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성문스님(性文, 1893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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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성문스님은 삼선암 반야선원 개원을 개원하고 비구니스님으로서는 최초로 교구본사인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팔공총림인 동화사 주지스님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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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스님은 삼선암 반야선원 개원하고 비구니스님으로서 최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팔공총림인 동화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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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경남 합천 출생  
 
|1893||경남 합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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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해인사 삼선암에서 보찬(普讚)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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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https://blog.naver.com/jcjkks/221440412121 해인사 삼선암]에서 보찬(普讚)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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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호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14||호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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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해인사 국일암 강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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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https://blog.naver.com/alfo8130/222557119325 해인사 국일암] 강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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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직지사 서전, 동화사 부도암 선방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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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김천 직지사 서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9151&cid=40942&categoryId=33081 동화사 부도암] 선방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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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삼선암 반야선원 개원
 
|1945||삼선암 반야선원 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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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1954||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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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비구니 최초로 교구본사 동화사 주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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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비구니 최초로 교구본사 [https://namu.wiki/w/%EB%8F%99%ED%99%94%EC%82%AC 동화사] 주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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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1.24 ||해인사 삼선암에서 입적(세수 82세, 법랍 71세)  
 
|1974. 1.24 ||해인사 삼선암에서 입적(세수 82세, 법랍 7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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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중 ||[[계민(戒珉)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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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언어보다는 진실한 실천자가 참수행인이다. </br> 무무무(無無無)자 화두(話頭)로 일관  
 
|수행지침 ||언어보다는 진실한 실천자가 참수행인이다. </br> 무무무(無無無)자 화두(話頭)로 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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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
 
==활동 및 공헌==
 
=== 출가===
 
=== 출가===
혜월(慧月) 성문(性文)스님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승산리에서 1893년 5월 22일 아버지 정형오 거사와 어머니 묘법화보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고, 이름은 정성문이며, 보월당 정행(淨行)스님의 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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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월(慧月) 성문(性文)스님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승산리에서 1893년 5월 22일 아버지 정현오 거사와 어머니 묘법화 보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고, 이름은 정성문이며, 보월당 [[정행스님(淨行, 1902生, 비구니)|정행(淨行)스님]]의 언니이다.
  
집안의 권속들 중에 해인사와 가까운 지연(地緣)으로 불문(佛門)에 계신 분이 몇 분 되었는데, 스님의 나이 10살 때 부모님이 한 해에 모두 돌아가시게 되자, 2년 뒤에 스님도 인연 출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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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나이 10살 때 부모님이 한 해에 모두 돌아가시게 되자, 2년 뒤에 스님도 인연 출가를 하였다. 한편, 집안 권속의 여러분이 해인사와 가까운 지역에 사는 인연으로 이미 불문(佛門)에 들어와 계신 분이 몇 분 계셨다.  
  
20세에 삼선암의 창건주이신 정보찬(鄭普讚)스님을 은사로 호월스님을 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수지하셨으며 국일암에 계시던 타불스님으로부터 대교과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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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20세에 삼선암의 창건주이신 정보찬(鄭普讚)스님을 은사로, 호월스님을 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수지하셨으며 국일암에 계시던 타불스님으로부터 대교과를 마쳤다.
  
스님은 어린 시절에 이미 ‘말 없는 앞산이 변할지라도 내 마음은 결코 변치 않으리’라는 입지를 세우고 젊은 시절부터 운수행각을 하였다. 어떤 때는 불사(佛事)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머물고 떠남의 지혜를 알았던 스님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는 일은 오직 신심 납자가 자성의 자리를 보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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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어린 시절에 이미 '말 없는 앞산이 변할지라도 내 마음은 결코 변치 않으리.’라는 입지를 세우고 젊은 시절부터 운수행각을 하였다. 어떤 때는 불사(佛事)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머물고 떠남의 지혜를 알았던 스님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는 일은 오직 신심 납자가 자성의 자리를 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직지사 서전, 동화사의 부도암에 선방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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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서전, 동화사 부도암에 선방 개설===
  
36세 때에는 직지사 서전(현재 화재로 소멸)을, 다음에는 동화사의 부도암을 선방으로 개설하여서 후학의 공부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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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때에는 직지사 서전(현재 화재로 소멸)을, 다음에는 동화사 부도암을 선방으로 개설하여 후학의 공부를 도왔다.
  
 
===동화사 주지 역임===
 
===동화사 주지 역임===
  
종단에서 정화불사로 불교계가 어수선하던 , 스님은 동화사가 정화되자 초대 주지로 취임하였다. 취임 후 백일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새로 짓는 등 도량불사를 마쳐놓고 1년 만에 부처님 탁자 위에 사직서를 써 놓고는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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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운동이 시작되자 불교계가 온통 어수선하였다. 이 종단에서 한국 불교 최초로 비구니 성문스님을 동화사 초대주지로 임명하였다. 스님은 교구 본사 주지로서 취임 후 백일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새로 짓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구 본사를 비구니에게 맡길 수 없다는 몇몇 비구스님들의 입김이 종단 내에서 힘을 발휘하여 결국 성문스님은 도량불사를 마쳐놓고 1년만에 불단 앞 탁자 위에 사직서를 써 놓고 나왔다.
  
 
===정토발원===
 
===정토발원===
  
스님은 선(禪)을 하시는 중에서도 정토(淨土)발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해제 철만 되면 잡담을 자제하고 염불할 것을 독려하며 염주 바구니를 들고 앉았다. 그러면 도반스님들과 함께 백만 독을 목표로 기도에 들어갔다. 끝나고 나면 또 시작해서 손톱이 갈라지고 살갗이 벗겨져서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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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선(禪)을 하시는 중에도 정토발원을 잊지 않았다. 해제철 뿐만 아니라 결제철에도 방선하는 시간이 되면, 염주를 들고 염불하는 것을 손수 보이시면서, 제자들이 잡담하는 것을 자제하고 수행할 것을 독려하였다. 좌선시에는 죽비를, 그 외의 시간에는 염주를 들고, 스스로는 화두에 들면서 같이 정진하는 이들이 염불로 집중할 것을 독려한 것이다. 스님은 도반스님들과 함께 백만독을 목표로 기도에 들어갔다. 백만독이 끝나면 또 시작해서 손톱이 갈라지고 살갗이 벗겨져서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후학들에게 배움을 장려===
 
===후학들에게 배움을 장려===
 
[[파일: 269-01.jpg|섬네일|'''능엄경법회 수료기념(을미(1955)년8월15일)''' </br>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10]]
 
[[파일: 269-01.jpg|섬네일|'''능엄경법회 수료기념(을미(1955)년8월15일)''' </br>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10]]
스님은 손주 상좌들에게도 ‘요즈음은 공부를 해야 포교도 하고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하며 학교에 다니는 것을 장려하였다. 비구니 강사와 포교사가 드물던 시절에 현재 운문사 강주스님이 서봉사에서 법화경 산림 법회를 하시면, 우리 비구니가 법문하는 것은 우리가 들어야 한다.’고 무더위도 고사하고 땀을 흘리며 고개를 넘어 청강을 하였다. 당신의 문도들에게 ‘비구니도 법맥을 알고 계보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였는데, 일찍부터 선지자적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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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손주 상좌들에게도 ‘요즘은 공부를 해야 포교도 하고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하시며 학교에 다니기를 장려하였다. 비구니 강사와 포교사가 드물던 시절에 현재 운문사 강주스님이 서봉사에서 법화경 산림 법회를 하시면, 우리 비구니가 법문하는 것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고 하시며 무더위에도 땀을 흘리며 고개를 넘어 청강을 하러 오셨다. 당신의 문도들에게‘비구니도 법맥을 알고 계보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였는데, 일찍부터 선지자적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세연(世緣)이 다해서 자리에 누웠을때도 본연(本然)의 자리를 챙기는 것을 잊은 적이 없으며,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더욱 용맹정진하였고 대중운력이 있으면 나와서 함께 김치 거리를 다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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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世緣)이 다해서 자리에 누웠을 때도 본연(本然)의 자리를 챙기는 것을 잊은 적이 없으며,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더욱 용맹정진하였고 대중운력이 있으면 나와서 함께 김치 거리를 다듬곤 하였다.
  
 
===입적===
 
===입적===
 
입적하기 사흘 전, 이미 정신이 없을 때에도 자리에 누운 채 허공을 향해 활개 합장을 하였다. 옆에서 시봉하던 스님이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어 보니 “인로왕보살이 날 데리러 반야 용선을 타고 오셨어”라고 대답하였다.
 
입적하기 사흘 전, 이미 정신이 없을 때에도 자리에 누운 채 허공을 향해 활개 합장을 하였다. 옆에서 시봉하던 스님이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어 보니 “인로왕보살이 날 데리러 반야 용선을 타고 오셨어”라고 대답하였다.
  
1974년 1월 24일, 가야산 봉우리 한 언저리에는 흰 눈이 아직 쌓였고 양지에는 제비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이른 봄날, 성문스님은 만물이 소생하는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 떠났다. 세수는 82세세요, 법랍은 7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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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24일, 가야산 봉우리 언저리들마다 여전히 흰 눈이 쌓여 있고, 일부 양지쪽 언덕에 드물게 제비꽃 피던 이른 봄날, 성문스님은 만물이 소생하는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 떠났다. 세수는 82세요, 법랍은 71세였다.
  
 
수계 제자로 수한·태호·태희·[[광우스님(光雨, 1926生, 비구니)|광우]]·[[태경스님(泰鏡, 1930生, 비구니)|태경]]·태응·태현·태민스님 등이 있다.
 
수계 제자로 수한·태호·태희·[[광우스님(光雨, 1926生, 비구니)|광우]]·[[태경스님(泰鏡, 1930生, 비구니)|태경]]·태응·태현·태민스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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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암==
 
==삼선암==
삼선암(三仙庵)은 해인사 산내암자로 가야산 삼선봉 밑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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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암(三仙庵)은 해인사 산내암자로 가야산 삼선봉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학사대 서쪽 해인사 강원의 운동장 북편 채전(菜田)자리에 자홍(慈洪)스님이 최초로 창건하였으나 큰절 뒤쪽이라는 이유로 1893년에 현 위치로 옮기고, 삼선봉 밑에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삼선암으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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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학사대 서쪽 해인사 강원의 운동장 북편 채전(菜田)자리에 자홍(慈洪)스님이 최초로 창건하였으나 큰절 뒤쪽이라는 이유로 1893년에 현 위치로 옮기고, 삼선봉 밑에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삼선암으로 지었다. <br/>
1905년 보찬(普讚), 지승(智崇)스님이 확장하였으며, 1955년 혜안(慧眼)스님이 도감에 취임하여 1957년 요사채를 80평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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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보찬(普讚), 지숭(智崇)스님이 확장하였으며, 1955년 혜안(慧眼)스님이 도감에 취임하여 1957년 요사채를 80평으로 확장했다. 1961년에 인법당을 중수하고, 1963년에 칠성각을 중창했으며, 1981년에는 선원 15평을 42평으로 증축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선불장과 후원 요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br/>
1961년에 인법당을 중수하고, 1963년에 칠성각을 중창했으며, 1981년에는 선원 15평을 42평으로 증축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선불장과 후원 요시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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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암 반야선원(般若禪院)은 1945년 성문 스님이 개원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이 선방에서 참선에 들었다고 한다. <br/>
삼선암 반야선원(般若禪院)은 1945년 정성문 스님이 개원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이 선방에서 참선에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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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스님은 삼선암에 선원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뒷방에 달마상을 걸어놓고 몇 명이 함께 모여, 안으로는 입·방선의 죽비를 쳐서 인(因)을 쌓고 밖으로는 지장계를 결성하고 그 인연으로 화주한 것을 사중에 들여놓는 연(緣)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삼선암이 어엿한 선원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성문스님은 삼선암에 선원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뒷방에 달마상을 걸어놓고 몇 명이 함께 모여, 안으로는 입·방선의 죽비를 쳐서 인(因)을 쌓고 밖으로는 지장계를 결성하고 화주를 하여 시중에 들어놓는 연(緣)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삼선암이 어엿한 선원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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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션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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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스님(性文, 1893生, 비구니) | 성문(性文)스님]] || [[대구 동화사 부도암(도학동)]] || ~을(를) 설립(건립)하다 || 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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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스님(性文, 1893生, 비구니)|성문스님(性文)]] || [[해인사 삼선암반야선원]] || ~을(를) 건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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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스님(性文, 1893生, 비구니) | 성문(性文)스님]] || [[한국불교정화운동]] || ~에 참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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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스님(性文, 1893生, 비구니)|성문스님(性文)]] || [[대구 동화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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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 주요 비구니 스님]] '''</big>

2024년 4월 26일 (금) 07:54 기준 최신판



정의

성문스님은 삼선암 반야선원 개원하고 비구니스님으로서 최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팔공총림인 동화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93 경남 합천 출생
1904 해인사 삼선암에서 보찬(普讚)스님을 은사로 출가
1914 호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26 해인사 국일암 강원 졸업
1928 김천 직지사 서전, 동화사 부도암 선방 개설
1945 삼선암 반야선원 개원
1954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1955 비구니 최초로 교구본사 동화사 주지 역임
1974. 1.24 해인사 삼선암에서 입적(세수 82세, 법랍 71세)
문 중 계민문중(戒珉)
수행지침 언어보다는 진실한 실천자가 참수행인이다.
무무무(無無無)자 화두(話頭)로 일관
생활신조 교육 없이 교화 없다. 배워야 한다.
수계제자 수한·태호·태희·광우·태경·태응·태현·태민

활동 및 공헌

출가

혜월(慧月) 성문(性文)스님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승산리에서 1893년 5월 22일 아버지 정현오 거사와 어머니 묘법화 보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고, 이름은 정성문이며, 보월당 정행(淨行)스님의 언니이다.

스님의 나이 10살 때 부모님이 한 해에 모두 돌아가시게 되자, 2년 뒤에 스님도 인연 출가를 하였다. 한편, 집안 권속의 여러분이 해인사와 가까운 지역에 사는 인연으로 이미 불문(佛門)에 들어와 계신 분이 몇 분 계셨다.

스님은 20세에 삼선암의 창건주이신 정보찬(鄭普讚)스님을 은사로, 호월스님을 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수지하셨으며 국일암에 계시던 타불스님으로부터 대교과를 마쳤다.

스님은 어린 시절에 이미 '말 없는 앞산이 변할지라도 내 마음은 결코 변치 않으리.’라는 입지를 세우고 젊은 시절부터 운수행각을 하였다. 어떤 때는 불사(佛事)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머물고 떠남의 지혜를 알았던 스님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는 일은 오직 신심 납자가 자성의 자리를 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직지사 서전, 동화사 부도암에 선방 개설

36세 때에는 직지사 서전(현재 화재로 소멸)을, 다음에는 동화사 부도암을 선방으로 개설하여 후학의 공부를 도왔다.

동화사 주지 역임

정화운동이 시작되자 불교계가 온통 어수선하였다. 이 때 종단에서 한국 불교 최초로 비구니 성문스님을 동화사 초대주지로 임명하였다. 스님은 교구 본사 주지로서 취임 후 백일기도를 하면서 건물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새로 짓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구 본사를 비구니에게 맡길 수 없다는 몇몇 비구스님들의 입김이 종단 내에서 힘을 발휘하여 결국 성문스님은 도량불사를 마쳐놓고 1년만에 불단 앞 탁자 위에 사직서를 써 놓고 나왔다.

정토발원

스님은 선(禪)을 하시는 중에도 정토발원을 잊지 않았다. 해제철 뿐만 아니라 결제철에도 방선하는 시간이 되면, 염주를 들고 염불하는 것을 손수 보이시면서, 제자들이 잡담하는 것을 자제하고 수행할 것을 독려하였다. 좌선시에는 죽비를, 그 외의 시간에는 염주를 들고, 스스로는 화두에 들면서 같이 정진하는 이들이 염불로 집중할 것을 독려한 것이다. 스님은 도반스님들과 함께 백만독을 목표로 기도에 들어갔다. 백만독이 끝나면 또 시작해서 손톱이 갈라지고 살갗이 벗겨져서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후학들에게 배움을 장려

능엄경법회 수료기념(을미(1955)년8월15일)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10

스님은 손주 상좌들에게도 ‘요즘은 공부를 해야 포교도 하고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하시며 학교에 다니기를 장려하였다. 비구니 강사와 포교사가 드물던 시절에 현재 운문사 강주스님이 서봉사에서 법화경 산림 법회를 하시면, 우리 비구니가 법문하는 것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고 하시며 무더위에도 땀을 흘리며 고개를 넘어 청강을 하러 오셨다. 당신의 문도들에게‘비구니도 법맥을 알고 계보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였는데, 일찍부터 선지자적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세연(世緣)이 다해서 자리에 누웠을 때도 본연(本然)의 자리를 챙기는 것을 잊은 적이 없으며,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더욱 용맹정진하였고 대중운력이 있으면 나와서 함께 김치 거리를 다듬곤 하였다.

입적

입적하기 사흘 전, 이미 정신이 없을 때에도 자리에 누운 채 허공을 향해 활개 합장을 하였다. 옆에서 시봉하던 스님이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어 보니 “인로왕보살이 날 데리러 반야 용선을 타고 오셨어”라고 대답하였다.

1974년 1월 24일, 가야산 봉우리 언저리들마다 여전히 흰 눈이 쌓여 있고, 일부 양지쪽 언덕에 드물게 제비꽃 피던 이른 봄날, 성문스님은 만물이 소생하는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 떠났다. 세수는 82세요, 법랍은 71세였다.

수계 제자로 수한·태호·태희·광우·태경·태응·태현·태민스님 등이 있다.

  • 운문회보 발취 : 불기 2530년 (1986년 7월 15일) 제 17호

삼선암

삼선암(三仙庵)은 해인사 산내암자로 가야산 삼선봉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학사대 서쪽 해인사 강원의 운동장 북편 채전(菜田)자리에 자홍(慈洪)스님이 최초로 창건하였으나 큰절 뒤쪽이라는 이유로 1893년에 현 위치로 옮기고, 삼선봉 밑에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삼선암으로 지었다.
1905년 보찬(普讚), 지숭(智崇)스님이 확장하였으며, 1955년 혜안(慧眼)스님이 도감에 취임하여 1957년 요사채를 80평으로 확장했다. 1961년에 인법당을 중수하고, 1963년에 칠성각을 중창했으며, 1981년에는 선원 15평을 42평으로 증축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선불장과 후원 요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선암 반야선원(般若禪院)은 1945년 성문 스님이 개원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이 선방에서 참선에 들었다고 한다.
성문스님은 삼선암에 선원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뒷방에 달마상을 걸어놓고 몇 명이 함께 모여, 안으로는 입·방선의 죽비를 쳐서 인(因)을 쌓고 밖으로는 지장계를 결성하고 그 인연으로 화주한 것을 사중에 들여놓는 연(緣)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삼선암이 어엿한 선원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성문(性文)스님 본항목 성문스님(性文, 1893~1974) 性文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문스님(性文,_189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성문스님(性文) 계민문중(戒珉) ~의 일원이다
성문스님(性文) 보찬스님(普讚) ~의 수계제자이다
성문스님(性文) 해인사 삼선암 ~에서 출가하다
성문스님(性文) 호월스님(湖月)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성문스님(性文) 김천 직지사 ~의 불사를 하다 서전 선방 개설
성문스님(性文) 동화사 부도암 ~의 불사를 하다 선방 개설
성문스님(性文) 해인사 삼선암반야선원 ~을(를) 건립하다
성문스님(性文) 불교정화운동 ~에 참여하다
성문스님(性文) 대구 동화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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