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현각(玄覺)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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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현각(玄覺)스님은 한국동란과 불교정화운동의 어려운 시기에 모진 병고를 물리치고 수행정진하였으며, '중은 중으로 살다 중으로 죽어라.' 라는 말을 평생의 수행 지침으로 삼고 실천하신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1935 강원 강릉 출생 
1948 오대산 지장암에서 묘경(妙瓊)스님을 은사로 출가 
      지장암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2 창원 성주사 거주
1955 윤필암 원주 소임
1956 홍제사 별좌 소임 
     서울 선학원에서 별좌 소임 (정화 당시)
1957 동화사 주석
1960 김룡사 재무 소임(진오스님 주지 재직 시) 
     석남사 총무 재무 소임
1961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3 마산 덕산 단감나무 단지 조성, 10여 년간 농사를 지으며 정진
1995 진동 용문사 주지 취임 및 가람 보수
1998~2004 문경 대성사 주지 
  • 문 중 : 법기(法起)
  • 수계제자 : 대월(大月)·대륜(大侖)·공원(空圓)·천주(千珠)·대진·대훈·대오·대준

활동 및 공헌

출가

현각(玄覺)스님은 1935년 5월 3일 강원도 강릉에서 아버지 김상봉과 어머니 이종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이름은 김경희이다. 1948년 스님의 나이 14세 때 육수암 노스님인 이모를 따라서 부처님을 친견하러 갔다가 스님 이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오대산 지장암에서 출가했다. 그해 6월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고, 세수 27세 되던 1961년 양산 통도사에서 혜근스님과 같이 최초로 자운화상께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성철스님을 만남

스님은 17세 때에 성철 큰스님께 화두를 받았다. 인홍 노스님께서 대중과 함께 정진하던 시절, 점심 공양을 마치고 길을 떠나 마산에서 100리가 넘는 길을 탁발해가며 성철 큰스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화두를 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성철 큰스님은 스님이 어리다며 믿지 않으셨다. 성철 큰스님은 화두를 타서 참선을 하다가 중간에 마음이 변하여 글을 배우러 갈 것을 우려하여 쉽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에 현각스님을 비롯하여 도용스님, 현묵스님, 혜옥스님 등이 같이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성철 큰스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그러자 성철 큰스님이 물었다.

“해와 달이 바뀌고 하늘과 땅이 바뀌어도 맘이 안 바뀌겠느냐? 그럴 자신이 있으면 가서 절 삼만 배를 하고 오너라.” 

이에 현각스님 일행은 곧바로 삼만배를 하고 화두를 탔다. 현각스님은 '그때 그 마음이 변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화두를 받고 창원 성주사에서 정진할 때, 성철 큰스님께서 성주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에 대중스님들은 탁발하여 초가집과 마구간을 구입하고 수리하여 정진했다.
성철 큰스님은 그 토굴의 이름을 '멸빈암' 이라고 지어주셨다.

윤필암에서의 고된 생활

윤필암에 있는 젊은 스님들은 정진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고, 스님 역시 참선수행 정진에 힘을 썼다. 스님은 21세에 윤필암에서 원주를 살았는데, 그 시절에 정화가 일어났다.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대립에 비구·비구니가 모이고 대중들이 함께 동참했다. 처음에 비구니스님들은 선학원에 있고, 비구스님들은 조계사에 있었는데, 나중에는 비구·비구니가 조계사에 모여 정화운동을 했다. 과거에 성철 큰스님께 죽을 때까지 마음 변하지 않고 글공부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스님은 선학원에 있을 때에도 경전을 배우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별좌 소임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별좌 소임은 말할 수 없이 힘이 들었다. 정월달이 되면 하루에도 여러 번 제를 지냈는데 콩나물 한 가마니, 시금치 한 가마니, 숙주나물 한 가마니 등 음식들을 대량으로 장만했다. 하루 종일 제사 준비로 음식과 씨름을 하곤 했다.

병고에 시달림

이렇게 고된 생활을 하다 보니 피난길에 다쳤던 병이 재발하였다. 피난 중이라 정확한 진단을 하지 못해서 그저 단순한 열병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제대로 먹지도 못한데다가 지치고 힘이 들어서 병이 났으므로, 병든 이유를 생각하고, 음식을 먹으면 옆구리 통증이 가라앉았다. 이런 병고에 시달리면서 소임을 계속 살았다. 공양주, 채공 등 별좌가 책임을 지고 두량을 해야 하는 힘든 일이 계속 되어서 병은 점점 깊어 갔다. 별좌는 항상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가장 늦게 잠을 자야 했는데 자리조차 없어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잠을 잤다.
자리에 누우면 옆구리 통증 때문에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또 별좌 소임을 다해야 했다. 이런 일을 매일 같이 반복하다 보니 그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정화운동 결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서 아프다고 호소할 틈조차 없었다. 스님의 병은 갈수록 더욱 악화되었다. 스님은 석남사에 가서도 힘든 소임과 정진을 해내느라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속으로만 앓았는데, 결국 스님의 병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 같아서 석남사를 떠나 태백산 각화사 동암과 문경 김룡사에서 정진했다.
약도 먹지 않고 죽을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병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 후 다시 석남사로 돌아가서 정진을 했는데, 그때 인홍 노스님은 주지 소임을 맡은 상황에서도 3년 결사를 하셨다. 그래서 손상좌인 스님이 3년간 총무 소임을 살게 되었는데, 병이 너무 깊어 성철 큰스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심정으로 해인사를 찾아갔다. 이때 해인사 극락전에는 은사스님과 철마스님, 묘행스님께서 정진하고 계셨다. 현각스님은 그 곳에서 다시 별좌 소임을 맡게 되었다.
노스님께 정말 아프다고 말씀을 드렸으나 신심이 없어서 그렇다며 꾸중만 하셨다. 이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다시 일을 해나가던 스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병원을 찾았다. 진단 결과 늑막염이 폐까지 전이된 상황이라고 했다. 얼마나 심각한지 병원에서도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정도라고 했다.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얼마간 먹고, 입원도 해보았지만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

성철스님의 병고액난 치료법

낙담한 스님은 죽을 마음까지 모질게 먹었다. 그런데 죽을 때 죽더라도 화두를 탔던 성철 큰스님께 인사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큰스님을 찾아 성전암으로 갔다. 당시 성철 큰스님은 비구니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구스님 도 만나주지 않은 채 정진에 몰두하고 계셨다. 현각스님은 풍전등화와 같은 목숨을 붙들고 죽을힘을 다해 눈물 콧물 쏟아가며, 어른스님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성전암으로 올라갔다. 어린아이들은 굉장히 좋아했지만, 어른스님이 찾아오면 정진하고 참선하라면서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셨던 큰스님은 성전암으로 들어서는 현각스님을 보자마자 신심이 없다며 걱정을 하고 크게 꾸짖으셨다. 현각스님은 기운이 없어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 스님을 보더니 큰스님은


“살고 싶으면 절을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밥숟가락도 못 드는 처지인데 삼천배를 시키신 것이다. 현각스님은 눈앞이 깜깜했으나 큰스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하루 삼천배의 절을 시작했다. 스님은 해인사 극락전에서 성전암까지 온힘을 다해 오가며 절을 했다.


격주 간격으로 49일 동안 쉬지 않고 삼천배를 하는 동안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고, 절을 하다가 피를 토하기도 했다. 두 발로 걸을 힘이 없어 기어 다닐 때는 끊어지지 않는 목숨이 원망스러웠다. 너무 힘이 들어 포기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이 몸을 부처님께 맡긴다.'는 생각으로 죽을 힘을 다해 절을 해나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삼천배가 끝나곤 했다.

그런데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절을 하는 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건강한 사람보다 더 빨리 절을 하기도 했다. 이 모습을 보고 큰스님께서 다시 꾸지람을 하셨다.
“신심을 내서 하면 되는 것을 왜 죽을 생각을 하느냐. 멍청해서 15년이나 앓고 있었다.”


매일 삼천배를 계속하다 보니 '내가 오늘 과연 삼천배를 다 하긴 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수월해졌다. 49일 동안 하루에 삼천배를 하며 기도하기를 계속 반복하는 동안 어느덧 1년이 흘렀다.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하루에 삼천배를 올리는 현각스님을 학인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마치 동물원의 동물 보듯 신기하게 여겼다. 스님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니 오죽 했겠는가. 한번은 주위 사람들이 스님을 보고 화장을 한 게 아니냐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스님의 얼굴이 환하고 생기 있어 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병이 점점 나아지고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느낀 스님은 다시 병원을 찾았다. 역시나 의사들도 깜짝 놀랐다. 검사 결과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호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망상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현각스님은 상좌들에게 늘 참선을 강조하고 있다.

“선방에 가보면 열심히 정진하는 스님들도 많지만, 옛날에 비해 너무 잘 먹고 편하게 살아서인지 
  몸과 마음이 둔해져서 기도도 제대로 못하는 스님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먹을 게 없어 고생하고 힘들게 살았던 때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굶주리고 궁한 처지에 놓이면 무슨 일을 하는 더 열심히 하는 면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선방에서 책도 못 보게 할 정도로 참선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게 했지요.” 


상좌들이 모두 훌륭한 스님이 되어 한국 비구니계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스님은
특히 참선을 할 때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내용적으로 알차고 정직하게 할 것을 강조한다.

현각스님

수행생활과 후학지도

현각스님의 은사스님은 인홍스님의 맏상좌였다. 청백한 정신으로 절의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는 한편,
제자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던 분이셨다. 그런 은사스님을 현각스님은 진심으로 존경했으나,
마음껏 시봉을 해드리지 못한 점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은사스님은 세수 61세에 세연을 거두셨다.
현각스님이 59세 때의 일이었다. 스님은 그때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의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현각스님은 '중은 중으로 살다 중으로 죽어라.' 라는 말씀을 평생의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대월(大月)·대륜(大侖)·공원(空圓)·천주(千珠)·대진·대훈·대오·대준 스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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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지장암, 통도사, 윤필암, 자운스님, 성철스님, 인홍스님, 불교정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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