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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회광일각(廻光壹覺 : 1924~1996) ''' - 조계총림 3·4대 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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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명 : 회광(晦光)스님'''
* ''' 생애·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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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광스님(晦光, 1862~1933)은 친일행정이 있는 한국의 승려이다. 양주 출신으로 19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신흥사에서 정함스님에게 득도한 뒤 건봉사에서 보운스님의 법통을 이었다. </br>
일각 스님은 1924년 2월 15일 평안남도 개천군 중남면 청곡리에서 육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인건(金寅健)이며 아호는 승찬(僧讚).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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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광스님은 역대 고승들의 행적을 적은 《동사열전》에 조선의 마지막 대강백(大講伯)으로 기록되었을 만큼 명망이 높은 승려였다. </br>
1946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수학했고, 24세 때 죽남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어느 날 아이를 때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괴감과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출가했는데, 이광수의 《꿈》, 《세종대왕》 같은 소설이 출가를 결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다. 1947년 10월 15일, 지리산 칠불암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탄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48년 해인사 가야총림에 안거 이후 범어사, 상원사, 칠불암 등 제방 선원에서 12하안거를 성만했다. 1947년 칠불암에서는 7명의 수좌들 과 함께 금오 스님을 모시고 45일간 잠을 자지 않으며 용맹정진했다. 1955년 2월 15일 통도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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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앞두고 1906년 조직된 친일 성향의 불교 단체 불교연구회는 1908년 원종이라는 종단을 창설해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br>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동화사 금당선원의 입승을 지냈으며 1960년 미래사 주지, 1962, 1984년 충무 용화사 주지, 1988년에는 용화사에 당래선원을 열었으며 1971년부터 73년 7월까지 송광사 주지를 지냈다. 한편 1968년부터는 인도와 태국 등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에서 3년간 유학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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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한 이회광은 이용구의 권유에 따라 일본인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임명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성사되자마자 일본의 소토슈(曺洞宗)와 연합을 추진했다. 연합 조인은 1910년 10월 6일의 일로, 이에 따르면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합병된 셈이었다. </br>
1984년 4월 조계총림 제3대 방장에 취임하고 동화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1990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지내다 1994년에 조계총림 제4대 방장에 재임되었다. 스님은 송광사의 가풍인 목우가풍(牧牛家風)을 그저 단순하게 소 먹이는 가풍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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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건너가 연합 조약을 직접 체결한 이회광은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며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조선총독부는 이듬해 사찰령을 발포하여 이회광이 추진한 소토슈와의 연합은 부결하였으나, 그를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사찰령에 따라 통폐합된 30본산 연합체의 대표격인 주지회의원 초대 원장도 맡았다. 원종 고문으로 임명된 다케다는 일본 불교 소토슈 승려로 현성사 주기를 하였고, 을미사변에 참여하였으며 이용구를 통해서 동학의 분열과 일진회의 어용화를 획책한 사람이다. </br>
“소란 놈이 물만 먹는 게 아닙니다. 가끔씩 나락도 뜯어 먹는다 이 말이지. 풀을 먹을 땐 고삐를 당겨야 하는 것이라. 목우가풍이란 바로이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할 때는 더 잘하도록 격려해 주고 악한 일을 할 때는 못하도록 경책(警責)해 주는 것이란 말이지요.”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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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 임제종을 합병하고자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접촉하고 돌아와 합병을 추진했으나, [[금허대련(錦虛大蓮)|강대련]]과의 갈등으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여론이 악화되면서 해인사 승려들이 이회광의 사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1924년 결국 해인사 주지 자리에서도 밀려났다. 조선총독부를 제치고 일본 본국과 직접 접촉하다가 말썽을 일으키는 지나친 친일 성향과 권력욕은 총독부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br></br>
승찬 스님은 1995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으로 있었으며, 1996년 6월 23일 송광사 삼일암에서 다음의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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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고자료] [https://ko.wikipedia.org/wiki/이회광 위키백과] 이회광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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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곧 생사요
 
일어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열반이라
 
생사와 열반이 누구를 말미암아 있는 일이냐
 
옛날부터 오늘까지 손등과 손바닥이니라.  
 
念起念滅卽生死 (염기념멸즉생사)
 
無起無滅卽涅槃 (무기무멸즉열반)
 
生死涅槃誰由事 (생사열반수유사)
 
古往今來手裏掌 (고왕금래수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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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반야심경의 노래’ ‘오계의 노래’ 등을 지어 대중 교화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으며 계율 준수를 강조했다. 수선 납자들에게도 구체적인 수행자의 길과 불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법어를 내려 자상하게 설했다. 다음은 불기 2534년 하안거 조계총림 결제 법어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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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자유평화란 개나 먹는 밥이요
 
안심입명이란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누가 능히 경오년 여름에 결제안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소식을 들어보니 그대들의 아버지가 죽었다 하더라.
 
自由平和是犬食 (자유평화시견식)
 
安心立命亦復然 (안심립명역부연)
 
誰能安居庚午夏 (수능안거경오하)
 
今日消息汝父亡 (금일소식여부망)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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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자유평화요, 또 우리 부처님 문중에서 지상목표로 삼은 것이 안심입명이 아닌가! </br>
 
하지만 이 가장 좋은 것, 또 지상목표도 한낱 개밥에 불과하다. 개밥이란 우리가 먹고 난 나머지 또는 찌꺼기를 말함이니 어찌한 연고이냐. 사람들이 그저 좋은 것만 찾아 하려고 하고 죄다 편한 것만 바라는 것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br>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좋은 것이란 어떠한 것이며 편안한 것이란 어떠한 것인지…… 또 진정(眞正)에는 좋은 것이 있을 리 없고 사실에는 편안한 것도 없는 것이다. </br>
 
좋든가 궂든가 편안하거나 불안하거나 간에 그저 진정으로 그저 사실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 뜻이 아니던가! </br>
 
모든 대중들이여! 누가 능히 이 여름 한 철을 이와 같이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만약에 자신하지 못하면 오늘 그대들의 아버지는 죽어 버린 것이다. </br>
 
※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190~191.
 
  
 
[[분류 : 비구스님]]
 
[[분류 : 비구스님]]

2024년 5월 1일 (수) 13:05 기준 최신판

  • 인물명 : 회광(晦光)스님

회광스님(晦光, 1862~1933)은 친일행정이 있는 한국의 승려이다. 양주 출신으로 19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신흥사에서 정함스님에게 득도한 뒤 건봉사에서 보운스님의 법통을 이었다.
회광스님은 역대 고승들의 행적을 적은 《동사열전》에 조선의 마지막 대강백(大講伯)으로 기록되었을 만큼 명망이 높은 승려였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앞두고 1906년 조직된 친일 성향의 불교 단체 불교연구회는 1908년 원종이라는 종단을 창설해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이때부터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한 이회광은 이용구의 권유에 따라 일본인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임명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성사되자마자 일본의 소토슈(曺洞宗)와 연합을 추진했다. 연합 조인은 1910년 10월 6일의 일로, 이에 따르면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합병된 셈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연합 조약을 직접 체결한 이회광은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며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조선총독부는 이듬해 사찰령을 발포하여 이회광이 추진한 소토슈와의 연합은 부결하였으나, 그를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했다. 사찰령에 따라 통폐합된 30본산 연합체의 대표격인 주지회의원 초대 원장도 맡았다. 원종 고문으로 임명된 다케다는 일본 불교 소토슈 승려로 현성사 주기를 하였고, 을미사변에 참여하였으며 이용구를 통해서 동학의 분열과 일진회의 어용화를 획책한 사람이다.
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 임제종을 합병하고자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접촉하고 돌아와 합병을 추진했으나, 강대련과의 갈등으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여론이 악화되면서 해인사 승려들이 이회광의 사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1924년 결국 해인사 주지 자리에서도 밀려났다. 조선총독부를 제치고 일본 본국과 직접 접촉하다가 말썽을 일으키는 지나친 친일 성향과 권력욕은 총독부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출처 및 참고자료] 위키백과 이회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