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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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재호(宰毫)스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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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문 중 : 미타사
 
*수행지침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
 
*특 기 : 범패, 독서
 
*수계제자 : 철은·광후
 
  
 
==생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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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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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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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7365&cid=40942&categoryId=33081 옥수동 미타사]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1104170000&pageNo=1_1_1_0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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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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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미타사에서 포명(圃明)스님<ref> 금강산 유점사 출신의 선사(禪師). 청담순호(靑潭淳浩,1902~1971)스님은 진주 호국사에서 포명(圃明)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ref>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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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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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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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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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통도사에서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038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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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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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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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
 
==활동 및 공헌==
 
===출생===
 
===출생===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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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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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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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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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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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미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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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 미타사==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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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2888&cid=46617&categoryId=46617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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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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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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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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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573~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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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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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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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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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2024년 4월 27일 (토) 09:44 기준 최신판



정의

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8 경기 양평 출생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
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 미타사에서 포명(圃明)스님[1]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
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
1971~1979 미타사 총무
1978 미타사 강원 졸업
1979~1986 미타사 재무
1981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
1982~1990 초등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 청담종합고등학교 졸업
1992~1998 미타사 주지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문중 미타사문중
생활신조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
특기 범패·독서
수계제자 철은·광후

활동 및 공헌

출생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55세 되던 1992년에 미타사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 4월까지 6년 동안 소임을 다하였다. 2004년 현재 재호스님은 미타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옥수동 미타사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573~575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40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재호(宰毫)스님 본항목 재호스님(宰毫, 1938~19) 宰毫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호스님(宰毫,_193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재호스님(宰毫) 미타사문중 ~의 일원이다
재호스님(宰毫) 대오스님(大悟) ~의 수계제자이다
재호스님(宰毫) 미타사(옥수동) 금보암 ~에서 출가하다
재호스님(宰毫) 포명스님(圃明)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재호스님(宰毫)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재호스님(宰毫) 옥수동 미타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재호스님(宰毫) 안거 ~을(를) 성만하다 옥수동 미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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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옥수동 미타사 :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15-1



주석

  1. 금강산 유점사 출신의 선사(禪師). 청담순호(靑潭淳浩,1902~1971)스님은 진주 호국사에서 포명(圃明)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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