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스님(性海, 188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재가 수행자 정덕) |
(→장성 백양사) |
||
80번째 줄: | 80번째 줄: | ||
===[http://www.baekyangsa.com/?skipintro=1 장성 백양사]=== | ===[http://www.baekyangsa.com/?skipintro=1 장성 백양사]=== | ||
− | 장성 백양사 만암스님은 춘궁기가 되면 불사를 일으켜 배고픈 민초들에게 인건비를 지불해서 그들이 배고픔을 면하도록 하였고, 더불어 죽세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해서 배고픈 마을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만암스님의 원력이었다. 담양 재력가였던 국채웅과 성해스님의 적극 지원이 있었고, 그리하여 한 때는 장성 백양사가 담양 백양사라 | + | 장성 백양사 만암스님은 춘궁기가 되면 불사를 일으켜 배고픈 민초들에게 인건비를 지불해서 그들이 배고픔을 면하도록 하였고, 더불어 죽세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해서 배고픈 마을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만암스님의 원력이었다. 담양 재력가였던 국채웅과 성해스님의 적극 지원이 있었고, 그리하여 한 때는 장성 백양사가 담양 백양사라 불리기도 했다. |
− | 어느 날, 백양사 만암스님이 우송거사에게 | + | 어느 날, 백양사 만암스님이 우송거사에게 시주를 받으러 오셨다. |
“어디가 아프십니까?” | “어디가 아프십니까?” | ||
“앉아도 편치 않고 서도 편치가 않습니다.” | “앉아도 편치 않고 서도 편치가 않습니다.” | ||
“장에서 파는 까만색 고무줄을 보셨지요. 그 고무줄이 늘어나기만 해도 쓸모가 없고 줄어들기만 해도 쓸모가 없습니다.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니까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 “장에서 파는 까만색 고무줄을 보셨지요. 그 고무줄이 늘어나기만 해도 쓸모가 없고 줄어들기만 해도 쓸모가 없습니다.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니까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 ||
− | 만암스님은 정작 해야 할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백양사로 되돌아갔고, 백양사 불사가 한창이던 중 백양사를 방문한 우송거사는 | + | 만암스님은 정작 해야 할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백양사로 되돌아갔고, 백양사 불사가 한창이던 중 백양사를 방문한 우송거사는 만암스님에게“이렇게 큰 불사를 하시면서 나에게 연락도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한다. |
국채웅은 아들 네 명의 이름으로 백양사 사천왕 조성 불사를 단독으로 하였고, 장녀 성해와 아들 네 명에게 사천왕처럼 삼보를 잘 수호하라는 당부도 한다. | 국채웅은 아들 네 명의 이름으로 백양사 사천왕 조성 불사를 단독으로 하였고, 장녀 성해와 아들 네 명에게 사천왕처럼 삼보를 잘 수호하라는 당부도 한다. | ||
− | 이처럼 담양 거부였던 국채웅이 불교에 관심을 갖고 기근구제와 사찰 불사에 많은 보시를 하게 된 것은 장녀 국성해의 영향이 컸다 하겠다. | + | 이처럼 담양 거부였던 국채웅이 불교에 관심을 갖고 기근구제와 사찰 불사에 많은 보시를 하게 된 것은 장녀 국성해의 영향이 컸다 하겠다. |
===제주 한라산 관음사=== | ===제주 한라산 관음사=== |
2023년 1월 9일 (월) 16:58 판
성해(性海)스님 | |
---|---|
법명 | 성해(性海) |
법호 | 학천(鶴天) |
속명 | 국추(鞠秋) |
출생 | 1889 |
출가 | 1949년 |
입적 | 1982.2.15 (세수93세, 법랍34세) |
사찰 | 우송사 전남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257-1 우송사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성해(性海)스님은 제23교구본사 관음사 중창불사(1941년)를 단독 시주하고 감독해서 원만 회향케 하였으며, 특히 근대제주불교발전에 기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889 | 전남 담양읍 담주리에서 출생 |
1907 | 만암스님으로부터 보살계명 정덕(定德)을 받다 |
1907 | 정덕(定德)선방에서 좌선수행을 시작하다 |
1932 | 봉려관스님이 상좌로 인정하다 |
1939 | 제주 한라산 관음사 시찰 |
1940 | 제주 한라산 관음사 중창불사 단독시주 및 불사 감독 |
1941 | 제주 한라산 관음사 중창불사 회향 |
1960 | 담양 보광사에서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3 |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82 | 음력 2월 15일 우송사에서 입적(세수 93세, 법랍 34) |
문중 | 두옥문중(斗玉) |
수행지침 | 계행계족(戒行戒足), 문사수혜(聞思修慧), 일중식(日中食), 일행삼례(一行三禮) 사경, 법화경독송, 간화선. |
수계제자 | 법선, 법명, 법경, 법희, 법조, 법주, 법현, 법정 |
활동 및 공헌
재가 수행자 정덕
성해스님은 1889년 7월 21일 전남 담양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은 국채웅(鞠埰雄,1871-1949)[1]이고 모친은 은천(殷川, 1870-1929)이며, 스님의 속명은 국추(鞠秋)이다.
국추가 17세 되던 해 13세인 신랑과 혼인하였으나, 폐결핵으로 시어머니 방에서 투병하던 새신랑과는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한 채, 일 년도 채 안 돼 혼자가 된다. 국추는 하녀가 들여온 밥상을 내보내고 어서 빨리 죽어질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이를 알게 된 담양 거부인 국채웅이 18세 된 장녀 국추를 친정으로 데려와 선방을 건립한 후,‘정덕선방’편액을 달고 집안 대대로 모시던 불상을 봉안하고 정덕(국성해 보살계명)을 비롯해 다섯 명이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해인사 노스님이 직접 와서 화두 참구하는 법, 일행삼례(一行三禮)의 사경법, 염불, 독송, 일중식(日中食)[2] 등을 전수하였고, 이때부터 재가자 정덕은 수행에 전념한다.
정덕을 비롯해 다섯 명은 수월스님을 만나고자 북간도로 향하였고, 북간도에서 묘향산, 금강산, 한라산까지 고승대덕을 친견하여 법을 듣고, 사유하고 익혀 지혜증장 수행에 전념한다. 1920년에는 부친 우송거사가 정자를 건립하여 우송정이라 이름하였는데, 훗날 우송정은 성해스님의 수행처가 되었고, 1967년 7월 11일 대한불교조계종 우송사로 등록된다.
성해스님은 언양 석남사가 처음 선방을 개원할 때 선원장 인홍(仁弘)스님의 요청으로 본연(本然)스님과 함께 하안거 결제를 한다. 본연스님[3]은 성해스님의 종조모이며, 좌탈입망한 도인이기도 하다.
은사 봉려관스님과의 인연
1932년 성해스님은 제주도 한라산에 도인스님이 계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반 다섯 명과 함께 한라산으로 갔다. 한라산 도인스님은 성해스님 일행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흙덩어리 반죽으로 집을 짓고 계셨다. 점심 공양 때가 되어서야 봉려관스님은 눈길을 주셨다고 한다. 성해스님 일행이 가사 두 냥을 모시고 왔다고 하자, 봉려관스님은 “무신년 단옷날에도 운대사에게서 가사 공양을 받았었는데 같은 날 참 기이한 인연이다. 내 상좌하자”고 하면서 시커먼 그릇에 숟가락 다섯 개를 꽂아 흙 묻은 손으로 내밀었다.
성해스님이 “저는 위장이 나빠서 밥을 잘 먹지 못합니다”고 하자, 봉려관스님이 “가서 물 한 그릇 떠다 줘라”한다. 성해스님이 그 물을 받아 마시자 신기하게도 메스꺼움이 진정되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32년 산천단에서 봉려관스님과 성해와의 인연은 훗날 봉려관스님이 세 번에 걸쳐 담양을 방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봉려관스님은 성해스님의 부친인 국채웅(우송거사)을 만나게 된다. 그 결과 국채웅이 제주불교계 각종 불사에 거금을 출연하게 되었고, 이는 국성해스님의 중간역할이 있어서다.
49년 일중식 법화경 독송
성해스님은 일중식수행, 법화경 독송, 간화선참구에 철저했다. 성해스님은 매월 초하루 보름이면 사시에 공양을 하고, 다음날 사시까지 물을 포함해서 입에 아무것도 대지 않고 24시간을 법화경만 독송하는 수행을 49년간 여일하게 하셨다. 신도들과 함께하는 일중식 수행으로는 1월, 5월, 9월 수행이 있었다. 1월은 부모복, 스승복을 발원하는 일중식 수행이었고, 5월은 형제자매복, 도반복을 다지는 일중식 수행이었으며, 9월은 자식복과 제자복 그리고 아랫사람복을 심는 원력수행이었다.
장성 백양사
장성 백양사 만암스님은 춘궁기가 되면 불사를 일으켜 배고픈 민초들에게 인건비를 지불해서 그들이 배고픔을 면하도록 하였고, 더불어 죽세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해서 배고픈 마을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만암스님의 원력이었다. 담양 재력가였던 국채웅과 성해스님의 적극 지원이 있었고, 그리하여 한 때는 장성 백양사가 담양 백양사라 불리기도 했다.
어느 날, 백양사 만암스님이 우송거사에게 시주를 받으러 오셨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앉아도 편치 않고 서도 편치가 않습니다.” “장에서 파는 까만색 고무줄을 보셨지요. 그 고무줄이 늘어나기만 해도 쓸모가 없고 줄어들기만 해도 쓸모가 없습니다.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니까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만암스님은 정작 해야 할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백양사로 되돌아갔고, 백양사 불사가 한창이던 중 백양사를 방문한 우송거사는 만암스님에게“이렇게 큰 불사를 하시면서 나에게 연락도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한다. 국채웅은 아들 네 명의 이름으로 백양사 사천왕 조성 불사를 단독으로 하였고, 장녀 성해와 아들 네 명에게 사천왕처럼 삼보를 잘 수호하라는 당부도 한다. 이처럼 담양 거부였던 국채웅이 불교에 관심을 갖고 기근구제와 사찰 불사에 많은 보시를 하게 된 것은 장녀 국성해의 영향이 컸다 하겠다.
제주 한라산 관음사
봉려관스님은 생전에 대가람의 위용을 갖춘 한라산 관음사 중창불사를 기획했지만 이를 이루지 못하고 1938년 입적하였고, 성해스님은 봉려관스님의 숙원을 완성시키고자 부친 국채웅을 설득해서 1939년 드디어 관음사를 시찰한다. 목수 32명과 목재 등을 배 두 척에 싣고 제주에 도착한 국성해는 친히 관음사 중창불사를 감독하였고, 1941년 고전 팔각포 대웅전과 선방, 해월각, 노전, 종각 등 6동을 완공시켜 대가람의 위용을 갖추게 한다. 이때 중창불사의 도목수는 훗날 제주 한라산 관음사 주지를 역임했던 지선스님의 백부이다.
근대제주불교역사 자료에는 국채웅과 국추의 이름이 종종 보인다. 제주 월성사(고산)에도 국채웅의 공덕비가 있고, 제주불교 보시자 명단에도 국채웅과 국추가 보인다.
불교정화에 참여하다
불교 내 자정운동이었던 불교정화운동에 국성해는 적극 참여한다. 국성해는 비용 지원은 물론 대처승 측의 복장에 비해 눈물 나게 남루한 비구 측 스님들의 장삼을 일색으로 일괄 지어 드렸다. 광주 흥룡사 법희(法稀)스님 구술에 의하면, 선학원에 모인 스님들의 식량과 찬거리 걱정을 하자, 국성해스님이 비구 측 스님들이 주석했던 선학원에 쌀과 찬거리를 그때그때 실어 보내주어서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성해스님은 도천스님, 도광스님을 도와 담양 매곡리의 제각과 그 일대의 논밭을 사들여서 보광사를 재 창건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보살계 불사 비용을 단독으로 시주하거나 가사불사 단독 설판시주, 다리 놓기, 우물파기 등등 권선문을 들고 찾아오는 전국 화주승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성해스님 입적하시다
성해스님은 1907년부터 간화선수행을 받아들이고 참구하는 재가제자였지만 출가자와 다름없는 수행을 하신 분이다. 1907년부터 조석예불은 물론 오신채, 육식을 금하였고, 49년간 초하루 보름이면 일종식하면서 법화경독송수행을 하셨으며, 법화경 1행을 쓰고 3배를 하는 일행삼례 수행, 간화선수행에 철저한 분이었다. 아버지 생전에 삭발하는 것이 불효라 하여 부친 생존 시에는 재가제자로서 출가자와 다름없는 수행을 하였고, 아버지의 재물이 부처님 일에 보시되어 아버지가 복을 지을 수 있도록 중간역할을 하였는데, 부처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수행자라 하겠다. 부친이 별세하시고 주변정리가 되자, 장녀 국추는 드디어 출가수행자 성해의 길을 걸어 나가게 된다.
성해스님은 극락의 길은 곧 성불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굳건히 하였고, 일사일언(一事一言)에 흐트러짐이 없는 수행을 하였다. ‘계행(戒行)으로 계족(戒足)을 얻어야 불보살 인연을 만나 성불할 것이니, 날 따라 오려거든 계율을 잘 지켜라. 인연을 잘못 맺으면 동타지옥(同墮地獄)한다’고 하셨다.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같은 밥상에서 함께 먹지도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도 않으셨다. 성해스님은 “나는 석가모니불 열반재일에 맞춰서 법당의 부처님처럼 앉아서 갈 테니 좌관(坐棺)짜는 법, 관에 시신 고정하는 법 등 백양사 다비식 법식을 말 할 테니 잘 기억해라. 그렇지만 사리를 수습하려고 명당수 항아리는 묻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지 1년 후 1982년 2월 15일 열반재일에 좌탈입망(坐脫立亡)하셨다.
부처님 일이라면 소홀히 하지 않는 국성해스님으로 인해 봉려관스님은 물론 근대제주불교계, 장성 백양사, 담양 보광사, 해남 대흥사, 화엄사 등의 수많은 불사에 담양 거부 국채웅의 자금이 보시되었다고 하겠다.
작성자: 법정스님(우송사), (사)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참고 자료
- 제주불교, 제주불교의 대모-관음사 중흥 위해 헌신한 성해․법선 스님 (2014년) http://www.jejubulgyo.com/news/articlePrint.html?idxno=13088
- 담양뉴스, 2018담양천년 특별기획Ⅱ / 담양의 인물(6) : 우송 국채웅 (2017년) http://www.d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12
- BBS, 대원각 보살은 근대 제주불교 일으킨 ‘대모(大母)’(2019년)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8475
- 담양군민신문, 천년담양 설화 및 전통 이야기-3 (2020년) http://www.newsd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2304
- 아주경제, ①느려서 행복하다…삼지내 돌담과 고택의 향기 (2021년) https://www.ajunews.com/view/20211111143841541
- 공공누리, 유발승 수계 기념 사진 (2021년) 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recommendIdx=38997&division=img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성해(性海)스님 | 본항목 | 성해스님(性海, 1889~1982) | 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해스님(性海,_188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
성해(性海)스님 | 두옥문중(斗玉) | ~의 일원이다 | ||
성해(性海)스님 | 봉려관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성해(性海)스님 | 장성 백양사 | ~에서 출가하다 | ||
성해(性海)스님 | 고암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
성해(性海)스님 | 동산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
성해(性海)스님 | 관음사 | 를 중창하다 | ||
성해(性海)스님 | 보광사 | 시주하다 | 보광사 창건에 주변 논밭을 매입하여 시주 | |
성해(性海)스님 | 불교정화운동 | 에 참여하다 |
지도
- 우송사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257-1
주석
- ↑ 국채웅은 우송거사라 불린다. 거부(巨富)였지만 자신이 단독 시주한 백양사 사천왕 점안식에서 걸인이 떨어뜨린 보리밥을 주워 먹을 정도의 인물이다. 만석꾼의 재산이라 말하지만, 실제는 만석을 훨씬 넘긴 재산을 가진 인물이다. 국채웅은 담양을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해 담양상회 창업(일본인 상권에 대응한 백화점에 상응함), 전등회사 설립(순수 조선인의 출연금), 단독으로 전기회사 유치, 전남산업조합설립, 주식회사 우송농장, 농촌 중견부인 양성소(숙식제공)를 설립하였고, 1932년에는 담양 유치원을 설립하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우리소리연구에 힘을 기우리는 등 교육문화 창달에 앞장섰고,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던 담양청년회 활동, 독립자금 지원을 하였으며, 소작농 등 사회적 약자를 도운 인물로 알려졌다. 백양사 만암스님과는 자주 왕래하였고, 만암스님께서 춘궁기 사업을 시작할 때면 늘 국채웅에게 자금을 차용하였는데, 원금은 반드시 갚으셨다고 한다. 장녀 성해스님이 많은 불사에 단독보시하고 거액을 시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국채웅의 신심과 재력이 뒷받침해 주어서다.
- ↑ 아침과 저녁을 굶고 낮에 한 번만 먹음
- ↑ 본연스님의 속가 살림은 어려웠다. 10대에 논 10마지기를 받고 국씨 가문의 10대 어린 시절에 죽은 영가와 혼인한다. 본연스님은 오로지 참선수행하셨으며, 훗날 순평암 부인선원의 숨은 도인이라 불리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