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문스님(載文, 1943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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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원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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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3일 (화) 14:47 판


정의

재문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성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수락산 내원암을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3 경북 청송 출생
1960 부남중학교 졸업 , 수락산 내원암에서 성민(聖敏)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3 봉선사에서 운경(耘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니계 수지
1970 영산각 중수
1973 요사채 2동과 주방 중수
1981 미타사 주석
1982 내원암 주지 취임
1991 미륵전 중수
1996 영산전 중수
1999~2000 요사채(세심원) 완공
2004 내원암 주지
2021 내원암 주석
문중 법기(法起)문중
수행지침 몸 정성 마음 정성을 다해 부처님 시봉
생활신조 매 순간을 진실하게.
상훈 봉선사 공로패 (감사패)수상
취미 사경(寫經)
수계제자 청진(淸眞)·일원(日元)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재문(載文)스님은 1943년 9월 11일 경북 청송군 부남면 중기 2동에서 아버지 김용수와 어머니 권옥수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순분이다. 스님은 청송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구남중학교를 중퇴하였다. 일찍이 불법을 접하고 발심의 뜻을 가지고 있던 스님은 중학교 재학 중 부산에 있는 마하사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 가서 보니 스님들이 모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재문스님은 그런 스님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좋아 보여서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

재문스님은 18세 되던 해인 1960년 2월 30일 수락산 내원암에서 성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노스님은 보안스님으로, 출가와 입적을 모두 회룡사에서 하였다. 노스님은 상좌들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중노릇 잘하라고 이른 뒤에 입적하셨다. 스님은 3년 후 봉선사에서 25교구 운경스님께 사미니계를 수계하고,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재문스님은 행자 시절 은사스님을 도와 시작한 수락산 내원암 불사를 이후에도 계속하였다. 효봉스님이 들어오고 나서 대웅전 불사를 하였는데, 1961년부터 시작한 불사는 1964년에 마무리 되었다.

옥수동 미타사에 가서 조카 상좌들을 돌보다

스님이 강원을 가려고 준비할 무렵, 사형인 법성스님이 입적하는 바람에 그 상좌들을 맡아 키우느라 강원을 포기하였다. 대신 미타사(옥수동)에 가서 살림을 하며 상좌들을 키워 강원에 보냈다. 재문스님은 법성스님의 맏상좌인 상덕, 종일, 수현, 수진스님을 15년 동안 키웠다. 이후 38세까지 미타사에 있다가 39세에 내원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로 계속 내원암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내원암 불사

재문스님의 사형사제로는 재현, 효봉, 재석, 재만스님이 있다. 스님은 폐사 직전인 내원암의 대웅전, 칠성각, 영산전을 은사스님과 사형인 재현스님과 함께 불사를 하였다. 은사스님은 내원암에서 입적하였고, 나이 18세에 출가한 재현스님도 1997년 내원암에서 입적하였다.

내원암 미륵부처님

1996년 7월 7일 영산전을 준공하고 미륵부처님을 이운하였으며, 같은 해에 요사채를 지어 10년 불사 회향을 하여 봉선사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그리고 1999년부터 요사채를 짓기 시작하여 2000년 4월 18일 준공하고 세심원(洗心園)이라고 이름지었다. 재문스님은 법당에 있던 미륵불을 11년 전 내원암으로 옮겨 모신 후 7년간 오전 공양도 거른 채 미륵불 앞에서 기도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해마다 음력 5월 초하루가 되면 미륵전에서 7일간 철야정진 기도법회가 열린다.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71

지금 내원암을 다니고 있는 불자들 중에는 꿈에 미륵부처님을 친견한 인연으로 내원암을 찾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입시 기도는 100일도 아닌 1년간 계속된다. 그래서 내원암에는 1년 열두 달 날마다 4~5회 이상의 기도 정진이 이뤄지고 있다. 재문스님이 미륵불을 지금의 내원암 자리로 이전한 데는 다음과 같은 신기한 사연이 숨어 있다. 미륵부처님의 이운을 고민하던 스님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스님은 꿈속에서 쌍무지개가 절 위로 뻗치는 모습을 보고, 이튿날 무지개가 떨어진 곳을 찾아 나섰다.

내원암의 모습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71

때는 한겨울인 음력 12월, 그런데 무지개가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 한 무더기의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옆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작은 샘까지 있지 않은가. 스님은 암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그런 명당자리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과연 그곳은 한겨울에도 날이 저물기 전까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따뜻해서 누구나 추위를 잊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다.

부처님의 영험함

내원암은 이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근래까지 실제로 종종 일어나고 있다. 내원암에서는 매년 6월 한 달 동안 18 나한을 모신 영산전에서 기도 정진을 해왔는데, 1997년 6월, 내원암 신도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는 사건을 경험했다. 기도를 시작한 둘째 날 주지스님이 먼저 영산전에 올라가서 신묘장구대다라니 30회 염송을 시작했다. 스님이 전각에 든 것을 보고 대여섯 명의 신도들이 절 아래 개울에서 손을 씻고 절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때 그들은 영산전 지붕마루 위에 태양이 물결처럼 출렁이면서 파란 수정모양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눈부신 광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더니 태양 주위가 온통 노란색과 분홍색 등 색색의 꽃으로 둘러싸이며 사방으로 무지개가 환하게 뻗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당장 무지개를 타고 태양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때 시간은 오후 5시경으로 한 사람도 아닌 다섯 명이 넘는 사람이 동시에 경험한 특별한 체험이었다. 이 사건은 좀 특별한 사례에 속하지만 20여 년 가까이 내원암 신도회장을 지낸 관음명보살은 내원암에서는 아픈 몸을 치유하고 사업이 번창하는 등 기도를 열심히 해서 나름대로의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신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들려준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내원암은 신도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노스님과 재문스님이 만든 백팔계단은 층수가 많아 오르기는 힘들지만 신심 있는 신도들이 꾸준히 와서 기도하며 부처님의 영험함을 체험하고 있다. 비구니스님들의 처소로서 역사가 깊은 암자인 내원암은 수락산 동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옥류폭포, 은류폭포, 금류폭포와 같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폭포를 아래에 두고 있는 내원암은 수락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미륵불이 영험하다고 하여 찾는 신도들이 많다. 수계제자로는 청진(淸眞)·일원(日元)스님이 있다.

수락산 내원암

내원암 전경 사진출처 : 셀수스 http://celsus.org/bbs/board.php?bo_table=still&wr_id=6628
내원암 돌계단 사진출처 : 셀수스 http://celsus.org/bbs/board.php?bo_table=still&wr_id=6628
내원암 석조미륵불입상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raw_pg.aspx?CNTN_CD=A0002535995&isPc=true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창건자는 미상이다. 조선 숙종 때부터 이 절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사세(寺勢)를 확장하였다. 1693년 숙종은 파계사(把溪寺)의 영원(靈源)을 불러 수락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게 한 뒤에 영조를 얻었고, 그 뒤 순정왕후(純貞王后)가 왕손을 얻고자 용파(龍坡)를 시켜 이 절에서 300일기도를 올린 뒤, 1790년(정조 14)에 순조를 출산하였으므로 1794년에 칠성각을 짓고 관음전(觀音殿)이라고 쓴 어필을 내렸다. 또한 1795년에는 이 절을 성사(聖寺)라고 칭호 하였는데, 지금까지 이 절의 이명(異名)으로 불리고 있다. 1796년 사성전(四聖殿)을 지었고, 1825년(순조 25)에는 왕실의 자금인 내탕금으로 지족루(知足樓)를 지었다.

1831년에는 상궁 최씨와 하경호(河敬鎬)가 순원왕후(純元王后)에게 청하여 건물을 모두 중창하고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는 넉자를 하사받았다. 그 뒤 1851년(철종 2)에는 용암(庸庵)이 광응전(光膺殿)을 중수하였고, 1880년(고종 17)에도 내탕금을 받아 모든 당우를 중수하였다. 그러나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5년 인법당을 지어 중건하였다. 1959년에는 칠성각, 1966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70년에는 영산각, 1973년에는 요사 2동을 새로 지었다. 1991년 미륵전이 복원되었고, 1993년에는 새로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그 역사와 함께 영험 있는 기도처로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과 영산전·요사채 등이 있으며 경내에 있는 미륵석불입상은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재문(載文)스님 본항목 재문(載文, 1951-) 載文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문스님(載文,_194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재문(載文)스님 법기(法起)문중 ~의 일원이다
재문(載文)스님 성민(聖敏)스님 ~의 제자이다
재문(載文)스님 수락산 내원암 ~에서 출가하다
재문(載文)스님 수락산 내원암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재문(載文)스님 운경(耘鏡)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재문(載文)스님 부산 범어사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지도

  • 내원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57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