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졸스님(百拙, 193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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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6일 (수) 13:03 판
백졸(百拙)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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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백졸(百拙) |
법호 | 등한(等閑) |
속명 | 이옥자 |
출생 | 1936년 |
출가 | 1956년 |
입적 | |
사찰 | 옥천사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 1123-5)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백졸(百拙)스님은 인홍스님의 상좌로 석남사에서 출가하였으며 부산 옥천사를 창건한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36 | 부산 중구 출생 |
1956 | 부산사범학교 졸업 |
1956 | 석남사에서 인홍(仁弘)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6~1981 | 해인사 국일암, 삼선암, 문경 김룡사, 청량사, 홍제암, 성불암, 대성암, 윤필암, 묘적암, 진주 대원사, 남해 용문사, 내원사, 석남사 등 안거 성만 |
1959 |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81 | 부산 옥천사 창건, 옥천사 중창불사 |
2005 | 옥천사 주지 |
문중 | 법기(法起)문중 |
수행지침 | 以戒爲師 |
생활신조 | 시간 지키기 |
저서 및 작품 | 住行月報.....玉泉 |
수계제자 | 법열(法悅)・현명(玄明)・도관(道觀)・현소(玄昭)・정혜(淨慧)・공초(空超)・천륜(千輪)・천안(千眼)・정원(淨圓)・정행(淨行)・등원(登元) |
활동 및 공헌
출생
등한(等閑) 백졸(百拙) 스님은 1936년(병자년) 부산시 중구 중앙동에서 아버지 현광(玄光) 이용수와 어머니 대법선(大法船) 최봉순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며, 이름은 이옥자이시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일상에 모범적이었다.
성철 큰스님과의 만남
다음은 인생의 활로를 열어주신 성철 큰스님과의 첫 인연 이야기이다. 1956년 부산사범학교(현재 부산교대)에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는 교생실습 기간이었는데, 어머니와 이모님(대혜심)이 매일 오후만 되면 분주하게 어디로 가시는 것이었다. 스님은 몹시 궁금하여 어디 가시느냐고 여쭈었으나 두 분께서는 “니가 따라올 곳이 아니다.”하시며 곧장 가버리셨다.
이에 스님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 결국 어머니와 이모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는데 이모님은 “굉장히 무서운 큰스님이 계시니 뵙자마자 3배를 올려라.”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큰방에 들어가니 40~50여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자 이모님이 큰스님께 “저 애는 세상에 대해 의심을 많이 품고 사는데, 큰스님께서 좋은 법문을 들려주십시오.”하고 청을 올렸다. 큰스님께서는 이미 불연을 알아보셨는지 어머님을 향해 “내가 법문하면 니 딸 하나 빼앗길 텐데......” 하셨다. 그러나 당시 아무도 그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스님은 꿈이 많았다. 의사가 되어 자선사업도 하고 싶고, 사범대를 다니고 있으니 페스탈로치와 같은 선생님도 되고 싶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 속에서 스님은 늘 마음의 갈등이 많았다.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일까?’ ‘다양한 인생행로에서 내가 가야할 길은 과연 무엇인가?’ 고민이 가득했던 스님은 큰스님을 뵌 순간 망설임 없이 여쭈었다. “스님, 인생행로가 많은데 왜 스님이 되셨으며 스님이 되어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온 대중이 궁금해하면서도 감히 여쭙지 못한 것을 의기 발랄하고 거침없는 나이 어린 학생이 당돌하게 묻자 대중은 사뭇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큰스님께서는 “별 가시나 다 봤네. 니 영혼이 있다 생각하나? 없다 생각하나?”하며 오히려 반문하셨다. 이에 백졸스님은 “있다고 할 자신도 없고, 없다고 하기에는 증명할 상식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다시 큰스님께서 질문하셨다. “등가원리 아나?” “예 배웠습니다.” 스님은 엉겁결에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실은 교과서에서 공식만 배웠지 어떤 원리로 전개되는지는 잘 몰랐다. “그래, 그럼 에너지가 질량이 되고 질량이 에너지 되는 거 아나? 그리고 원자폭탄이 되는 거 아나?” 죄는 듯한 질문이 연속되자 스님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스님의 이런 속내는 아랑곳없이 큰스님은 등가원리, 색즉시공, 불생불멸로 법문을 펼쳐 나가셨다.
백졸스님은 큰스님을 뵙기 전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늘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가르치는 이론들이 저 순진한 아이들에게 과연 행복의 열쇠가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배운 학문이 삶을 사는데 황금 열쇠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큰스님을 친견한 이후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유난히 빛나던 큰스님의 눈빛이 떠올랐다. 큰스님을 친견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스님은 가르침에 깊이 빠져 들어가 스님은 이윽고 ‘나도 성불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결심이 선 후 큰스님을 친견하고는 여쭈었다. “성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등록금을 내라.” “그럼 등록금을 내겠습니다.” 백졸스님의 대답에 큰스님은 “한국 은행권 가지고는 안 돼.”라고 답하셨다.
그러던 중 큰스님께서 떠나실 때가 되었다. “스님,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니는 가시나라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스님, 그럼 성전환 수술하면 갈 수 있습니까?” “그럼 되지!” 큰스님은 이 말씀만 남기신 채 파계사 성전암으로 떠나셨다.
그리고 스님은 일상으로 돌아와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주, 마산에서 큰스님을 친견하는 학생들이 있어 겨울방학 때 그들과 같이 성전암에 가게 되었다. 큰스님을 뵙고 난 후 화두를 타고 싶은 욕심에 “절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허락을 구하였다. 안 된다는 큰스님을 쫓아다니기를 4시간, 결국 허락이 떨어져 절을 시작하였으나 한 번도 제대로 절해 본 적이 없는 스님은 고성염불을 하기 시작했고, 천칠배하고 나서는 도저히 더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삼천 배에서 한 번이라도 모자라면 다시 해야 한다는데....’ 스님은 도저히 중단하기는 싫었다. 어떻게 해야 되나 궁리하던 중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앉아서 절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지!’ 이후 천삼백배는 앉은 상태에서 하였다. 겨우 삼천배를 마치고 큰스님을 뵈러 가니 “누워서 하지 왜 앉아서 했어? 부산 가시나. 니, 낙제다. 꼬리표 달아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스님은 ‘인간 폭탄이 되려는 내가 삼천배도 못해서야 되겠는가?’라는 생각에 매일 백팔배를 하는 동시에 능엄주를 시작하였다. 그 때 성전암에서의 교재는 『선문염송』이었다. 당시는 인쇄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지금과는 비교될 수 없이 열악한 상태라 능엄주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보따리장사 다니는 어떤 할머니께 구전으로 받아 적은 것으로 공부하셨다. 그 할머니도 자신의 손자들에게 과자를 사 주거나 용돈을 주며 읽어달라고 해서 그걸 듣고 외웠다고 한다. 이후로도 스스로 계획을 세워 능엄주 108독을 하였다. 기도를 하는 시간 중에 어떤 친구가 찾아와도 기도가 끝날 때까지는 꼼짝하지 않았다. 성불을 향한 구도의 열정은 갈수록 높아졌다.
그 후 스님은 다시 삼천배를 하셨고 비로소 화두를 받을 수 있었다. 백졸스님은 ‘화두를 깨치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으나 화두를 놓치면 살아도 송장과 같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수선 정진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큰스님의 가르침은 훗날 스님의 출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출가
스님은 화두를 깨쳐 성불하겠다는 결심을 세운 뒤, 부모님께 일주일 동안 여행 다녀온다는 허락을 얻어 집을 나갔고, 그것이 그대로 출가의 길로 이어졌다. 스님은 큰방 어간에 가방을 놓고 좌선을 하였는데, 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절집 문외한이었다. 스님은 그저 화두에만 몰두하였다. 당시 다른 스님들은 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하러 온 학생으로 생각하기엔 어정쩡한 신분이기에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긴 것 같았다.
처음 목표와는 달리 순식간에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화두 타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편지를 보내어 조금 더 공부하겠다며 지내다 보니 이럭저럭 석 달이 지나가고 말았다. 스님은 인생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될 것 같았다. 당시 스님에게 출가를 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스님은 대중스님들의 규칙적인 생활, 밤늦게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엄격한 규칙이 존재하는 일과를 보고 가족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가려는 마음에 태백산으로 갔다. 마을에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스님들처럼 저렇게 일생을 잘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자 절집 생활이 공부하기에 유리하다는 판단한 것이다.
당시 홍제사에는 인홍스님(은사스님)을 비롯한 인성, 성우, 철마, 혜춘, 길상, 법희, 향림, 지정, 혜근스님 등 30여분이 계셨다, 그 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었다. 밤이면 대중 스님들은 촛불을 가운데 놓고 두 사람씩 마주 앉아서 주장자를 하나씩 들고 서로 탁마하면서 신나게 정진하였다. 그 때 인홍스님께서는 50세를 넘기지 않고 일대사를 마치리라는 비상한 각오로 불같은 정진을 하셨고 대중스님들의 환희심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밤을 새다 배가 고프면 생감자를 깎아 먹던 시절, 인상 깊었던 것은 정처사님의 공양이다. 포행 돌다 보면 아랫마을 정처사가 마루에 떡을 올려놓고 가셨다. 감자와 좁쌀이 주식이었던 시절에 그 공양은 실로 너무나 반가운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1950년대는 그렇게 지냈다.
옥천사 창건
이렇게 제방 선원으로 안거를 다니며 부처님의 6년 고행, 큰스님의 8년 장좌. 그리고 농산행 등의 정진을 동경하던 중스님은 계곡에 졸졸 물소리 나고 소나무가 울창한 부산 재송동 옥천사에 인연이 닿았다. 2021년 이곳에서 정진 중인 스님은 불교노인대학, 일요 어린이 법회를 30년이 넘도록 운영하고 있다.
『선관책진』에서 원오스님이 ‘10년 동안 이연(異緣)이 없었다.’고 말씀한 바와 같이 ‘화두가 성성(惺惺)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스님은 말씀은 세월이 흘렀어도 “오직 한 길로만 가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새기고 있는 여일한 구도자이다.
“삭발염의 했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박사학위 10개 받는 것보다 가치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출가자라면 360도 각도에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한한 교과과정이 녹아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중생을 위한 교육자가 되어야 합니다.”
출가인이 수행 도량에서 정진, 간경, 운력, 교육하는 일상은 살아 움직이는 산수화가 되어 중생들의 가슴에 큰 선물로 간직된다. 더더욱 대 자유를 추구하는 의지력이 굳다면 빛나는 보석이 아니겠는가?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멋인데 개혁(편리)의 미명 아래 전통이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 아프다.'는 스님은 오늘도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편지(원오심요)를 깊이 읽는 도반이 많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스님의 수계 제자로 법열(法悅)·현명(玄明)·도관(道觀)·현소(玄昭)·정혜(淨慧)·공초(空超)·천륜(千輪)·천안(千眼)·정원(淨圓)·정행(淨行)·등원(登元)스님 등이 있다.
부산 옥천사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7811744
부산 옥천사는 백졸스님이 1981년 창건하였다. 부산 유수의 산사이자 능엄주 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다.
2008년 결사한 ‘하루 30독, 10년 10만독’ 서원행자만도 130여명에 이른다. 옥천사 신도만이 아니다. 다음, 네이버 카페 등에서 활동 중인 네티즌도 옥천선원 정기 프로그램에 참여래 능엄주 철야 108독, 3000배, 참선 정진을 한다.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을 대상으로 능엄주 암송대회를 열러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408~414.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51.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161~163.
- 법보신문, 부산 옥천사 주지 백졸 스님 [끝]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4775
-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62) https://www.joongang.co.kr/article/4123012#home
- 동아일보, 스님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 ‘윤회금지 작품’?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60714/79196880/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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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졸(百拙)스님 | 본항목 | 백졸스님(百拙, 1936~) | 百拙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백졸스님(百拙,_1936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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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졸(百拙)스님 | 법기(法起)문중 | ~의 일원이다 |
백졸(百拙)스님 | 인홍(仁弘)스님 | ~의 제자이다 |
백졸(百拙)스님 | 석남사 | ~에서 출가하다 |
백졸(百拙)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백졸(百拙)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백졸(百拙)스님 | 천진암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
백졸(百拙)스님 | 백암선원 | ~을 창건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