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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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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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법성스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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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70 법성(法惺).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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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 유민순(庚敏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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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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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법성사'''</br>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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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532 법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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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법성스님은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법성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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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法惺)스님은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법성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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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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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내용
 
!연도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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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 대전 출생
 
|1938 || 대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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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동학사 미타암에서 혜문(慧文)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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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http://www.donghaksa.kr/ 동학사] 미타암에서 혜문(慧文)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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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곡사에서 일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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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magoksa.or.kr/?asdf=home 마곡사]에서 [[취담일현(翠潭一玄)|일현스님(一玄)]]<ref>『한국비구니명감』에는 일연스님으로 되어 있으나, 비구 일연스님의 행적은 인터넷 상에서 검색되지 않으며, 당대에 법천용음(法泉龍吟) 선사의 제자인 취담일현(翠潭一玄) 스님이 마곡사에 주지로 주석하신 것으로 보아 일현스님을 일연스님으로 착오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일현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은 스님의 기록이 여럿이 있어서 이를 뒷받침한다.(디지털 작업자 주석) 일현스님의 모친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주석한 비구니 봉업(奉業)스님이다.</ref>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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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해인사에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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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http://www.haeinsa.or.kr/ 해인사]에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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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사 강원 입학, 태경스님을 강사로 수학
 
| || 동학사 강원 입학, 태경스님을 강사로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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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http://www.naewon.or.kr/ 내원사] 동안거 성만, 동학사 관음암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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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법성사 창건 및 주지 취임
 
|1988 || 법성사 창건 및 주지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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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법성사 중창 불사
 
|1994 || 법성사 중창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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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 현재 법성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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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 법성사 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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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 : [[삼현(三賢)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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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
 
* 수계제자 : 혜명·혜성
 
* 수계제자 : 혜명·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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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출가===
수녀와 스님을 천상의 사람이라 여기며 출가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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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170-01.jpg|섬네일|[동학사 관음암] </br>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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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스님은 1938년 10월 25일 대전에서 아버지 유봉노와 어머니 민옥례 사이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이며, 이름은 유민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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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외가는 가정교사를 둘 정도로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스님은 겨우 편지를 쓰는 정도로만 글을 배웠을 뿐 학교를 다니지 못하였다. 외사촌들이 놀러오거나 어머니가 외가 자랑을 하실 때면 스님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학교는 마을에서 십 리나 떨어 진 곳에 있었다. 학교를 가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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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한번은 어린 동생과 동시에 무서운 홍역을 앓게 되었는데, 결국 생사를 넘나들던 동생은 죽게 되고, 스님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죽다가 살아난 스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먹고, 학업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바느질을 하였다. 평소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던 어머니는 베를 곱게 짜서 팔았는데, 워낙 솜씨가 좋아서 혼수용품으로 인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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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혼자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학교를 다녔다.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이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공부를 하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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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행히도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고, 집안에서는 더 이상 뒷바라지를 할 수 없다며 학교를 그만두도록 종용하였다. 그래도 스님은 주저앉지 않고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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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독립선언문 같은 긴 문장도 금방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나머지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총명하였다.  
  
법성스님은 1938년 10월 25일 대전에서 아버지 유봉노와 어머니 민옥례 사이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이며, 이름은 유민순이다. 어린 민순의 외가는 가정교사를 둘 정도로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정작 자신의 집은 가난한 데에다 학교가 십 리나 떨어진 시골에 있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린 동생과 함께 홍역에 걸렸는데, 결국 생사를 넘나들던 동생은 죽고 민순만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죽다가 살아난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고 바느질을 해서 딸의 학비를 대주었다. 민순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이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혼자서 산 넘고 강 건너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불행히도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집안에서는 뒷바라지가 어렵다며 학교를 그만두도록 종용하였다. 그래도 민순은 꿋꿋이 학교를 다녔는데 머리가 좋아서 한번 들은 것은 곧바로 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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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성장하면서 수녀나 스님을 천상의 사람처럼 여기며 그런 삶을 늘 동경하였고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니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꿈을 접고 말았다. 대신 혼자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교리를 공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민순은 성장하면서 수녀나 스님을 천상의 사람처럼 여기며 그런 삶을 늘 동경하였고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니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꿈을 접고 말았다. 그러다가 출가의 꿈을 끝내 접지 못하여 뒤늦게나마 허락을 받은 뒤 마침내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성당이 아니라 절로 출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70년 동학사 미타암에서 혜문(慧文)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법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
그러나 출가의 꿈을 끝내 접지 못하여 뒤늦게나마 허락을 받은 뒤 마침내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성당이 아니라 절로 출가하였다. 그리하여 법성스님은 1970년 동학사 미타암에서 혜문(慧文)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였다.  
  
 
===출가 후 은사스님을 15년간 시봉하다===
 
===출가 후 은사스님을 15년간 시봉하다===
법성스님의 은사 혜문스님은 수묵화로 명성이 자자하던 옥봉스님의 사제였는데, 법성스님은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이 난 은사스님을 15년 동안 곁에서 시봉하였다. 법성스님은 은사스님의 지시로 불빛 한 점 없는 남매탑에서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을 드렸는데, 아무리 거센 눈비가 몰아쳐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예불을 드렸다. 어느 날 남매탑에서 한 총각이 목을 매고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현장조사를 위해 출입금지 선을 두르고 시신을 그대로 둔 상태였고 마침 은사스님이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하루쯤은 건너뛸 수도 있었음에도 은사스님에게 거짓말을 할 줄 몰랐기에 평소처럼 남매탑을 돌며 예불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바쁜 시간을 쪼개어 스님은 동학사 강원을 다니며 교학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은사스님이 속가에 가셔서 암자를 혼자 돌봐야 하는 상황에도 강원수업이 끝나면 남매탑으로 달려가서 저녁예불을 했고 또 새벽이 되면 구르듯이 뛰어내려와 수업을 들었다. 당시 강사스님이셨던 태경스님은 매우 성품이 좋은 분이셨는데, 법성스님을 보고 “법성이는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오면서도 지각 한 번 하지 않느냐.” 하며 칭찬을 하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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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스님의 은사 혜문스님은 수묵화로 명성이 자자하던 옥봉(玉峰) [[동성스님(東城, 1913生, 비구니)]]의 사제였는데, 법성스님은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이 난 은사스님을 15년 동안 곁에서 시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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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스님은 은사스님의 지시로 불빛 한 점 없는 남매탑에서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을 드렸는데, 아무리 거센 눈비가 몰아쳐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예불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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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남매탑에서 한 총각이 목을 매고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현장 조사를 위해 출입금지 선을 두르고 시신을 그대로 둔 상태였고 마침 은사스님이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하루 쯤은 건너뛸 수도 있었음에도 은사스님에게 거짓말을 할 줄 몰랐기에 평소처럼 남매탑을 돌며 예불을 했다고 한다. 총각의 시신 옆에서 기도를 하는 것보다 은사스님의 불호령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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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법성스님은 은사스님뿐만 아니라 은사스님의 속가 권속들까지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그 때 겪은 고초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물을 길고, 땔감을 하러 다니고, 농사를 짓고, 밭을 매고, 부전을 살다가 강원으로 달려가 공부를 해야 했다. 스님은 단 한 시간도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15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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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은 봄·가을마다 콩이나 팥을 챙겨 고향으로 가서 1주일 정도 사찰을 비우곤 하셨다. 그럴 때면 스님은 강원수업이 끝나면 남매탑으로 달려갔다가 또 새벽이 되면 구르듯이 뛰어내려와 수업을 들었다. 얼마나 부지런히 달려왔는지 상당한 거리임에도 채 20 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강사스님이셨던 태경스님은 매우 성품이 좋은 분이셨는데, 법성스님을 보고 “법성이는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오면서도 지각 한 번 하지 않느냐.” 하며 칭찬을 하곤 하셨다.
  
 
===법성사를 창건하다===
 
===법성사를 창건하다===
스님이 강원에서 『기신론』을 무렵 은사스님의 명으로 동학사 관음암의 살림을 맡아 5년간 지극정성으로 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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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기신론』 2권을 무렵이었다. 하루는 은사스님께서 선방에 갈 예정이니 빨리 강원을 나오라는 전갈이 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법성스님에게 동학사 관음암의 살림을 맡으라고 하셨다. 관음암 살림은 혼자 힘으로는 벅찼다. 법성스님은 은사스님에게 함께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여 법성스님은 혼자서 어렵게 관음암을 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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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나자 옥봉 사숙님께서 관음암을 찾아와 절을 비워달라고 하셨다. 법성스님은 “상좌 혜명이가 절을 맡을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였으나 옥봉스님은 거절을 하였다. 법성스님은 그동안 정이 들었던 관음암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마을에 집을 한 칸 마련하여 법성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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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법성사를 세울 무렵 스님은 신도 한 명 없는 곳에서 절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님이 법성사로 들어오는 날 마을의 신도 한 사람이 스님을 꿈에서 보았다며 찾아왔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법성사를 찾는 신도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법성스님은 허허벌판 같은 곳에 논과 밭을 조금 매입하였고, 곧이어 80평을 더 샀다. 그 다음에는 앞에 논이 있는 땅 45평을 더 사들였으며, 이후 140평을 매입하여 주차장까지 만들면서 현재의 법성사를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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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지현 사숙님과 옥봉 사숙님이 법성사를 방문하셨다. 그리고 사찰을 꾸려가느라 애쓰고 있는 법성스님을 보며 매우 미안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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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이 우리 미워하겠다. 관음암을 내놓으라고 한 탓에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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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래도 그 덕분에, 또 부처님과 신도님들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관음암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법성사도 없었을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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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스님은 법성스님의 진심을 알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앞으로 잘 살겠다. 하시며 격려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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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강원 공부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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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스님은 『기신론』 2권까지 하고 강원 공부를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미타암 책방에서 『금강경』, 『원각경』, 『화엄경』을 구입하여 [http://donghaksa.kr/bbs/board.php?bo_table=board_16&wr_id=13 호경 조실스님]께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청을 드렸다. 그러자 조실스님은 흔쾌하게 받아주셨다. 다른 강원을 가려고 나간 것도 아니고 은사스님이 불러서 어쩔 수 없이 나간 것이니 나머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것이었다. 하지만 일초스님이 큰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스님은 눈물을 머금고 청강생의 신분으로 강원을 다녔다. 그래서 졸업할 때 졸업장을 받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대한 갈망이 깊었던 스님이기에 청강생의 신분으로 강원공부를 하던 그 시절이 더욱 가슴 아프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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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일도 있다. 법성스님이 청강생일 당시 강원의 강사스님은 복전암 보관스님이 맡고 계셨는데, 보관스님은 법성스님이 강원 졸업장을 받지 못하자 ‘동학사 암자에서 고생하면서 어렵게 공부를 하였으면 마땅히 졸업장을 줘야 한다.’며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보관스님의 말씀은 법성스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큰스님의 조카딸이었던 보관스님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노력을 다해 암자에서 직접 대교장을 써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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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조실스님과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위로를 해주셨던 보관스님은 법성스님에게 언제나 고마운 분들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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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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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스님은 내원사에서 철을 나던 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늘 즐거워진다. 암자 생활은 참선을 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는데, 하루 종일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자 환희심이 절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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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납월팔일 장좌불와를 하고 미타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 천성산으로 올라갔다. 선객스님들은 갈대밭에서 줄지어 돌아가며 나옹선사 토굴가를 읊어주셨는데, 법성스님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지금까지 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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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선사 토굴가 (懶翁禪師 土窟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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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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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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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 듯 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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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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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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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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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무위진 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꽂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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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默默)히 홀로 앉아
 +
십년(十年)을 기한정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窮究)하니
 +
증전(曾前)에 모르던 일 금일(今日)에야 알았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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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고명심지월(一段孤明心地月)은 만고(萬古)에 밝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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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장야 업파랑(無明長夜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
영축산 제불회상(靈축山諸佛會上) 처처(處處)에 모였거든
 +
소림굴 조사가풍(小林窟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소냐.
 +
청산(靑山)은 묵묵(默默)하고 녹수(綠水)는 잔잔(潺潺)한데
 +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어떠한 소식인가.
 +
일리재평(一理齋平) 나툰중에 활계(活計)조차 구족(具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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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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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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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衣食)에 무심(無心) 커든 세욕(世慾)이 있을 소냐.
  
돌보았고 5년 후에는 사숙이신 옥봉스님이 관음암으로 들어오게 되어 스님은 근처 마을에 집을 한 칸 마련하여 법성사를 세웠다. 처음 법성사를 세울 무렵 스님은 신도 한 명 없는 곳에서 절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님이 법성사로 들어오는 날 마을의 신도 한 사람이 스님을 꿈에서 보았다며 찾아왔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법성사를 찾는 신도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법성스님은 허허벌판 같은 곳에 논과 밭을 조금 매입하였고, 곧이어 80평을 더 샀다. 그 다음에는 앞에 논이 있는 땅 45평을 더 사들였으며, 이후 140평을 매입하여 주차장까지 만들면서 현재의 법성사를 이룩하였다.
+
욕정(欲情)이 담박(談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
일물(一物)도 없는 중에 업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법성스님은 나이가 들면서 공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여 마음이 급해졌다고 한다. “독살이로 살다 보니 낮에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초저녁에 한숨 자고 밤 시에 일어나서 그때부터 기도를 합니다. 저는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중이 공부하는 소망 말고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
교교(皎皎)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 듯 올라
 +
무공적(無孔笛)를을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
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중에 갖췄더라.
  
===수계제자===
+
석호(石虎)는 무영(無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제
수계제자로는 혜명·혜성 이 있다.
+
무착영(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더라.
  
 +
법성스님은 나이가 들면서 공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여 마음이 급해졌다.
 +
“독살이로 살다 보니 낮에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초저녁에 한숨 자고 밤 한 시에 일어나서 그때부터 기도를 합니다. 저는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중이 공부하는 소망 말고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저 권속들 편안하고, 신도님들 소원 이루도록 기도하고 공부할 뿐입니다.”
 +
 +
2004년 법성사에 주석하고 있는 법성스님은 주력으로 정진하고 있다.
 +
수계제자로는 혜명·혜성스님이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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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션 데이터===
 
===릴레이션 데이터===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left"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left"
! style="width:120px" | 항목1 || style="width:240px" | 항목2 || style="width:180px" | 관계
+
! 항목1 || 항목2 || 관계 || style="width:300px" | 속성
|-
 
|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法惺)스님]] || [[삼현(三賢)문중]] || ~의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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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法惺)스님]] || [[혜문(慧文)스님]] || ~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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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法惺)스님]] || [[동학사 미타암]]  || ~에서 출가하다
 
|-
 
|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法惺)스님]] || [[일연스님을 계사]] || ~로 사미니계를 수지하다
 
|-
 
|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法惺)스님]] || [[해인사]] || ~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하다
 
 
|-
 
|-
|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法惺)스님]] || [[동학사 강원]] || ~을 입학하다
+
|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스님(法惺)]] || [[삼현(三賢)문중|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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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法惺)스님]] || [[태경스님]] || ~을 강사로 수학하다
+
|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스님(法惺)]] || [[혜문(慧文)스님|혜문스님(慧文)]] || ~의 수계제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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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스님(法惺, 1938生, 비구니)|법성(法惺)스님]] || [[내원사 동안거]] || ~를 성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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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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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사'''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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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지도 | 위도= 36.363922 | 경도=127.24926 | 줌=17}}
  
 
==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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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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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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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 주요 비구니 스님]] '''</big>

2024년 8월 24일 (토) 12:51 기준 최신판



정의

법성(法惺)스님은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법성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8 대전 출생
1970 동학사 미타암에서 혜문(慧文)스님을 은사로 출가
마곡사에서 일현스님(一玄)[1]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2 해인사에서 비구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 입학, 태경스님을 강사로 수학
1975 내원사 동안거 성만, 동학사 관음암 주석
1988 법성사 창건 및 주지 취임
1994 법성사 중창 불사
2004 법성사 주지

활동 및 공헌

출가

[동학사 관음암]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447

법성스님은 1938년 10월 25일 대전에서 아버지 유봉노와 어머니 민옥례 사이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이며, 이름은 유민순이다.

스님의 외가는 가정교사를 둘 정도로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스님은 겨우 편지를 쓰는 정도로만 글을 배웠을 뿐 학교를 다니지 못하였다. 외사촌들이 놀러오거나 어머니가 외가 자랑을 하실 때면 스님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학교는 마을에서 십 리나 떨어 진 곳에 있었다. 학교를 가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어린 동생과 동시에 무서운 홍역을 앓게 되었는데, 결국 생사를 넘나들던 동생은 죽게 되고, 스님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죽다가 살아난 스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을 먹고, 학업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바느질을 하였다. 평소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던 어머니는 베를 곱게 짜서 팔았는데, 워낙 솜씨가 좋아서 혼수용품으로 인기가 많았다.

스님은 혼자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학교를 다녔다.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이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공부를 하러 다녔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고, 집안에서는 더 이상 뒷바라지를 할 수 없다며 학교를 그만두도록 종용하였다. 그래도 스님은 주저앉지 않고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스님은 독립선언문 같은 긴 문장도 금방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나머지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총명하였다.

스님은 성장하면서 수녀나 스님을 천상의 사람처럼 여기며 그런 삶을 늘 동경하였고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니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꿈을 접고 말았다. 대신 혼자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교리를 공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출가의 꿈을 끝내 접지 못하여 뒤늦게나마 허락을 받은 뒤 마침내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성당이 아니라 절로 출가하였다. 그리하여 법성스님은 1970년 동학사 미타암에서 혜문(慧文)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였다.

출가 후 은사스님을 15년간 시봉하다

법성스님의 은사 혜문스님은 수묵화로 명성이 자자하던 옥봉(玉峰) 동성스님(東城, 1913生, 비구니)의 사제였는데, 법성스님은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이 난 은사스님을 15년 동안 곁에서 시봉하였다.

법성스님은 은사스님의 지시로 불빛 한 점 없는 남매탑에서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을 드렸는데, 아무리 거센 눈비가 몰아쳐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예불을 드렸다.

어느 날 남매탑에서 한 총각이 목을 매고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현장 조사를 위해 출입금지 선을 두르고 시신을 그대로 둔 상태였고 마침 은사스님이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하루 쯤은 건너뛸 수도 있었음에도 은사스님에게 거짓말을 할 줄 몰랐기에 평소처럼 남매탑을 돌며 예불을 했다고 한다. 총각의 시신 옆에서 기도를 하는 것보다 은사스님의 불호령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당시 법성스님은 은사스님뿐만 아니라 은사스님의 속가 권속들까지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그 때 겪은 고초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물을 길고, 땔감을 하러 다니고, 농사를 짓고, 밭을 매고, 부전을 살다가 강원으로 달려가 공부를 해야 했다. 스님은 단 한 시간도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15년을 살았다.

은사스님은 봄·가을마다 콩이나 팥을 챙겨 고향으로 가서 1주일 정도 사찰을 비우곤 하셨다. 그럴 때면 스님은 강원수업이 끝나면 남매탑으로 달려갔다가 또 새벽이 되면 구르듯이 뛰어내려와 수업을 들었다. 얼마나 부지런히 달려왔는지 상당한 거리임에도 채 20 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강사스님이셨던 태경스님은 매우 성품이 좋은 분이셨는데, 법성스님을 보고 “법성이는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오면서도 지각 한 번 하지 않느냐.” 하며 칭찬을 하곤 하셨다.

법성사를 창건하다

스님이 『기신론』 2권을 볼 무렵이었다. 하루는 은사스님께서 선방에 갈 예정이니 빨리 강원을 나오라는 전갈이 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법성스님에게 동학사 관음암의 살림을 맡으라고 하셨다. 관음암 살림은 혼자 힘으로는 벅찼다. 법성스님은 은사스님에게 함께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여 법성스님은 혼자서 어렵게 관음암을 꾸려나갔다.

5년이 지나자 옥봉 사숙님께서 관음암을 찾아와 절을 비워달라고 하셨다. 법성스님은 “상좌 혜명이가 절을 맡을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였으나 옥봉스님은 거절을 하였다. 법성스님은 그동안 정이 들었던 관음암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마을에 집을 한 칸 마련하여 법성사를 세웠다.

처음 법성사를 세울 무렵 스님은 신도 한 명 없는 곳에서 절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님이 법성사로 들어오는 날 마을의 신도 한 사람이 스님을 꿈에서 보았다며 찾아왔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법성사를 찾는 신도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법성스님은 허허벌판 같은 곳에 논과 밭을 조금 매입하였고, 곧이어 80평을 더 샀다. 그 다음에는 앞에 논이 있는 땅 45평을 더 사들였으며, 이후 140평을 매입하여 주차장까지 만들면서 현재의 법성사를 이룩하였다.

하루는 지현 사숙님과 옥봉 사숙님이 법성사를 방문하셨다. 그리고 사찰을 꾸려가느라 애쓰고 있는 법성스님을 보며 매우 미안해하셨다. “법성이 우리 미워하겠다. 관음암을 내놓으라고 한 탓에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으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래도 그 덕분에, 또 부처님과 신도님들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관음암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법성사도 없었을 게 아닙니까.” 두 스님은 법성스님의 진심을 알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앞으로 잘 살겠다. 하시며 격려 해주셨다.

힘들게 강원 공부를 마치다

법성스님은 『기신론』 2권까지 하고 강원 공부를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미타암 책방에서 『금강경』, 『원각경』, 『화엄경』을 구입하여 호경 조실스님께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청을 드렸다. 그러자 조실스님은 흔쾌하게 받아주셨다. 다른 강원을 가려고 나간 것도 아니고 은사스님이 불러서 어쩔 수 없이 나간 것이니 나머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것이었다. 하지만 일초스님이 큰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스님은 눈물을 머금고 청강생의 신분으로 강원을 다녔다. 그래서 졸업할 때 졸업장을 받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대한 갈망이 깊었던 스님이기에 청강생의 신분으로 강원공부를 하던 그 시절이 더욱 가슴 아프게 남아 있다.

하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일도 있다. 법성스님이 청강생일 당시 강원의 강사스님은 복전암 보관스님이 맡고 계셨는데, 보관스님은 법성스님이 강원 졸업장을 받지 못하자 ‘동학사 암자에서 고생하면서 어렵게 공부를 하였으면 마땅히 졸업장을 줘야 한다.’며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보관스님의 말씀은 법성스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큰스님의 조카딸이었던 보관스님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노력을 다해 암자에서 직접 대교장을 써주셨다. 강원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조실스님과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위로를 해주셨던 보관스님은 법성스님에게 언제나 고마운 분들로 기억되고 있다.

수행

법성스님은 내원사에서 철을 나던 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늘 즐거워진다. 암자 생활은 참선을 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는데, 하루 종일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자 환희심이 절로 났다. 한번은 납월팔일 장좌불와를 하고 미타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 천성산으로 올라갔다. 선객스님들은 갈대밭에서 줄지어 돌아가며 나옹선사 토굴가를 읊어주셨는데, 법성스님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지금까지 외우고 있다.


나옹선사 토굴가 (懶翁禪師 土窟歌)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 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그 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일편무위진 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꽂아 두고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默默)히 홀로 앉아 십년(十年)을 기한정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窮究)하니 증전(曾前)에 모르던 일 금일(今日)에야 알았구나.

일단고명심지월(一段孤明心地月)은 만고(萬古)에 밝았는데 무명장야 업파랑(無明長夜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축산 제불회상(靈축山諸佛會上) 처처(處處)에 모였거든 소림굴 조사가풍(小林窟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소냐. 청산(靑山)은 묵묵(默默)하고 녹수(綠水)는 잔잔(潺潺)한데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어떠한 소식인가. 일리재평(一理齋平) 나툰중에 활계(活計)조차 구족(具足)하다. 청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의식(衣食)에 무심(無心) 커든 세욕(世慾)이 있을 소냐.

욕정(欲情)이 담박(談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일물(一物)도 없는 중에 업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교교(皎皎)한 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 듯 올라 무공적(無孔笛)를을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중에 갖췄더라.

석호(石虎)는 무영(無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제 무착영(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더라.

법성스님은 나이가 들면서 공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여 마음이 급해졌다. “독살이로 살다 보니 낮에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초저녁에 한숨 자고 밤 한 시에 일어나서 그때부터 기도를 합니다. 저는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중이 공부하는 소망 말고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저 권속들 편안하고, 신도님들 소원 이루도록 기도하고 공부할 뿐입니다.”

2004년 법성사에 주석하고 있는 법성스님은 주력으로 정진하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혜명·혜성스님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44~449.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7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성(法惺)스님 본항목 법성스님(法惺, 1938~ ) 法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성스님(法惺,_193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법성스님(法惺)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법성스님(法惺) 혜문스님(慧文) ~의 수계제자이다
법성스님(法惺) 동학사 미타암 ~에서 출가하다
법성스님(法惺) 일연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법성스님(法惺) 공주 법성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법성스님(法惺) 공주 법성사 ~을(를) 창건하다
법성스님(法惺) 공주 법성사 ~을(를) 중창하다
법성스님(法惺) 안거 ~을(를) 성만하다 양산 내원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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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법성사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532-2



주석

  1. 『한국비구니명감』에는 일연스님으로 되어 있으나, 비구 일연스님의 행적은 인터넷 상에서 검색되지 않으며, 당대에 법천용음(法泉龍吟) 선사의 제자인 취담일현(翠潭一玄) 스님이 마곡사에 주지로 주석하신 것으로 보아 일현스님을 일연스님으로 착오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일현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은 스님의 기록이 여럿이 있어서 이를 뒷받침한다.(디지털 작업자 주석) 일현스님의 모친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주석한 비구니 봉업(奉業)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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