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성덕스님(盛德, 1942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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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盛德)스님은 1942년 1월 15일 아버지 이근하와 어머니 윤정숙 사이의 4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이며, 이름은 이영자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3대 독자셨는데 할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무당의 말에 따라 이사도 많이 다니셨다고 한다.  
 
성덕(盛德)스님은 1942년 1월 15일 아버지 이근하와 어머니 윤정숙 사이의 4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이며, 이름은 이영자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3대 독자셨는데 할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무당의 말에 따라 이사도 많이 다니셨다고 한다.  
 
스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유난히 잠이 많아서 땅에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스님을 보고 할머니는 아무래도 명이 짧아 일찍 죽을 것 같다며 걱정을 많이 하셨다. 스님은 지금도 자신이 출가를 했기 때문에 오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유난히 잠이 많아서 땅에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스님을 보고 할머니는 아무래도 명이 짧아 일찍 죽을 것 같다며 걱정을 많이 하셨다. 스님은 지금도 자신이 출가를 했기 때문에 오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스님이 11세 되던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3세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14세 되던 해 출가를 결심하였다. 아버지가 스님을 절까지 데려다주셨는데 거기에는 절박한 사연이 있다. 당시는 6·25전쟁 중이라 피난민들이 많았다. 피난민 한 사람이 아버지를 꾀어서 같이 장사를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의 말만 믿고 장사를 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논과 소들을 다 팔아 그 사람을 따라갔다. 그런데 중간에 그 사람이 돈을 갖고 도망을 가버렸다. 그 일로 인하여 스님 가족은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스님을 마곡사에 데려 갔고 그곳에서 스님은 출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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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11세 되던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3세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14세 되던 해 출가를 결심하였다. 아버지가 스님을 절까지 데려다주셨는데 거기에는 절박한 사연이 있다. 당시는 6·25전쟁 중이라 피난민들이 많았다. 피난민 한 사람이 아버지를 꾀어서 같이 장사를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의 말만 믿고 장사를 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논과 소들을 다 팔아 그 사람을 따라갔다. 그런데 중간에 그 사람이 돈을 갖고 도망을 가버렸다. 그 일로 인하여 스님 가족은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스님을 마곡사에 데려 갔고 스님은 마곡사 영은암에서 일휴(一休)스님을 은사로 하게 되었다.
  
 
===1950년대 은적암 비구니스님들의 생활===
 
===1950년대 은적암 비구니스님들의 생활===

2022년 8월 21일 (일) 10:05 판



정의

성덕(盛德)스님은 정화운동에 참가하고 마곡사 영은암을 중창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2 충남 공주 출생
1956 마곡사 영은암에서 일휴(一休)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0 마곡사에서 적음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봉선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0년대 영은암 중창
2004년 현재 마곡사 영은암 주지
문중 육화(六和)문중
수행지침 신심(信心)을 갖고 사는 것이 승(僧)이다.
수계제자 지오(智悟)·지관(智寬)·지용(智涌)·지후(智厚)

활동 및 공헌

출가

<마곡사 영은암>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P447

성덕(盛德)스님은 1942년 1월 15일 아버지 이근하와 어머니 윤정숙 사이의 4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이며, 이름은 이영자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3대 독자셨는데 할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무당의 말에 따라 이사도 많이 다니셨다고 한다. 스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유난히 잠이 많아서 땅에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스님을 보고 할머니는 아무래도 명이 짧아 일찍 죽을 것 같다며 걱정을 많이 하셨다. 스님은 지금도 자신이 출가를 했기 때문에 오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스님이 11세 되던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3세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14세 되던 해 출가를 결심하였다. 아버지가 스님을 절까지 데려다주셨는데 거기에는 절박한 사연이 있다. 당시는 6·25전쟁 중이라 피난민들이 많았다. 피난민 한 사람이 아버지를 꾀어서 같이 장사를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의 말만 믿고 장사를 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논과 소들을 다 팔아 그 사람을 따라갔다. 그런데 중간에 그 사람이 돈을 갖고 도망을 가버렸다. 그 일로 인하여 스님 가족은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스님을 마곡사에 데려 갔고 스님은 마곡사 영은암에서 일휴(一休)스님을 은사로 하게 되었다.

1950년대 은적암 비구니스님들의 생활

한국전쟁 직전 은적암의 비구니스님들은 옥수동 미타사처럼 각 은상좌별로 각방살이를 했다. 노스님마다 각각 법당을 하나씩 놓고 자신들의 신도와 밭도 따로따로 있었다. 그러다가 노스님 자명(自明) 스님 대에 와서 어른 스님들이 상의하여 법당을 큰 법당 하나로 새로 짓고 요사채도 하나로 짓고 선방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선방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화 전 은적암에는 40~50여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살고 있었고 한국전쟁 때는 옥수동 미타사, 팔정사 등 서울 곳곳의 비구니스님들과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스님 등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피난을 와서 대략 70~80여명 정도가 함께 생활했다. 형편이 매우 어려워 먹을 것이 없어 모두 굶주려가면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마곡사 아래에는 밭이 있었는데 절에 계시던 스님들이 손수 경작하였다. 성덕스님도 그곳 보리밭의 김을 매고 보리를 베고, 대중들과 앉아서 보리이삭을 하나하나 땄다. 당시엔 요즘같이 비료가 흔치 않아서 사람의 인분으로 비료를 대신하였다. 이런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했기에 농사를 짓는 것이 힘이 들었고, 제대로 된 먹을거리 하나 없이 모든 것이 궁색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에 대한 예경심은 지극하였으며 계율을 지킴에 있어 한 치의 허트러짐이 없었다. 은적암에 머물던 비구니스님들이 급감하게 된 것은 정화운동 참가가 계기가 되었다. 정화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도시로 나갔던 비구니스님들 중에 다른 곳으로 떠난 경우가 많았다. 정화가 끝나고는 나이 들고 허약한 노스님들만 남게 되었다.

정화운동 참가 후 서울과 의정부에 사찰을 맡아 일으키고 돌아와 은적암을 중창하다

스님은 정화운동에 참가하여 3일간 단식 침묵시위에 동참하였다. 정화운동 후 스님은 의정부 등지에서 사찰을 두 곳이나 일구었으나 은사스님이 머무는 은적암 살림을 할 사람이 없다는 전갈을 받고 은적암으로 돌아왔다. 노스님을 시봉하며 마곡사 백련암을 지키는 동시에 본사 마곡사에서 1년 동안 특별 채공을 살며 은적암 불사를 하였다. 쓰러져가던 은적암을 허물고 직접 나무를 베어 자재를 마련하며 불사 개축을 하였고, 불사를 위한 천일기도도 성만하였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265)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년, p444~448)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성덕(盛德)스님 본항목 성덕스님(盛德, 1942~) 盛德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덕스님(盛德,_194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성덕(盛德)스님 육화(六和)문중 ~의 일원이다
성덕(盛德)스님 일휴(一休)스님 ~의 법계제자이다
성덕(盛德)스님 마곡사 영은암 ~에서 출가하다
성덕(盛德)스님 적음(寂音)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성덕(盛德)스님 석암(昔岩)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성덕(盛德)스님 마곡사 영은암 ~을 중창하다

지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