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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양 용안사 창건주 재현스님(在玄, 1946生, 비구니)에 의하면 1987년에 은사인 상덕(祥德)스님이 화상사고로 크게 다쳐서 간병하기에 마땅한 사찰을 찾던 중이었으나, 생각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학이 내려앉는 꿈을 꾸고 길을 나섰다가 명학역 근처 안양시 박달동의 민가를 소개받아 그 집을 절로 꾸며 용안사를 창건했다고한다. </br> | + | 안양 용안사 창건주 [[재현스님(在玄, 1946生, 비구니)]]에 의하면 1987년에 은사인 상덕(祥德)스님이 화상사고로 크게 다쳐서 간병하기에 마땅한 사찰을 찾던 중이었으나, 생각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학이 내려앉는 꿈을 꾸고 길을 나섰다가 명학역 근처 안양시 박달동의 민가를 소개받아 그 집을 절로 꾸며 용안사를 창건했다고한다. </br> |
당시 박달동의 일부인 명학동(鳴鶴洞)은 현재 경기도 안양시 안양8동에 위치해 있다. 안양시청 홈페이지의 '연혁'에 의하면 1994년12월26일에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일부가 안양동으로, 안양동의 일부가 박달동으로 법정동 경계가 개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박달동이 안양동으로 행정구역 개편된 듯 하다. </br> | 당시 박달동의 일부인 명학동(鳴鶴洞)은 현재 경기도 안양시 안양8동에 위치해 있다. 안양시청 홈페이지의 '연혁'에 의하면 1994년12월26일에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일부가 안양동으로, 안양동의 일부가 박달동으로 법정동 경계가 개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박달동이 안양동으로 행정구역 개편된 듯 하다. </br> | ||
또 이 홈페이지의 '역사 및 지명유래'에 의하면 안양시지(安養市誌)에 기록된 구전에 따르면 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1644)이 그의 부친 심간(沈諫)의 묘를 수푸루지(林谷洞) 뒷산<ref> 현재는 안양시 비산1동</ref>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돌 밑에 학(鶴)이 두 마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 마리는 양명고등학교 옆에 위치한 오미산(鳥尾山) 뒤로 날아갔고, 다른 한 마리는 안양경찰서와 명학국민학교 사이에 있는 바위에 날아와 앉더니 슬피 울고는 어디론가 날라갔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학이 울었던 바위라 하여 명학바위라 칭했고, 마을 이름도 바위 이름을 취해 명학동(鳴鶴洞) 이라 부른다고 한다. </br> | 또 이 홈페이지의 '역사 및 지명유래'에 의하면 안양시지(安養市誌)에 기록된 구전에 따르면 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1644)이 그의 부친 심간(沈諫)의 묘를 수푸루지(林谷洞) 뒷산<ref> 현재는 안양시 비산1동</ref>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돌 밑에 학(鶴)이 두 마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 마리는 양명고등학교 옆에 위치한 오미산(鳥尾山) 뒤로 날아갔고, 다른 한 마리는 안양경찰서와 명학국민학교 사이에 있는 바위에 날아와 앉더니 슬피 울고는 어디론가 날라갔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학이 울었던 바위라 하여 명학바위라 칭했고, 마을 이름도 바위 이름을 취해 명학동(鳴鶴洞) 이라 부른다고 한다. </br> |
2024년 3월 23일 (토) 19:16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안양 용안사(龍眼寺)
안양 용안사 창건주 재현스님(在玄, 1946生, 비구니)에 의하면 1987년에 은사인 상덕(祥德)스님이 화상사고로 크게 다쳐서 간병하기에 마땅한 사찰을 찾던 중이었으나, 생각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학이 내려앉는 꿈을 꾸고 길을 나섰다가 명학역 근처 안양시 박달동의 민가를 소개받아 그 집을 절로 꾸며 용안사를 창건했다고한다.
당시 박달동의 일부인 명학동(鳴鶴洞)은 현재 경기도 안양시 안양8동에 위치해 있다. 안양시청 홈페이지의 '연혁'에 의하면 1994년12월26일에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일부가 안양동으로, 안양동의 일부가 박달동으로 법정동 경계가 개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박달동이 안양동으로 행정구역 개편된 듯 하다.
또 이 홈페이지의 '역사 및 지명유래'에 의하면 안양시지(安養市誌)에 기록된 구전에 따르면 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1644)이 그의 부친 심간(沈諫)의 묘를 수푸루지(林谷洞) 뒷산[1]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돌 밑에 학(鶴)이 두 마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 마리는 양명고등학교 옆에 위치한 오미산(鳥尾山) 뒤로 날아갔고, 다른 한 마리는 안양경찰서와 명학국민학교 사이에 있는 바위에 날아와 앉더니 슬피 울고는 어디론가 날라갔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학이 울었던 바위라 하여 명학바위라 칭했고, 마을 이름도 바위 이름을 취해 명학동(鳴鶴洞) 이라 부른다고 한다.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31~234.
- ↑ 현재는 안양시 비산1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