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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4일 (토) 17:37 판
월혜(月慧)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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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월혜(月慧) |
법호 | |
속명 | 최순옥(崔順玉) |
출생 | 1895.05.05. |
출가 | 1936년 |
입적 | 1956.10.02.(음8.28) (세수62세, 법랍21세) |
사찰 | 김룡사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월혜(月慧)스님은 무소유의 본분을 간직한 청풍납자비구니로 당대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키는데 공헌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895 | 경북 안동 출생 |
1936 | 대승사 윤필암에서 선진(善眞)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7 | 문경 대승사에서 청안(淸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37~1956 | 사불산 윤필암, 오대산 지장암, 덕숭산 견성암에서 수선 안거 |
1945 |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6 | 문경 김룡사에서 입적(세수 62세, 법랍 21세) |
문중 | 수정(水晶)문중 |
수행지침 | 시은을 입지 않도록 한다. 철저한 무소유.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묘엄(妙嚴)·묘전(妙典)·묘희(妙熙)·혜관(慧觀)·원각(圓覺)·정수(精修)·상운(祥雲)·각진(覺眞).고견(古見)·대은(大恩)·묘공(妙珙)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재일(載日, 4)→청언(淸彦, 5)→태용(泰容, 6)→선진(善眞, 7)→월혜(月慧, 8)→묘엄(妙嚴, 9), 묘전(妙典, 9), 묘희(妙熙, 9), 혜관(慧觀, 9), 원각(圓覺, 9), 정수(精修, 9), 상운(祥雲, 9), 각진(覺眞, 9), 고견(古見, 9), 대은(大恩, 9), 묘공(妙珙, 9) |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월혜(月慧)스님은 1895년 음력 8월 15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경주 최씨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스님은 출가 후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 세속의 인연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36년 불혹을 넘긴 42세 때의 일이었다. 경상북도 안동의 한 포교당에서 청담 큰스님이 법문을 하고 계셨다. “마음은 '나' 라는 생명의 본체이며, 동시에 바로 전 우주의 생명으로서 지식도 사상도 신앙도 아니며 부처님도 하나님도 일체만물도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도 아니며, 설명할 수도 없고, 또한 생각할 수도 없는 그 무엇' 입니다. 물질도 허공도 아닌 이 마음은 우주의 생명입니다. 이 마음은 영원불멸의 실재이며, 절대자유의 생명이며, 우주의 핵심이며, 온 누리의 진리이며, 천지조화의 본체이며, 신의 섭리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입니다.” 큰스님은 부처님 이래 모든 선승들이 거쳐 간 자리에 놓여 있는 존재 이전의 '그 무엇'을 포교당을 가득 메운 대중들에게 설하고 계셨다. 월혜스님의 불법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믿었던 불교는 껍데기 불교에 불과했구나. 오늘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니 참 불교는 아무래도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얼 더 망설이겠는가. 그 참불교를 찾을 수 있는 길을 나도 가야겠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한 순간 발심 출가하게 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안동포교당에서 법문을 들은 지 3일 만에 모든 것을 훌훌 떨쳐버리고 집을 나섰다.
출가 후 엄격한 수행
윤필암은 덕숭산 견성암, 오대산 지장암과 더불어 당시 대표적인 비구니 선방이었다. 스님은 문경의 사불산(四佛山) 윤필암에서 평생 동안 자신의 견처(見處)의 정도를 가늠해주는 은사 선진(善眞)스님을 만났다. 늦게 출가한 만큼 밤새 철야기도와 참선수행에 힘 쏟기를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의 자세로 임했다. 이렇듯 죽기를 각오한 스님의 정진수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방 납자들의 표상이 될 정도로 그 전범(典範)이 되었다. 스님보다 세수는 적었으나 먼저 출가하여 선지(禪旨)를 내면 깊숙이 끌어안고 있던 비구니 본공(本空), 선경(禪敬)스님 등이 도반이 되어 깨침의 도를 주고받았다. 윤필암에서 용맹정진의 수범(垂範)을 보이며 '참나' 를 찾는 데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던 스님은 사미니계를 수지한 이후 덕숭산 견성암과 오대산 지장암을 오가며 수선안거를 놓지 않았다. 당대의 비구 선사 만공(滿空) 큰스님과 한암(漢岩) 큰스님을 참배하게 된 것은 이즈음이었다. 두 선사의 회상에서 수행의 정도를 가늠하며 청풍납자로서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키는 데 한몫을 해내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맏상좌로 묘엄스님을 맞아들이다
다시 윤필암으로 돌아와서 입승 소임을 맡은 스님은 이때 묘엄(妙嚴)스님을 맏상좌로 맞아들이 게 된다. 묘엄스님이 스님의 상좌가 된 데에는 사제(師弟)가 모두 납자의 본분사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엄스님은 아버지 스님이신 청담 큰스님을 통해 학교에서의 공부보다는 불교 공부가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출가를 결심했다. 그로부터 보름 후에 청담 큰스님은 묘엄스님을 윤필암으로 보내면서 '은사를 정하는 일은 대 중이 하는 일이니 대중이 시키는 대로 은사스님을 정하라.' 고 하셨다. 당시만 해도 스님들 중에는 자기 앞으로 약간의 논밭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월혜스님은 자신이 갖고 있던 논 세 마지기마저 사중에 내놓을 정도로 무소유의 본보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묘엄스님은 부처님께서도 출가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갔다는 청담 큰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월혜스님의 상좌가 되겠다는 뜻을 비쳤다. 월혜스님과 묘엄스님의 법연(法緣)은 그렇게 맺어 졌다. 1945년 5월 단오날이었다.
무소유의 본분을 간직한 청풍납자
그 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고, 스님은 범어사에서 동산(東山) 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 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부터 스님의 구도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스님의 평소 지론은 시은을 입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소유를 근본으로 삼는 수행납자로서의 철칙이었고 후학들에게 간곡히 당부한 가르침이었다. 시주의 은혜를 입는 것은 또다시 과보(果報)의 인연 고리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을 목표로 한 수행자는 철저하게 시은에서 초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님의 이같은 지론은 입적하는 그날까지 지켜졌다. 신도가 그 어떤 것을 갖다 드려도 절대로 받지 않았으며, 어쩔 수 없이 받게 되었을 때에는 사찰의 대중 숫자에 맞춰 일정하게 나눠주었다. 또 후학들에게 항상 경책하기를 '발심하여 정진을 멈추지 말라.'고 하였다. '인생은 무상하고, 이는 부처님의 인생관이기에 불법에 들어온 이상 부처님의 인생관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스님의 소신은 금강과 같이 엄격했다. 세속에 대한 매정함이 수행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하루는 스님이 목욕하는 동안 묘엄스님이 은사스님을 생각해서 장삼 등 벗어놓은 옷가지를 빨아 풀을 먹였다. 그런데 풀을 너무 들인 바람에 장삼이 동태처럼 빳빳해져서 도저히 입기가 불편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장삼에 먹인 풀이 다 없어질 때까지 그것을 입었고, 묘엄스님을 불러 “이 옷에 풀을 먹이는데 얼마만큼의 시은을 입어야 하는지 아느냐?” 하며 엄하게 꾸중을 하였다.
입적 전 스님의 유언
입적에 즈음해서 유언을 남겼는데, 널(관)도 사지 말고, 돗자리에 말아서 그대로 화장해 달라는 것이다. 후학들은 그 유언을 따랐다. 빈객(賓客)도 없는 적막한 다비식이었다. 스님은 진정한 선객이었다. 손에는 항상 선종의 중요어록을 집대성한 『선문촬요』가 들려 있었다. 행주좌와(行住坐風) 중에서도 교학(敎學)과 선지(禪旨)를 배우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필암에서 입승 소임을 보던 어느 날, 스님이 갑자기 사라진 일이 있었다. 훗날 알고 보니 충청북도 월악산 신륵사에서 한 철을 안거한 후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입승 소임을 보게 되면 정작 자신은 수행하기가 쉽지 않아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홀로 정진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륵사는 빈 암자로 버려져 있었다. 스님은 이곳에서 보리쌀 한 말로 3개월을 살았다. 구도 열정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중노릇을 잘하려면 월혜한테 가라!" 만공 큰스님이 제방 비구니 납자들에게 던진 이 말씀은 스님의 진면목을 보는 듯하다.
입적
1956년 8월 스님은 세연이 다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도대체 음식을 들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님, 정진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손가락만 들어 보일 뿐이었다. 월혜스님은 그렇게 1주일간 단식정진에 들었다. 그리고 1956년 음력 8월 28일 문경 김룡사에서 홀연히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드니 세수 62세요, 법랍 21세였다.
스님은 비록 늦게 출가를 했지만 납자로서의 20년은 삼세를 뛰어넘었다. 스님의 수행상은 그대로 상좌들에게 이어졌다. 선납자로서, 이 시대 최고의 강사로서, 사회복지의 원력보살로서 스님의 상좌들은 하나같이 한국불교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맏상좌 묘엄(妙嚴)스님은 운문사, 동학사와 함께 대표적인 비구니 강원인 수원 봉녕사승가대학의 학장이며 주지로서 비구니 승가교육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 둘째 상좌 묘전(妙典)스님은 대구 팔공산 반야정사에서 은사의 선풍을 드날리고 있으며, 셋째 상좌 묘희(妙喜)스님은 노인 요양원인 사회복지법인 자제정사를 운영하며 복지 정토의 구현을 실현 하고 있다. 그러나 혜관(慧觀)·원각(圓覺)·고견(高見)·상운(祥雲)·묘공(妙珙)·대은(大恩)스님 등은 안타 깝게도 은사를 따라 입적하였다. 이밖에 묘엄스님 계열의 손상좌 일운(一耘)(울진 불영사 주지) · 진상(眞常)(봉녕사)스님과 묘전스님 계열의 도성(道成)·도경(道敬)·성총(聖聰)·성학(聖學)스님, 그리고 묘희스님 계열의 지묵스님 등 후학 70여 명이 전국 각지에서 스님의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84~388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347
- 하춘생 저, 『깨달음의 꽃』 1, 여래출판사, 2001년 p105
- 전국비구니회,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 예문서원, 2007. p.147
- 하춘생, 『붓다의 제자 비구니』, 국제문화단, 2016, p. 18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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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혜(月慧)스님 | 본항목 | 월혜스님(月慧, 1895~1965) | 月慧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월혜스님(月慧,_1895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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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혜스님(月慧) | 수정문중(水晶) | ~의 일원이다 | |
월혜스님(月慧) | 선진스님(善眞) | ~의 수계제자이다 | |
월혜스님(月慧) | 대승사 윤필암 | ~에서 출가하다 | |
월혜스님(月慧) | 청안스님(淸眼)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월혜스님(月慧)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월혜스님(月慧)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문경 대승사 윤필암(사불산), 평창 월정사 지장암(오대산), 예산 수덕사 견성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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