강산 영원암 선방에 입방하여 안거를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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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몇 해에 이르는 동안 금강산 유점사 반야암을 비롯해 백련암(현재는 소실되고 없음), 홍성암, 신계사 법기암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을 거듭하고 청룡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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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42세 되던 해인 1913년 4월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유연봉(尹靈峯)율사(律師) 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았다. 이듬해 2월 유점사에서 중덕법계를 품수 받고, 금강산 보은암에 주석하고 있던 임석두스님으로부터 ‘인월당’이란 당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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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천성이 영민하고 체격이 건장하였으며 마음이 활달하고 기개가 헌양하여 대의(大義)에 살고 소절(小節)에 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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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듣고 보는 것은 모르는 것이 없고 불전의 법요의식(法要儀式)과 각단(各壇)의 예경승사(禮敬承事)는 말할 것도 없고 어려운 범패(梵唄)에 이르기까지 남달리 뛰어난 소질을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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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심이 견고하고 공익심이 투철하여 가람수호와 빈병(貧病) 구제에 솔선수범하였고, 항상 검박한 생활을 하였으며 불법(佛法)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고 기쁘게 보시(布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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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동안 저축한 적지 않은 재산을 만년에 아낌없이 여러 사원에 희사 헌납한 것을 미루어 보더라도 그 활달하고 물욕이 없는 성품을 알 수 있으며, 정중하고 치밀하여 매사에 소홀히 하거나 불성실한 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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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는 40세 되던 해 몇몇 상좌들을 데리고 금강산 장안사 관음암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였다. 1918년 청룡사에 와서 즉시 대불사(大佛事)를 시작하여 가람을 증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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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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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평소에 남달리 애국심이 강했던 스님은 직접 전위에 서서 투쟁하지는 못해도 물심양면으로 애국지사들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고 격려했다. 민족 대표의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인 한용운, 백용성 두 분 스님을 위시하여 백초월, 이종욱, 신상완 등 여러 스님의 뒤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꾸준히 숨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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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당 상근스님은 격동의 이조 말엽에 태어나 변화무쌍한 사회적 상황에서 갖가지로 다양한 체험을 하여 종교관과 사회관 및 생활 철학관이 누구보다도 뚜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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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으로부터 8·15 6·25전쟁 등의 희비 쌍주도 목격한 스님의 팔십 평생은 고난과 수난의 역경 속에 불굴의 의지로 살아온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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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되던 해 상근스님을 은사로 정하고 출가하여 스님의 자애 넘치는 사랑과 금강산의 신비와 경건한 교훈 속에서 어린 시절을 충만하게 보낸 윤호(輪浩)은 평생 지극한 효성으로 은사스님을 봉양하여 후대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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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찰에 재산 헌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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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근스님이 논 323석분과 10석이 넘는 밭을 9개 사찰에 고루 나누어 바칠 뜻을 비추자 모시고 있던 윤호(輪浩)스님께서 선뜻 “스님 좋으신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제 복대로 살 것이 아닙니까.”하고 조금도 서운함 없이 흔연히 은사스님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두 스님 모두 참으로 뛰어난 수도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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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스님이 재산을 헌납한 사찰은 금강산의 마하연사, 장안사, 표훈사, 신계사를 비롯해 수원 용주사, 예산 정혜사, 서울 개운사와 청룡사, 오대산 월정사 등 모두 9개 사찰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지금도 개운사에는 스님의 대 공덕비가 우뚝 서 있다. 스님의 보살 희사정신은 오늘날은 물론 앞으로 세세생생 영원이 빛이 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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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전력(專心專力)을 다해 사찰을 수호하고 불법(佛法)을 밝혀온 스님은 보살 화현(菩薩 化現)과 같은 분으로서 후대에게 행여 미약해지기 쉬운 신심(信心)을 견고히 다지는 좋은 교훈(敎訓)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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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로는 맏상좌 윤호(輪浩)스님을 비롯한 ·대용(大用)·보현(普賢)·보성(寶成)·보완(寶玩)·만성(滿性)·윤여(輪如)등을 두셨으나, 모두 고인이 되었다. 손상좌인 청룡사 주지 윤호(輪浩)스님 계의 진우(眞愚)스님과 진홍(眞弘)스님을 비롯해 진문(眞門)·진경(眞鏡)·진적(眞寂)·진공(眞空)스님과 보현(普賢)스님 계 경선(鏡先), 그리고 보성(寶成)스님 계의 응명(應明)스님, 도준(道準)스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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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에 있는 상근스님 공덕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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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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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靑龍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현재 숭인동)에 위치한 절로,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의 유언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사찰은 한양의 외청룡 산등성이에 지어져서 ‘청룡사’라 불렸지만, 그 건립 연혁에 관해서는 정확히 전해지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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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세 주지로 혜원(慧圓)이 절을 맡은 이래로, 줄곧 비구니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예로 조선 건국 이후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이 절에 있었다거나, 1차 왕자의 난 뒤에는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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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때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곳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았다고도 한다. 영조대의 이 기록들은 모두 정업원(淨業院)과 관련한 내용으로 청룡사의 전신을 정업원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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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의 존치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서이다. 청룡사에는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석지장삼존상 및 시왕상일괄(보물 제1821호)이 있는데, 이를 통해 청룡사의 정확한 존치 시기를 조선 중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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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물 외에도 1868년(고종 5)에 제작되어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칠성도(七星圖), 현왕도(現王圖)가 있으며, 1898년(광무 2)에 제작된 감로도(甘露圖), 1902년에 제작된 신중도(神衆圖), 가사도(袈裟圖), 석조삼불상(石造三佛像)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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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동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청룡사는 대부분의 전각이 최근에 새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각 배치는 조선 중기 사찰의 전형적인 구성인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의 배치이다. 산지중정형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후면에 중심 불전을, 좌우에 승려들이 기거하거나 대중을 받는 요사(寮舍)를, 전면에 사찰로 진입하는 입구가 되면서 법회 등을 여는 우화루(雨花樓)를 배치하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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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는 우화루 우측에 다포형식의 일주문(一柱門)을 두어 사찰 안으로 진입하도록 했지만,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주보는 곳에 우화루를 두고, 좌우에 심검당과 명부전을 배치하여 조선 중기 산지사찰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대웅전 뒤쪽 약간 높은 곳에 산신을 모신 산령각을 둔 것은 다른 사찰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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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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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 사진출처 : 쉼, 여행, 템플스테이(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search/%EC%B2%AD%EB%A3%A1%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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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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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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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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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22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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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서울청룡사에서창수(昌守)스님을은사로출가  
 
|1883||서울청룡사에서창수(昌守)스님을은사로출가  

2022년 6월 28일 (화) 10:04 판



정의

인월(印月) 상근(祥根)스님은 금강산 신계사를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수행하였으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경력

연도 내용
1872 경기경성동부출생

활동 및 공헌

출가

인월당(印月堂) 상근(祥根)스님은 1872년(고종9년) 9월 6일 한성부 동부 이교동(지금의 종로 4가)에서 아버지남양 홍씨 홍영일(洪英日), 어머니 충주 김씨의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상근스님이 10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청룡사에서 계흔(桂肵)스님의 상좌로 출가를 하여 법명을 창수(昌洙)라고 하였다. 그 해 여름 언니 되는 금전(錦典)이 어머니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를 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883년 9월 24일 상근스님 역시 어머니를 은사 스님으로 모시고 출가를 하였다. 세모녀가 함께 스님과 상좌간이 된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그 때 스님의 나이 12세였다.

수행

그로부터 1년 뒤 개운사 극락암에서 초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1894년 23세에 처음으로 당시 참선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금강산 영원암 선방에 입방하여 안거를 났다. 뒤이어 몇 해에 이르는 동안 금강산 유점사 반야암을 비롯해 백련암(현재는 소실되고 없음), 홍성암, 신계사 법기암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을 거듭하고 청룡사로 돌아왔다. 스님은 42세 되던 해인 1913년 4월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유연봉(尹靈峯)율사(律師) 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았다. 이듬해 2월 유점사에서 중덕법계를 품수 받고, 금강산 보은암에 주석하고 있던 임석두스님으로부터 ‘인월당’이란 당호를 받았다. 스님은 천성이 영민하고 체격이 건장하였으며 마음이 활달하고 기개가 헌양하여 대의(大義)에 살고 소절(小節)에 굴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듣고 보는 것은 모르는 것이 없고 불전의 법요의식(法要儀式)과 각단(各壇)의 예경승사(禮敬承事)는 말할 것도 없고 어려운 범패(梵唄)에 이르기까지 남달리 뛰어난 소질을 발휘하였다. 또한 신심이 견고하고 공익심이 투철하여 가람수호와 빈병(貧病) 구제에 솔선수범하였고, 항상 검박한 생활을 하였으며 불법(佛法)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고 기쁘게 보시(布施)하였다. 일생 동안 저축한 적지 않은 재산을 만년에 아낌없이 여러 사원에 희사 헌납한 것을 미루어 보더라도 그 활달하고 물욕이 없는 성품을 알 수 있으며, 정중하고 치밀하여 매사에 소홀히 하거나 불성실한 점이 없었다. 스님께서는 40세 되던 해 몇몇 상좌들을 데리고 금강산 장안사 관음암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였다. 1918년 청룡사에 와서 즉시 대불사(大佛事)를 시작하여 가람을 증축하였다.

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평소에 남달리 애국심이 강했던 스님은 직접 전위에 서서 투쟁하지는 못해도 물심양면으로 애국지사들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고 격려했다. 민족 대표의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인 한용운, 백용성 두 분 스님을 위시하여 백초월, 이종욱, 신상완 등 여러 스님의 뒤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꾸준히 숨은 역할을 했다.



인월당 상근스님은 격동의 이조 말엽에 태어나 변화무쌍한 사회적 상황에서 갖가지로 다양한 체험을 하여 종교관과 사회관 및 생활 철학관이 누구보다도 뚜렷하였다.

임오군란으로부터 8·15 6·25전쟁 등의 희비 쌍주도 목격한 스님의 팔십 평생은 고난과 수난의 역경 속에 불굴의 의지로 살아온 일생이었다.

다섯 살 되던 해 상근스님을 은사로 정하고 출가하여 스님의 자애 넘치는 사랑과 금강산의 신비와 경건한 교훈 속에서 어린 시절을 충만하게 보낸 윤호(輪浩)은 평생 지극한 효성으로 은사스님을 봉양하여 후대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각 사찰에 재산 헌납

상근스님이 논 323석분과 10석이 넘는 밭을 9개 사찰에 고루 나누어 바칠 뜻을 비추자 모시고 있던 윤호(輪浩)스님께서 선뜻 “스님 좋으신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제 복대로 살 것이 아닙니까.”하고 조금도 서운함 없이 흔연히 은사스님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두 스님 모두 참으로 뛰어난 수도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행적이다.

이때 스님이 재산을 헌납한 사찰은 금강산의 마하연사, 장안사, 표훈사, 신계사를 비롯해 수원 용주사, 예산 정혜사, 서울 개운사와 청룡사, 오대산 월정사 등 모두 9개 사찰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지금도 개운사에는 스님의 대 공덕비가 우뚝 서 있다. 스님의 보살 희사정신은 오늘날은 물론 앞으로 세세생생 영원이 빛이 더 할 것이다.
전심전력(專心專力)을 다해 사찰을 수호하고 불법(佛法)을 밝혀온 스님은 보살 화현(菩薩 化現)과 같은 분으로서 후대에게 행여 미약해지기 쉬운 신심(信心)을 견고히 다지는 좋은 교훈(敎訓)을 남겨주었다.


수계제자로는 맏상좌 윤호(輪浩)스님을 비롯한 ·대용(大用)·보현(普賢)·보성(寶成)·보완(寶玩)·만성(滿性)·윤여(輪如)등을 두셨으나, 모두 고인이 되었다. 손상좌인 청룡사 주지 윤호(輪浩)스님 계의 진우(眞愚)스님과 진홍(眞弘)스님을 비롯해 진문(眞門)·진경(眞鏡)·진적(眞寂)·진공(眞空)스님과 보현(普賢)스님 계 경선(鏡先), 그리고 보성(寶成)스님 계의 응명(應明)스님, 도준(道準)스님이 있다.



[개운사에 있는 상근스님 공덕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63 4. 청룡사


청룡사(靑龍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현재 숭인동)에 위치한 절로, 고려 태조 때 도선국사의 유언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사찰은 한양의 외청룡 산등성이에 지어져서 ‘청룡사’라 불렸지만, 그 건립 연혁에 관해서는 정확히 전해지는 것이 없다.
제1세 주지로 혜원(慧圓)이 절을 맡은 이래로, 줄곧 비구니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예로 조선 건국 이후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이 절에 있었다거나, 1차 왕자의 난 뒤에는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세조 때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곳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았다고도 한다. 영조대의 이 기록들은 모두 정업원(淨業院)과 관련한 내용으로 청룡사의 전신을 정업원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남긴다.
청룡사의 존치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서이다. 청룡사에는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석지장삼존상 및 시왕상일괄(보물 제1821호)이 있는데, 이를 통해 청룡사의 정확한 존치 시기를 조선 중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보물 외에도 1868년(고종 5)에 제작되어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칠성도(七星圖), 현왕도(現王圖)가 있으며, 1898년(광무 2)에 제작된 감로도(甘露圖), 1902년에 제작된 신중도(神衆圖), 가사도(袈裟圖), 석조삼불상(石造三佛像)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숭인동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청룡사는 대부분의 전각이 최근에 새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각 배치는 조선 중기 사찰의 전형적인 구성인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의 배치이다. 산지중정형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후면에 중심 불전을, 좌우에 승려들이 기거하거나 대중을 받는 요사(寮舍)를, 전면에 사찰로 진입하는 입구가 되면서 법회 등을 여는 우화루(雨花樓)를 배치하는 형식이다.
청룡사는 우화루 우측에 다포형식의 일주문(一柱門)을 두어 사찰 안으로 진입하도록 했지만,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주보는 곳에 우화루를 두고, 좌우에 심검당과 명부전을 배치하여 조선 중기 산지사찰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대웅전 뒤쪽 약간 높은 곳에 산신을 모신 산령각을 둔 것은 다른 사찰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4132



[청룡사] * 사진출처 : 쉼, 여행, 템플스테이(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search/%EC%B2%AD%EB%A3%A1%EC%82%AC)



5. 참고문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60~64.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28.

하춘생. 『깨달음의 꽃1(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1998, p 224~234.

1883 서울청룡사에서창수(昌守)스님을은사로출가
1886 개운사극락암에서초암(初庵)스님을계사로사미니계수지
1894~1909 금강산 영원암, 유점사 반야암, 백련암, 홍성암, 신계사 법기암 등에서 안거
1909 서울 청룡사 주지 취임
1911~1918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행 정진
1913 금강산 유점사에서 영봉(靈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14 유점사에서 중덕품계 품수, 석두스님으로부터 당호 ‘인월당’ 하사 받음
1918 청룡사 주지 역임, 독립운동자금 지원
1925 서울 개운사, 금강산 마하연, 금강산 장안사, 금강산 표훈사, 금강산 신계사, 수원 용주사, 예산 정혜사, 서울 청룡사, 오대산 월정사 등 각 사찰 재산헌납 (논 323석(石) [1] 이상, 밭 10석(石) 이상)
1951 입적(1951.5.21.세수80세,법랍66세)

기타사항

문 중 청룡(靑龍)
수계제자 윤호(輪浩)·대용(大用)·보현(普賢)·보성(寶成)·보완(寶玩)·만성(滿性)·윤여(輪如)
  1. 석(石) 토지의 수확량을 나타내는 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