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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스님(宗植, 1944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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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선암사에 머물면서 수행 정진 중인 종식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견(慧見)·지율(智津)·경률(暻律)스님이 있다.
 
1990년부터 선암사에 머물면서 수행 정진 중인 종식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견(慧見)·지율(智津)·경률(暻律)스님이 있다.
  
==연관검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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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견성암]], [[수덕사]], [[법희스님]], [[쌍계사]],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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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4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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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54.
===관련자료===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43~349.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54.
 

2022년 10월 17일 (월) 13:37 판



정의

종식스님은 법희 노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4 경남 진양 출생
1966 수덕사 견성암에서 영명(靈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7 수덕사에서 벽초(碧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7 쌍계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6년간 견성암에서 법희 노스님 시봉 및 정진
1990-2004 현재 선암사 주석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행지침 항상 화두를 들고 공부하자
특기 옷 만들기
수계제자 혜견(慧見)·지율(智津)·경률(暻律)

활동 및 공헌

출가

종식(宗植)스님은 1944년 3월 16일 경남 진양군 대평면에서 아버지 하주락과 어머니 성귀녀 사이의 2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이며, 이름은 하순녀이다. 스님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어느 보살 한 분을 수양어머니로 삼았는데 불심이 매우 깊은 분이셨다. 수양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던 중 한때 천축산 무문관의 조실로 계셨던 원공(법호 일화) 큰스님을 친견하였다.
그때 스님은 원공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1966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영명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수양어머니와 함께 법희 노스님을 몇 번 찾아뵈며 법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법희 노스님의 맏상좌인 영명스님 앞으로 출가한 것이다. 법희 노스님은 만공 큰스님 문하에서 공부하고 인가를 받으신 비구니로서 최초의 도인으로 불렸던 분이다.
스님은 1967년 3월 수덕사에서 벽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1977년 3월 7일 쌍계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법희 노스님 시봉

종식스님은 10여 년 정도 견성암에서 법희 노스님의 시봉을 들었다. 그러던 중 법희 노스님이 1975년 3월 9일 세수 89세, 법랍 85세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입적하시자 49재까지 모신 후 견성암을 나와 선방을 다니며 공부하였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아 선암사로 오게 되었다. 법희 노스님을 시봉하는 동안 스님은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은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법희 노스님은 설법보다는 행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셨고, 선방에서 입승을 살면서 오직 공부에 몰두하신 분으로 평생 주지를 한 번도 맡은 적이 없었다.

종식스님2.png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도인이란 바로 저런 분을 일컫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종식스님은 앞으로 어른이 되면 노스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였다. 지금도 노스님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하며 살지만 마음같이 잘 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라고 한다. 노스님은 어떻게든지 수좌들을 공부시키려고 입선하도록 배려하고 자신은 달밤에 보리밭으로 나가 홀로 일을 하면서 대중 울력을 시키지 않으셨다. 한때 종식스님은 노스님을 조그만 암자(견성암 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학서암)에서 모시고 산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산에서 낫으로 풀을 베고 있는데 그 풀들을 노스님이 지팡이로 뒤집어 놓으면서 “내가 몸이 아파서 좀 앓아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으시고 계속 풀을 뒤집고 다니셨다. “노스님께서는 편찮으시다면서 왜 쉬지 않으십니까?” 종식스님이 여쭙자 노스님은 짧게 대답하셨다. “지금 앓고 있는 중이야.” 그러면서 노스님은 하루 종일 벤 풀들을 뒤적거리며 말리셨다. 그처럼 작은 일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몸소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고 종식스님은 노스님의 뒤를 따르리라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졌다.

종식스님3.png

스님은 ‘노스님만큼만 한다면 중노릇 참 잘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에 상좌들한테도 노스님 얘기를 자주 들려준다고 한다.
법희 노스님은 하찮은 짐승까지도 귀한 중생으로 생각하며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셨다. 수덕사 견성암을 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견성암에서는 어린 강아지를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너무 어려서 어미를 찾느라 밤새 낑낑대며 우는 바람에 일꾼들이 잠을 설쳤다고 투덜대었다. 이에 종식스님이 강아지를 꾸짖으며 때린 적이 있었다. 때마침 노스님이 정랑을 다녀오다가 그러한 종식스님의 모습을 보고 “네가 언제부터 사람 되었다고 강아지를 때리느냐!” 하고 호통을 치셨다. 노스님의 꾸중이 너무나 서러운 나머지 종식스님은 울음을 터뜨렸고, 잠시 후 노스님은 “네가 미워 그런 게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네가 전생에 강아지였을 수도 있고 강아지가 너였을 수도 있잖느냐. 그러니 강아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해라.” 하고 조용히 타이르셨다. 노스님의 그 말씀에 감화를 받은 이후 원래부터 동물을 싫어하던 종식스님은 고양이든 개든 모든 짐승을 다 예뻐하게 되었다. 종식스님은 노스님을 모시면서 전혀 어려운 점이 없었다. 노스님께서 워낙 아랫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대해주셨기 때문이었다. 노스님을 시봉하면서도 대중 소임을 살 정도로 편히 대해주셨던 것이다.
어느 추운 날이었다. 노스님이 소맷부리를 걷어올리고 계셔서 종식스님이 여쭈었다. “스님, 추운데 왜 소매를 올리고 계셔요?” 그러자 노스님이 소매 안쪽을 보여주시는데 때가 검게 묻어 있었다. 소매 땟자국을 보여주며 “종식이 네가 너무 바쁘니 그렇지. 네가 바쁜 것 같아서 너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그랬다.” 하고 말씀하며 가볍게 넘기시는 것이었다. 저녁이면 노스님 다리를 곧잘 주물러드리곤 하였다. 그러면 노스님은 항상 가만히 선정에 드셨는데 종식스님은 그 모습이 너무 좋아 졸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리를 주물러드렸다. 공양을 드릴 때도 밥이 질어 죄송해 하면 “이에 좀 달라붙어서 그렇지 괜찮다.”고 하셨고, 밥이 되어 꼬들꼬들하면 “밥알이 따로 돌아다닐 뿐이지 괜찮다.”고 하셨다.
노스님은 아랫사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는 말씀이 일절 없으셨다. 잘했다 못했다 아무런 지적 한 번 없이 스스로들 알아서 하도록 했고 그것을 다 가만히 받아들이셨다. 종식스님은 자신이 시봉을 잘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분이든 우리 노스님만 같으시면 열 분 시봉도 들었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이렇듯이 법희 노스님은 행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실 뿐 특별히 법문을 하시거나 말을 앞세우지 않으셨다. 때로는 노스님의 법문을 듣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 종식스님은 노스님의 행이 곧 법문이었음을 깨달았다.

행자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종식스님의 행자 시절도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그 당시는 견성암을 짓기 시작한 단계였기 때문에 울력이 참 많았다. 그 시절에는 수행과 공부보다 ‘어떻게 하면 일을 많이 하고 잘하느냐가 중노릇의 전부다.’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어른스님들 시봉을 잘 받드는가. 어떻게 하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대중의 눈에 들며 노스님 눈에 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 무렵 종식스님은 노스님, 은사스님, 사숙님(현재 서울 승가사 주지) 이렇게 세 분을 모시고 살았다. 물론 요즘처럼 따뜻한 물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고 비누나 고무장갑 등도 귀해서 하루에 세 번씩 빨래를 하느라 애를 먹었던 시절이었다. 머리 감은 물을 모아서 빨래를 하기도 했고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시냇가로 나가기도 했다. 요즘에는 선방에서도 오히려 복을 덜 정도로 너무 잘 먹는다고 지적하는 스님은 시주 들어온 물건을 아까운 줄 알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한다.

수행 및 생활

선암사 대웅전

스님은 또한 선방 사는 사람들이 불사를 너무 무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불사란 인연 따라 마무리 짓되 만약 자신이 못하면 인연 있는 다른 분이 그 뒤를 이어서 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선방을 다니던 중 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어딘가 바랑을 풀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 한 스님이 내놓은 절이 있기에 탁발과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선암사를 구입하였다. 현재 선암사는 계속 불사를 진행 중인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천천히 되어 가는 대로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곳은 원래 제대로 된 길도 없어 건축 장비조차 들여올 수 없었는데 전화위복으로 절 뒤편에 고속도로가 나게 되어 서둘러 불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출가 이후 노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한 종식스님은 어른에 대한 공경과 효도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근래 들어 스승과 함께 살지 못하고 따로 나와서 사는 스님들이 많더군요. 하지만 스승을 잘 모시든 못 모시든 간에 그것은 자신의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니죠.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어른을 모시는 일 또한 그렇습니다. 돈 천 원을 빌려 써도 그에 따른 이자가 붙듯이 어른을 공경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이자가 붙는 겁니다.” 스님의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자유로움도 좋지만 기본 정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의범절이나 효도, 어른 공경 역시 모두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잘못되거나 실수하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한 방에서 자고 일어났어도 열 번을 마주치면 열 번, 스무 번을 마주치면 스무 번, 그렇게 마주 칠 때마다 인사를 하라고 얘길 합니다. 그것이 효도예요. 날마다 비단옷에 좋은 반찬만 해드리는 게 효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효도란 어른 하시는 일에 거스르지 않고 그저 상냥하게 대해 드리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도의 절반은 닦아집니다.”
스님은 상좌들도 그러한 생각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
또한 ‘왜 내가 중노릇을 하는가? 왜 내가 중이 되었는가? 중노릇을 잘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항상 자문하고 ‘필경 꼭 이루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확실히 인식하며 사는 것을 기본으로 삼으라고 당부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기본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세속과 절집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라는 것이다. 스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젊은 후학들에게 이렇게 강조한다.
“중노릇도 인간이 먼저 되어야 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가장 근본인 인간성이 제대로 되어 있을 때 그 가운데 효도하는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도 나오고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식, 무식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스님은 처음 입산했을 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노스님이 시키시는 대로 절구에 절을 하였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수행이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우리 출가자들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1990년부터 선암사에 머물면서 수행 정진 중인 종식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견(慧見)·지율(智津)·경률(暻律)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43~349.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