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긍탄스님(亘坦, 1885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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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bomunsa.or.kr/ 보문동 보문사]'''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 '''[http://www.bomunsa.or.kr/ 보문동 보문사]'''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2024년 3월 14일 (목) 22:20 판



정의

설월(雪月) 긍탄(亘坦)스님은 대한불교보문종을 창종하고 초대, 제2대 종정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85 서울출생
1891 탑골승방 보문사에서 세장스님을 은사로출가
1902 금강산 장안사에서 벽하(碧霞)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03 동학사 강원 졸업
1910 만화(萬化)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12~1945 보문사 주지
1937~1952 상원사, 대성암, 화엄사 구층암, 견성암, 대원사 등 안거 성만
1938 도봉산 원통사 금강계단에서 용성(龍城)스님을 계사로 다시 구족계(비구니계) 수지
1954 한국불교 승단정화에 적극적으로 참여
1972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보문종 창종
대한불교보문종 초대,2대 종정 추대
비구니 승단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짐
1980 1980.7.17. 입적(세수96세, 법랍90세)
문중 보문종(普門宗)문중
수행지침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니라.
생활신조 한 순간도 수행의 끈을 놓지 말라.
수계제자 은영(恩榮)·명오(明悟)·은각(思覺)·천보암 황법우·은강(恩岡)·은득(恩得)·은진(恩眞)
  • 정혜겸수(定慧兼修)는 물론 실천불교에 앞장서고, 전통 불교 의식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11세 때 이미 범패, 바라, 나비, 도량게 등 불교 의식에 일가견을 이룸.

활동 및 공헌

출가

설월당 긍탄(雪月堂 亘坦)스님은 1885년 4월 15일 지금의 왕십리에서 아버지 경주 이씨와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일곱 살난 딸을 보문사에 세장스님을 은사로 긍탄스님을 출가시키고 자신도 철원 보개산 석대암으로 출가를 하였다.
어머니는 스님의 수행에 많은 지침이 되었는데 그 신심이 장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금강경(金剛經)』과 『관음경(觀音經)』을 하루 한 편씩 독송하였으며 문수, 지장, 관음, 주력(呪力)을 천 편씩 하셨다고 한다. 여러 곳의 선방에서 정진에 해태하지 않았으며 방한암(方漢岩)스님께서도 정서여장천(情緖如長天)이요, 사소흡하수(思素恰河水)라 칭찬하셨다고 한다. 입적하실 때에도 새벽에 서기광명(瑞氣光明)이 도량에 가득하더니 그날 오후 앉아서 입적에 드셨다고 한다.

탄인도(坦引導)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스님은 나이 11세에 벌써 범패, 바라, 나비, 도량게 등 모르는 의식절차가 없었다. 그리하여 탄인도(坦引導)스님이라는 호가 붙을 정도로 범패에 밝았다.
스님은 18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벽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19세에 동학사에서 경학(經學)을 마치고 보문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절 살림이 매우 어려워져 있었다. 절에서 일을 하던 청운이란 자가 절의 땅문서를 훔쳐서 팔아 그 돈을 다 써버린 것이었다. 스님은 관세음보살만 염(念)했고, 그 길로 탁발승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일본을 위한 식량공급지로 전락하여 황폐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독립 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등 인심이 흉흉하고 불안한 상황이었다. 승려가 사대문 안에 드나드는 것은 겨우 허락이 되었으나 산중의 비구스님들은 누룩을 만들거나 부역을 했고, 비구니스님들은 베를 짜거나 농사를 지으면서 연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시국에 탁발이 잘 될리 만무여서 양어깨에 바랑 자국이 혹처럼 부풀고 발꿈치가 아프도록 다녀야 겨우 한 되박 정도의 시주를 받는 것이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3년 탁발로 겨우 논 아홉마지기를 불량답(佛糧畓)으로 장만하여 놓고 그만 병이 났다. 그런 와중에 금강산 장안사에 방부를 들이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금강산 구석구석을 다니며 가는 절 마다 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보문사 주지로 취임

긍탄스님은 1910년 나이 26세에 만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고, 1912년 보문사의 주지로 취임하였다. 주지 소임을 맡은 후에 호구책도 어려운 형편에 관음전을 신축하고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지금은 소실된 만세루를 중창하였다.

긍탄스님의 인품

스님은 성품이 점잖고 자상한 성품이었다. 한 번은 상좌이신 은영스님이 탁발을 나갔는데 돌아올 때까지 공양도 제대로 드시지 아니하고 문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래서 상좌스님은 “스님께서 저토록 걱정하시니 내 어찌 탁발을 하랴”하며 그만 두었다고 한다. 긍탄스님의 마음은 마치 멀리 있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았다. 스님은 평생 지극한 보시행을 펼쳤는데, 무엇이든지 베푸는데 아낌이 없었다. 늘 소일거리를 놓지 않았던 스님은 88세 되시던 해에 눈물겹게 마련한 얼마간의 돈을 불사에 보태 쓰라며 내놓아 대중이 울먹였던 일도 있었다.

수행

두번째 줄 정중앙이 긍탄스님

스님은 60세가 되던 해부터 생활 속에서 정진을 거듭하는 가운데 10여년 간 상원사, 수덕사 견성암, 칠불암, 수정암, 윤필암, 부도암 등 여러 선방에서 수행을 하며, 참선하는 이는 누구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의 유명한 일화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보문사에서 법희스님과 함께 수행정진에 몰두하고 있다가 인민군의 습격을 받았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사건이라 경내에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선삼매에 든 두 스님은 추후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를 보던 인민군들도 감탄해 마지않아 그대로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스님은 70세에 우연히 피부병을 얻게 되었는데 전생의 업보라 하시면서 『금강경(金剛經)』과 《츰부다라니》를 지극정성으로 독송하여 3년 만에 완쾌되었다. 부처님의 위신력이 늘 성성함을 시현(示顯)한 것이다.
스님은 은영, 명오스님 등 일곱 분의 상좌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맏상좌인 은영스님은 지금의 보문사를 이룩한 장본인이다. 보문사의 많은 불사는 대중을 이끌어가는 긍탄스님의 덕과 은영스님의 원력이 하나되어이뤄낸 결과임을 대중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74

입적

긍탄스님은 1980년 7월 17일 세수 96세, 법랍 89세로 입적에 들었다. 스님의 문도들은 생전의 스님을 기리고자 보광전 한곳에 유물장을 마련했다. 그러나 애석하게 이듬해 정월 화재로 인해 전부 소실되고 다만 방안에 걸려있는 영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수계제자

스님의 수계 제자로는 은영(恩榮)·은각(恩覺)·명오(明悟)·은득(恩得)·은강(恩岡)·은진(恩眞)스님 등이 있다.

보문사

보문사 대웅전
보문사 석굴암

보문사는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이다. 1115년(예종 10)에 담진(曇眞)이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조그만 암자로, 탑골에 있었으므로 탑골 승방이라 하였다. 그 뒤 1692년(숙종 18)에 대웅전을 개축하는 등 수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45년부터 비구니 은영(恩榮)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원래는 조계종 산하의 소속 사찰이었으나 1972년 독립하여 보문종을 창종하고 보문종의 본산이 되었는데, 현재 그 규모면에서 굴지의 거찰(巨刹)이 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석굴암·호지문·선불장(選佛場)·보광전(普光殿)·산령각(山靈閣)·석굴암노전(石窟庵爐殿)·삼성각(三聖閣)·별당·요사채, 한의원 및 특별양로원이 있는 시자원(施慈園) 등이 있다. </br 이 가운데 석굴암은 은영이 그 분야의 권위자를 모아 준공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각과 설계를 하였고, 공사비만 1억을 들여 1972년 부처님 오신 날에 착공하였으며 3년 6개월의 역사 끝에 점안식을 가졌다. 경주 석굴암과 똑같은 규모로 만들었으나, 구성면에서 볼 때 경주 석굴암은 정면이 1문인 데 비하여 이곳은 3문이며, 실내 벽을 이중으로 만들고 실내 천장으로 공기가 유통되게 하였다. 단지, 경주 석굴암의 전실에 있는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을 이곳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br 특기할 만한 오래된 문화재는 없으나 석굴암 앞의 높은 단 위에 세워진 팔각구층석탑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팔각구층석탑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탑 안에는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여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은 세계 유일의 비구니들만으로 구성된 보문종의 총본산으로서 언제나 150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수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도의 분위기가 특히 엄숙한 도량이다.

참고문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긍탄(亘坦)스님 본항목 긍탄스님(亘坦, 1885~1980) 亘坦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긍탄스님(亘坦,_1885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긍탄(亘坦)스님 보문종문중(普門宗) ~의 일원이다
긍탄(亘坦)스님 세장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긍탄(亘坦)스님 서울 보문사(보문동3가) ~에서 출가하다
긍탄(亘坦)스님 벽하(碧霞)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긍탄(亘坦)스님 만화(萬化)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긍탄(亘坦)스님 용성(龍城)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다시 받음)
긍탄(亘坦)스님 서울 보문사(보문동3가)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긍탄(亘坦)스님 대한불교보문종 ~을(를) 창종하다
긍탄(亘坦)스님 대한불교보문종 ~의 직임을 수행하다 종정
긍탄(亘坦)스님 안거 ~을(를) 성만하다 평창 상원사,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구례 화엄사 구층암, 예산 수덕사 견성암, 산청 대원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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