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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스님(慧圓, 1870년대 전후~ 1955)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며, ‘慧圓’ 외에 ‘慧遠’이라고도 썼다. [[두옥(斗玉)문중|두옥문중]]의 일원이며 제주불교를 중흥시킨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生, 비구니)|봉려관스님]]과 사형사제 간이다. 상좌 [[광호스님(光毫, 1915生, 비구니)|광호스님]]에 의하면 혜원스님은 대흥사 청신암, 운문사 청신암 등에 주석했으며, 후에 광주 흥룡사에서 입적하였다.
 
혜원스님(慧圓, 1870년대 전후~ 1955)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며, ‘慧圓’ 외에 ‘慧遠’이라고도 썼다. [[두옥(斗玉)문중|두옥문중]]의 일원이며 제주불교를 중흥시킨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生, 비구니)|봉려관스님]]과 사형사제 간이다. 상좌 [[광호스님(光毫, 1915生, 비구니)|광호스님]]에 의하면 혜원스님은 대흥사 청신암, 운문사 청신암 등에 주석했으며, 후에 광주 흥룡사에서 입적하였다.
  
민며느리로 시집 갔는데, 신랑이 꼬마 때 사망하였다. 후에 시댁 측에서는 이런 상황에도 실망하지 않고 올곧게 열심히 살아준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많은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불명을 혜원이라 하였다. 출가 때 가지고 온 재산이 많아서 공동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너그러웠으며 특히 손주상좌를 사랑으로 대했다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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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되기 전 어린 시절 민며느리로 시집 갔는데, 신랑이 꼬마 때 사망하였다. 후에 시댁 측에서는 이런 상황에도 실망하지 않고 올곧게 열심히 살아준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많은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불명을 혜원이라 하였다. 출가 때 가지고 온 재산이 많아서 공동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너그러웠으며 특히 손주상좌를 사랑으로 대했다 전해진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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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7일 (목) 09:58 판

혜원스님(慧圓, 1870년대 전후~ 1955)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며, ‘慧圓’ 외에 ‘慧遠’이라고도 썼다. 두옥문중의 일원이며 제주불교를 중흥시킨 봉려관스님과 사형사제 간이다. 상좌 광호스님에 의하면 혜원스님은 대흥사 청신암, 운문사 청신암 등에 주석했으며, 후에 광주 흥룡사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이 되기 전 어린 시절 민며느리로 시집 갔는데, 신랑이 꼬마 때 사망하였다. 후에 시댁 측에서는 이런 상황에도 실망하지 않고 올곧게 열심히 살아준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많은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불명을 혜원이라 하였다. 출가 때 가지고 온 재산이 많아서 공동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너그러웠으며 특히 손주상좌를 사랑으로 대했다 전해진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213~ 214.
  • 혜달스님,『봉려관, 근대 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우다』. 조계종출판사, 2021, p.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